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3 - 집안 내력

從心所欲 2019. 10. 27. 18:02


박지원의 집안은 대대로 가난했다. 벼슬을 못 해서가 아니다. 중종 때의 문신이었던 박소(朴紹) 이후로

집안은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선조들이 대대로 청빈했고 검소했다. 박지원은 이를 자부심으로 여겨

아들들에게 선조들의 검소했던 삶을 전하며 “너희들이 장차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마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고 가르쳤다.


박지원은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1에 있는 그의 할아버지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할아버지

박필균(朴弼均, 1685 ~ 1760)은 1725년(영조 1)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승지 등을 거쳐, 동의금(同義禁), 경기감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집이 낡고 누추하였지만 평생 거처를

옮기지 않고 한 집에서 지냈으며, 한번은 집에 심하게 무너진 곳이 있었는데 때마침 지방 수령에 임명되자

박필균은 “수령이 되어서 집을 수리하는 건 옳지 않다”며 집을 수리하지 않을 정도로 청렴을 고집하였다.

그런가 하면 끼닛거리가 떨어질 때도 많았는데, 양식이 떨어지면 고을 수령들이 선물로 보내준 육포와

건어 따위를 찢어 아침 식사를 대신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왜 그걸로 쌀을 팔아 밥을 짓지

않으시는지요?”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박필균의 부인이자 박지원의 조모는 “시정 사람들에게 공경(公卿)

집안의 가난함을 알려서야 되겠어요?” 했다고 한다.

당시의 집안 사정을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과정록(過庭錄)」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했다. 증조부인 장간공(章簡公)2 역시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하였으며,

집안일에 마음을 쓰지 않으셨다. 조부의 여러 형제분들3이 한 방의 좌우에서 증조부를 모셨으므로

아버지 형제는 책을 펴놓고 공부할 곳이 없었다. 마을 아이들 중에 아버지를 따라 공부하는 자가

10여 명쯤 되었다. 아버지는 이들에게 지시하여 뜰 가운데 서너 개의 서까래를 세우게 하셨다. 그리하여

목수를 부리지 않고 눈썰미로 요량해 집을 완성하셨다. 아버지는 이 집에 큰아버지와 함께 거처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갑이었으며, 어려서 유안공의 가르침을 받아 일찍부터 여자로서의 행실이 있었다.

어머니는 열여섯 살 때 아버지에게 시집오셨다. 그때 증조할아버지 장간공께서는 벼슬이 경기감사에

오르셨으나, 청빈하기는 벼슬하지 못한 선비 시절과 매한가지였다. 그 당시 집이 너무 좁아 어머니가

거처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결혼하고 나서 유안공(遺安公)4 집에 계실 때가 많았다.


경기감사는 지금의 경기도지사로 종2품의 당상관 직이다. 그런 고위직이면 녹봉(祿俸)도 상당했을 텐데

왜 박지원의 집안은 이런 궁상을 떨어야 했을까?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 12폭 병풍, 135.8 × 442.2cm, 호암미술관]



[경기감영도 왼쪽에서부터 6~9폭 경기감영 부분, 지금의 서대문 적십자병원과 삼성강북병원 지역]


조선 관리들의 녹봉제는 태종 7년부터 세종 20년까지의 정비작업과 그 뒤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18등급(과)으로 나누고 사맹삭반록(四孟朔頒祿)이라 하여 1년에 4번, 정월·4월·7월·10월에

지급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등급은 이후 9등급 또는 13등급 등으로 상황에 따라 바뀌었으며, 녹봉의

지급시기도 숙종 때부터는 월봉제로 바뀌었다. 조선 관리들의 녹봉은 개국 초부터 고려 때에 비하여 훨씬

적게 책정되었는데 특히 임진왜란 이후 국가재정이 파탄되자, 녹봉제도 위기를 맞아 다시 또 줄어들었고

곡물 외에 같이 주던 세포(細布)의 지급도 없어졌다

인조 때의 가장 높은 제1과인 정1품의 녹봉이 1년에 쌀 44석, 좁쌀 8석, 콩 16석이었다. 조선시대의

쌀 1석(石)은 15말[斗] 남짓이었다. 쌀 1되를 5인의 한 끼 식사 분량으로 치면 쌀 1석은 5인 가족의 150끼,

즉 50일치 식량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대가족사회였다. 박지원의 경우만 봐도 할아버지 박필균을 필두로

3대가 함께 살았으니 집안에 부리는 노비를 뺀 가족만 해도 10명이 넘었을 것이다. 10명으로 쳐도 1석은

25일치 식량이고 거기에 쌀을 팔아 부식을 마련하는 것을 감안하면 20일치 식량 정도가 됐을 것이다.

이런 계산도 인원을 최소화하고 다른 씀씀이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숫자다. 그런데 다시 또 경종 때에

이르면 1과의 녹봉이 쌀 30석6두, 콩 16석으로 양이나 품목에서 또 줄어든다. 조선시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받는 녹봉이 다른 허튼 짓 하지 않고 그저 식구들 밥 먹는 데만 모두 써도

600여일분의 식량을 확보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관직이 계속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자금처럼 연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조 때 제일 하급인 9품의 경우 3달에 쌀 2석, 콩 1석을 받았다. 1년으로 치면 쌀 8석이다.

