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6 - 갈라진 사림

從心所欲 2019. 10. 8. 12:47

전랑(銓郎)1은 조선시대 문무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정5품 정랑(正郎)과

정6품관인 좌랑(佐郎)직의 통칭이다. 조선시대에는 무관(武官)보다는 문관(文官)이 더 우대되고

중시되었으므로 병조보다는 이조전랑이 더 중시되었다. 전랑에 대한 직제는 태종 때 직제를 고쳐 정랑과

좌랑을 각각 3원(員)으로 정했고 이는 뒤에 『경국대전』에도 법제화되었다.

조선은 관리 임용의 권한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1품의 삼정승이 소속된 의정부에 있지 않고 이조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인사권을 가진 이조의 수장인 이조판서가 어떤 면에서는 삼정승보다 더 큰 권한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조판서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하여 삼사(三司) 관리의 추천권은 이조판서가 아닌

이조전랑에게 그 전권을 주었다. 즉, 삼사에 대한 인사권을 대신들의 손에서 독립시킴으로써 이들 삼사의

관리들이 대신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감찰, 탄핵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려는 제도였다.

 

이조전랑은 비록 품계는 낮았지만 각 부서의 당하관(堂下官)의 천거, 홍문관 등 삼사 청요직의 선발권인

통청권(通淸權), 재야 인재를 추천할 수 있는 부천권(部薦權), 자신의 후임을 지명할 수 있는 천대법(薦代法)

등의 특권을 갖는 자리였다. 그리고 전랑직은 중죄가 아니면 탄핵받지 않았고, 순조로운 승진이 보장되어

정승에 이르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전랑에게 이러한 특권을 주고 우대한 것은 대신의 권한을 견제하여 전횡을

막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전랑은 삼사(三司)의 인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3사의 언론은 은연중 전랑의 지휘를

받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삼사를 통하여 대신들의 권리 남용을 견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권한 때문에

당상관들도 길에서 전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전랑직은 조선시대에

중요한 청요직(淸要職)으로, 홍문관 출신의 명망 있고 젊은 문신 중에서 선임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선조 5년인 1572년, 이조좌랑 오건(吳健)이 사직하고 경상도 산음현으로 낙향하면서 후임자로

김효원을 추천하였다. 김효원(金孝元, 1542 ~ 1590)은 명종 말 문정왕후가 죽은 뒤 척신들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이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1564년에 진사가 되고, 1565년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 정언(正言)2 등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김효원을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당시의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었다. “사람들이 김효원을 고결한 선비로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고결한 선비는커녕 척신 윤원형의 식객(食客)으로 있던 지조 없는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며 김효원의

임명을 반대했다. 심의겸은 자신이 명종의 심부름으로 윤원형의 집을 방문했을 때 거기서 김효원을 보고

실망했던 감정을 표출한 것이다. 게다가 이조참의란 자리는 위로 이조판서(吏曹判書: 正二品)와 이조참판

(吏曹參判: 從二品)에 이은 이조(吏曹)의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직으로 이조전랑은 자신이 거느리고

같이 일을 해야 하는 자리인데 그런 자리에 김효원이 온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기에 적극 나서서 반대를 했을

것이다. 결국 이때 김효원은 이조좌랑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러나 2년 뒤인 1574년 7월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결국 이조좌랑이 되었고 다시 한 달 뒤에는 정랑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이듬해인 1575년 1월 김효원이 이조정랑을 그만 두자 그 자리에 추천된

인물이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었다. 심충겸 또한 1572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급제한 문명이 있던

인물이었으나, 심의겸이 자신을 반대했던 것을 가슴에 담아두었던 김효원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대에 나섰다.

“이조의 벼슬이 어찌 외척집안 물건이냐?”

김효원이 외척 운운한 것은 심의겸이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이었던 까닭이다. 물론

심의겸이 전 왕실의 외가 집안인 것은 맞지만 김효원의 말은 지나친 데가 있었다. 척신(戚臣)이라는 것은

권력의 획득이나 유지를 위하여 그 신분을 이용하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더구나 심의겸과 심충겸은

왕비와의 인척관계를 통하여 벼슬에 오른 것이 아니라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인물들이었다.

윤원형의 전횡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을 때 명종은 그를 견제하기 위하여 처외삼촌인 이량(李樑, 1519 ~ 1582)

을 끌어들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량은 명종의 신임을 이용하여 윤원형 못지않은 전횡을 부리며 당파를

만들어 강직한 대신인 이준경과 허엽, 기대승, 이산해(李山海), 윤근수(尹根壽) 등을 조정에서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이 음모를 막고 이량을 탄핵하여 유배를 보낸 것이 심의겸과 그 아버지인 심강(沈鋼)이었다.