산술적으로는 겨우 5달 남짓 연명할 양식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벼슬을 해도 따로 개인적인 재산이나

토지가 없으면 살림이 넉넉할 수가 없는 구조였다.


박지원의 선조로, 고려 말과 조선 전기의 문신(文臣)인 박은(朴訔, 1370 ~ 1422)이 있다. 그는 2번에 걸친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5 3등에 책록되고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으며

한성부윤, 전라도관찰사,·의정부참지사 겸 대사헌을 거쳐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평양부윤, 의정부지사,

병조판서, 호조판서,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 겸 판이조사(判吏曹事)6를 역임하는 등 화려한 관직을 거쳤다.

그런 박은의 일화다.


하루는 태종이 갑작스럽게 낙산(駱山)에 있는 박은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태종은 박은이 빨리 나와

영접하지 않은 것을 노여워했다. 그러자 박은이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마침 탈속반(脫粟飯)7을 먹던 중이어서 그대로 나와 전하를 뵈면 실례가 될 듯하여 양치질을 하고

나오느라 감히 늦었사옵니다.”

태종은 그 밥을 가져오라고 하여 확인하고는 더욱 노했다.

“이는 저 옛날 공손홍(公孫弘)이 삼베 이불을 덮었던 일8에 해당되지 않는가? 어찌 조정 대신으로서

탈속반을 먹는 자가 있단 말인가?”

이에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아뢰었다.

“대신(大臣)을 의지해 살아가는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워낙 많아 녹봉으로 받은 쌀이 그날 저녁이면

다 흩어져버립니다.”

태종이 무안해져서 말했다.

“내 잘못이로다! 내가 임금이 되어서도 소싯적 친구에게 탈속반을 먹게 하다니. 나는 도저히 경(卿)의

훌륭함을 따라가지 못하겠구려.”

그리고는 태종은 즉석에서 동대문 밖 고암(鼓巖)9의 전지(田地) 10결을 하사하였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녹봉은 받는 이들에게는 이처럼 생활하기도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워낙 빈약한 국가

재정이라 국가는 녹봉에 대한 부담이 컸다. 조선시대 지방 수령의 녹봉은 아록전(衙祿田)이라고 하는

지방 관아에 배정된 토지에서 나오는 재원으로 충당했다. 지방 수령을 제외한 녹봉의 지급 대상은 종친과

이성(異姓)의 봉군(封君)을 비롯해 중앙의 문무관원과 잡직 종사자들이다. 이들에 대한 녹봉액은 건국

초기에는 10만석 내지 12만석이던 것이 명종 연간에는 14만석으로까지 늘어났다. 그런데 명종 때의 1년

세입이 26만7천석이었으니 녹봉이 국가 수입의 절반도 넘는 상황이었다. 이후 녹봉은 줄이고 세입은 조금

늘어 숙종 때에는 세입이 30만석, 녹봉은 10만석 수준이었다고 한다.


흔히 박지원에 대한 소개 글에는 박지원이 과거에 실패했다고 기술하여 박지원이 계속 과거에 도전했지만

급제하지 못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과정록(過庭錄)」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 「과정록(過庭錄)」필사본]


아버지는 경인년(1770년) 감시(監試)10에 응시하여 초종장(初終場)11에 모두 장원을 하셨다.

방(榜)이 붙던 날 저녁, 임금님께서는 아버지에게 침전(寢殿)으로 입시(入侍)하라는 특명을 내리시고,

지신사(知申事)12로 하여금 시험 답안지를 읽게 하셨다. 임금님께서는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어가며 들으셨다. 그러고 나서 크게 격려하는 말씀을 해주셨다.

아버지는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으려 하셨는데, 꼭 응시해야 한다고 권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억지로 시험장에 들어가긴 했으나, 답안지를 내지 않고 나오셨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는 모두 말하기를, “구차하게 벼슬하려 하지 않으니 옛날 사람의 풍모가 있다.”고 하였다. 유안공

(遺安公)은 이때 시골집에 머물러 계셨는데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지원(趾源)이 회시를 보았다고 하여

나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는데, 시험지를 내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으니 몹시 기쁘구나.” 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초시의 초종(初終) 양장(兩場)에서 장원을 하신 것은 모두 우연이었으나, 임금님의 극진한 은혜를

입게 되매 그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래서 당시 시험을 주관하는 자들은 아버지를 반드시 회시에 합격시켜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 하였다. 아버지는 이런 분위기에 영합하여 이익을 구하는 것을 경계하여 용감하게

이 같은 결단을 내리신 것이다.


박지원의 장인인 유안재(遺安齋) 이보천(李輔天, 1714 ~ 1777)은 처사(處士)였다. 처사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유교적 교양을 갖춘 선비를 이르는 말이다. 이보천은 근엄하고 청렴 고결하여 예법으로써

자신을 단속하였던 인물이라고 하는데, 박지원은 결혼 후에 장인으로부터 「맹자(孟子)」를 배우고 이보천의

동생인 이양천(李亮天)에게서는 사마천의 글을 배웠다. 이양천은 박지원을 가르치면서 “반고와 사마천 같은

글 솜씨가 있다.”고 칭찬했고, 이보천은 "지원이는 그 재기(才氣)를 보니 범상한 아이와 크게 다르더라. 훗날

반드시 큰사람이 될 게다. 다만 악을 지나치게 미워하고 뛰어난 기상이 너무 드러나 그게 걱정이다.“라고 했다

한다. 박지원은 그 장인을 늘 마음속 깊이 존경했기에, 그 친구들이 말하기를 ”연암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그렇건만 매사에 번번이 그 장인을 칭송하여 자기는 따라갈 수 없다고 하니 참 이상한 일이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추측컨대 박지원은 장인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과거에는 큰 뜻을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과정록(過庭錄)」에는 과거에 임하는 박지원의 태도를 보여주는 글들이 또 있다.


아버지는 소싯적에 때로 남들과 함께 과거공부를 하였다. 그리하여 한문홍, 이희문, 이홍유, 황승원,

홍문영 등 여러 분과 때때로 어울려 과거시험의 글쓰기를 익히셨지만, 그것을 좋아하신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자주 하신 것도 아니었다. 매양 성균관의 과거시험장에 들어가면 반드시 한유(韓愈)와 두보(杜甫)의

고체시(古體詩)를 본떠 시를 지으셨는데 그 시가 기이하고 뛰어나 읽을 만했으므로, 친구들이 특이한

구절을 외워 전하곤 하였다. 그러나 왕왕 한편의 글을 다 짓지 않은 채 답안지를 내고 나와 버리곤 하였으니,

아버지께서 과거시험의 합격 여부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셨던 건 젊은 시절부터 그랬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의 문장에 대한 명성은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래서 과거시험을 치를 때마다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아버지를 꼭 합격시키려 하였다. 그것을 눈치 채고 어떤 때는 응시하지 않았고 어떤 때는

응시는 하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으셨다. 하루는 과거시험장에서 고송(古松)과 괴석(怪石)을 붓 가는 대로

그리셨는데, 당시 사람들은 아버지를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이는 당신께서 과거 보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럴 바에야 뭐 하러 과거시험장에는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박지원의 속마음과 저간의 사정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박지원이 “나는 과거를 일찍 그만두어 마음이 한가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산수 유람을 많이

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본인이 과거에 뜻이 없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박종채가 부친인 박지원의 초고를 편집할 때 저본으로 활용했던 <백련관잡록(白蓮館雜錄)>13, 실학박물관 소장]



참고 및 인용 :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지금의 서소문역사공원 일대 [본문으로]
  2. 박지원의 할아버지 박필균, 시호가 장간(章簡)이었다 [본문으로]
  3. 박지원의 아버지 박사유와 그의 형제들. 박필균은 3남 1녀들 두었으며 박사유가 장남 [본문으로]
  4. 박지원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 1714 ~ 1777). 호는 유안재(遺安齋) [본문으로]
  5.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본문으로]
  6. 조선 초기 고려 때의 직제를 사용하던 때의 관직명 [본문으로]
  7. 애벌로 찧어 왕겨만 벗겨 내고 도정(搗精)하지 않은 쌀로 지은 밥 [본문으로]
  8. 한나라 무제(武帝)의 신하인 공손홍(公孫弘)은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비단 이불이 아닌 삼베로 만든 이불을 덮었다. 이를 두고 당시의 강직한 인물인 급암(汲黯)이 봉록을 많이 받는 공손홍이 삼베 이불을 덮는 것은 위선이라고 비판했다 [본문으로]
  9. 지금의 종암동 [본문으로]
  10. 진사와 생원을 뽑는 사마시(司馬試)의 별칭. 문과를 대과(大科)라 하고 진사생원시를 소과(小科)라고도 했다. 1차 시험인 초시(初試) 각 지역에서 치르고, 2차 시험인 복시(覆試) 또는 회시(會試)는 이듬해 봄에 한성에서 치렀다.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를 향시(鄕試)라 하고 서울에서 치르는 초시를 한성시(漢城試)라고 하는데 박지원은 한성시에서 1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1. 초장(初場), 종장(終場)은 요즘으로 치면 1교시, 2교시의 개념이다. 초시와 회시 모두 초장, 종장이 있었다. 생원시의 경우는 각각 오경의(五經義)와 사서의(四書疑)를, 진사시는 부(賦) 1편과 고시(古詩), 명(銘),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경계하는 내용의 한문문체인 잠(箴) 중 1편을 시험 보였다. [본문으로]
  12. 도승지의 다른 호칭 [본문으로]
  13. ‘백련관(白蓮館)’은 삼청동 백련봉 아래 거주하던 때 사용한 호이다. 1767년부터 1769년 전후에 쓴 연암 박지원의 글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