심의겸은 자신의 외삼촌을 탄핵한 것이었다. 집안의 융성을 우선시했던 조선시대에 공의(公義)를 앞세워

집안사람을 탄핵하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였다. 이는 심의겸이 바른 정치에 대한 신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일로 심의겸은 당대의 사대부들이 그 기개를 칭찬하여 서로 사귀기를 원할 만큼 전국에 그

이름을 떨치던 인물이었는데 그런 심의겸을 향해 외척이라 한 것은 적개심에 내뱉은 억지스러운 말이었다.

어쨌거나 김효원의 반대로 심충겸은 이조정랑에 임명되지 못했다.

 

[노원구 화랑로에 있는 명종과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능인 강릉(康陵)]

 

이조전랑의 문제로 심의겸과 김효원 간에 서로 말이 오가자 자연히 당대의 사대부들은 그 옳고 그름에 대하여

논쟁을 하게 되었다. 대체로 젊은 층은 김효원을 지지하였고, 노장층은 심의겸을 지지하였다. 이런 세대 간의

의견 차이는 윤원형 세대를 경험했느냐 못 했느냐에 따른 영향일 수도 있다. 윤원형의 전횡을 경험해보지 않고

그로부터 피해를 입어본 일이 없는 젊은 사대부들은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

별 큰 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두 세력 간의 의견 차이를 더욱 확고히 하는 일이 발생했다. 김효원의 일파인 대간 허엽(許曄, 1517

 1580)3아 사소한 일을 가지고 우의정 박순(朴淳, 1523 ~ 1589)의 허물을 조사하자고 청하자 박순이

스스로 물러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염치와 명예를 소중히 여겨 삼사의 탄핵을 받으면 혐의의 사실 유무와

관계없이 자진해서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다. 허엽과 박순은 모두 서경덕의 제자로 동문이었다. 그러나 심의겸,

김효원의 문제로 의견을 달리 하면서 서로 상대편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도 조정과 사대부들의 의견이 갈렸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소장세력은 허엽의 탄핵이 당연한

것이라 주장했고, 심의겸 등 노장세력은 허엽의 행위가 지나친 것이라 판단했다. 이렇게 견해가 상충되면서

조정의 세력이 둘로 갈라졌는데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유성룡, 허엽, 이산해, 우성전, 이발 등이었고,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박순, 정철, 윤두수 등이었다. 김효원의 집은 지금의 중구 인현동 일대인 건천동

(乾川洞)4에 있고 심의겸의 집은 지금의 덕수궁 뒤편 정동 지역인 정릉방(貞陵坊)에 있어, 이때부터 각기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고지도 상의 건천동]

 

[김효원과 심의겸의 집 위치]

 

앞의 여러 사화가 훈구파, 공신파와 사림간의 갈등이었다면 이때부터는 사림간의 갈등이었다. 사림은 그

출신보다는 학문과 행실에 기준을 둔 것으로, 명종 이래 사림의 인물이 계속 유입되면서 선조대에 이르면

더 이상 훈구파와 사림을 가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사림이 조정의 핵심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이 사림을 갈라지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이때 자신들의 행동이

이후 250년 이상 조선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당쟁의 시초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참조 : 뜻밖의 한국사(김경훈, 2004, 오늘의 책),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1997, 출판사 석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전랑의 전(銓)자는 ‘사람 가릴 전’ [본문으로]
  2.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본문으로]
  3.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허균(許筠)의 아버지이다. 그는 30년간이나 벼슬을 했음에도 생활이 검소했다는 평을 받았다. 다만 ‘율곡집’에는 그의 이론이 모순된 점이 많고 문장이나 글이 뜻에 잘 통달되지 못했다고 하였고, 이황(李滉)은 그가 차라리 학식이 없었다면 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개탄하였다. [본문으로]
  4. 한양 남산과 청계천 사이에 있던 마을. 고지도를 보면 남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줄기 동편에 건천동이 위치한다. 건천동은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옛 명보극장, 지금의 명보아트홀 앞에 ‘이순신장군 생가터’라는 비석이 놓여 있는데 실제로는 지금의 비석 위치보다 300m 떨어진 인현동 1가 31-2번지 ‘신도빌딩’이 이순신 장군의 생가터라는 것이 그 후의 연구 결과이다. 현재 인현동 일대가 충무로라고 불리는 이유도 이순신이 나고 자란 곳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집안이 몰락하여 외가인 아산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고, 충남 아산은 이순신의 외가로 현재 현충사는 그의 어머니에게 상속된 것을 이순신이 다시 물려받은 장소라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