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6 - 벗 유언호

從心所欲 2019. 11. 7. 06:55

 

박지원을 연암골로 피신하게 만든 유언호는 나이가 박지원보다 7살이나 위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벗으로

지냈고 그 친분은 꽤 오래되고 깊었다. 유언호는 정조에게 박지원을 가리켜 ‘벼슬하기 전에 사귄 벗’이라고

했는데 유언호가 과거에 급제한 것이 32세 때인 1761년이니 박지원으로서는 25세 전부터 유언호와 알고 지낸

사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765년에는 박지원과 유언호가 함께 금강산 유람을 하기도 하였다.

유언호는 박지원을 연암골로 보내고 나서 안심이 안 되었는지 곧 그를 뒤쫓아 왔다. 자원하여 개성유수

(開城留守)로 발령받은 것이다. 이 내용이 「과정록」에 있는데 박종채는 개성유수를 외직(外職)이라고

하였지만 개성유수는 종2품의 경관직(京官職), 즉 내직(內職)이다.

 

이에 유공(兪公)은 외직을 구해 개성유수로 왔다. 공은 부임한 즉시 구종(驅從)1들을 덜어버리고 연암골로

아버지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산수는 퍽 아름답네만, 흰 돌을 삶아먹을 수야 없지2. 이곳에서 개성까지는 30리 거리밖에 안된다네. 개성

읍내에 자네를 위해 주선해줄 만한 친지는 없는가? 성곽 가까이에도 세들어 살 만한 집이 많거늘 왜 알아보지

않는가? 내가 임지(任地)에서 날마다 자네와 함께 지낸다면 자네도 기쁠 것 아닌가.”

당시 개성 사람 양호맹과 최진관이 의기가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연암골에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주

찾아와 뵈었다. 그러던 중 이런 이야기를 듣고 모두 뛸 듯이 기뻐하며 찬성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양호맹의

금학동(芩鶴洞)3 별장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은 유공이 이미 몰래 준비해둔 터였다.

그곳 고을 자제 가운데 아버지에게 배움을 청하는 자가 꽤 있었다.

하루는 유공이 찾아와 말하기를, “내일 조정에 들어가 하례(賀禮)하는 반열에 참가한다네.” 하고는 빙그레 웃으셨다.

 

유공은 많은 사람이 앉은 조정의 반열에서 일부러 당대인의 문장을 평하며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아버지에

대해 말이 미쳤다. 유공은 짐짓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궁달(窮達)4은 알 수 없는 것이외다. 박지원이 당시에 어떠했습니까? 내가 개성에 가서 들으니

가족들을 이끌고 떠돌아다니다가 그만 부잣집에 눌러앉아 늙은 훈장 노릇을 하고 있다더군요.”

이 말에 홍국영이 껄껄 웃으며 “참으로 형편없이 됐으니 논할 것도 없구려.”라고 하였다.

유공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몰래 말했다.

“이제야 자네가 화를 면하게 됐네.”

유공의 아버지에 대한 태도는 시종 이와 같았다.

 

박지원이 금학동에 거처하게 되자 이현겸, 이행작, 양상회, 한석호 등 개성의 선비들이 거의 매일 같이 찾아와

박지원에게 배움을 청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옛 도읍지인 개성을 더럽게 여겨 내버린 땅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주민이 장사를 직업으로 삼았고 학문에 뜻을 둔 자가 더러 있더라도 과거시험 준비밖에 모르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박지원에게 배움을 얻은 뒤 이현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고을 선비들이 무지하여 경전과 사서(史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요.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고서야 비로소 과거공부 이외에 문장공부가 있고 문장공부 위에 학문이 있으며, 학문이란 글을 끊어 읽거나

글에다 훈고(訓詁)를 붙이는 것만으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박지원이 나중에 다시 연암골로 들어가게 되자 이들은 모두 책 상자를 짊어지고 따라와 한 해가 지나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고 한다. 박지원이 연암골로 다시 들어가게 된 것은 유언호의 말에 따른 것이다.

 

유공이 개성유수를 그만두게 되자 아버지를 다시 연암골로 돌아가게 했다. 유공은 아버지가 생계를 유지하지

못할까 걱정했다. 그래서 관에서 민간에 빚을 놓던 칙수전(勅需錢) 1천 냥을 아버지에게 주었다.

유공은 이렇게 말했다.

“화근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니 이 돈으로 몇 년 동안 생계를 유지하게나. 자네가 어찌 이곳에 오래 있겠나.

만약 불시에 중국에서 칙사(勅使)가 온다는 기별이 있으면 내가 마땅히 이 돈을 갚겠네.”

유공이 떠난 뒤에 양호맹, 최진관 등 여러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상의했다.

“우리들이 박공을 따라 노닌 것은 영광스럽고 다행한 일이었네. 또 박공이 여기서 사신 지 몇 년이 되었지만

한 번도 재물을 구한 적이 없으셨네. 그래서 비록 물건으로 예의를 표하려고 해도 입으로 차마 말씀을 드리지

못했었는데, 이제서야 작은 정성을 표시할 수 있게 되었네.”

그리하여 서로 분담하여 그 돈을 갚았다. 그들은 훗날 아버지께서 연암골을 떠나실 때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듣고만 계실 뿐이었다. 그 후, 아버지가 안의 현감으로 부임해 가시자 첫 해의

녹봉을 떼어 그 돈을 갚았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탄복해 마지않았다. 애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마다 약간의 돈을 갹출하여 친목회를 만들면서 말하기를 “공의 풍모를 잊을 수가 없어서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내의 석벽(石壁)에다 그 사실을 새겨놓았다.      「과정록」

 

1779년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에게 입조(入朝)를 명했다. 그 날은 7년 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날이었다고 한다. 정조를 만나고 돌아온 홍국영은 곧바로 사직의 뜻을 밝히는 소를 올렸고 정조는 이 상소를

즉시 허락하였다. 자진사퇴의 형식을 취했지만 실은 정조의 명에 따른 추방이었다.

홍국영이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던 누이동생 원빈(元嬪) 홍씨는 자식을 낳지 못하고 이듬해 5월 세상을

떠났다. 이에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의 아들인 이담(李湛)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정조의 후계로 삼고자 했다. 이것만으로도 홍국영은 선을 넘은 것이었다. 그런데 홍국영은 왕비 효의왕후

(孝懿王后)가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음식에 독약을 섞어 왕비를 독살하려다가 발각되었다.

그동안 정조의 신임을 믿고 아무리 나이 많은 상급 관리가 나타나도 전혀 예의를 갖추지 않을 정도로

안하무인에다 방자했던 홍국영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에 대한 엄한 처벌을 주장하는 소리가 드높아졌고,

결국 홍국영은 도성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는 벌을 받고 재산도 몰수당했다. 홍국영은 강릉 근처 바닷가에

거처를 마련해 술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면서 때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기도 하고, 울분을 토하기도

하다가 1781년 4월,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9살부터 32살까지의 젊은 나이에 3년 간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력을 누렸던 홍국영의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다.

박지원은 홍국영이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 해인 1780년 연암골에서 한양으로 돌아왔다.

 

경자년(更子年)에 서울로 돌아와 평계(平谿)5에 거쳐하셨으니, 곧 지계공6의 집이었다. 이때 홍국영이

실세(失勢)하여 화근은 사라졌지만 점잖은 옛 친구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분위기가 싹 변하여

옛날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더욱 뜻을 잃고 스스로 방달(放達)하게 지내셨는데 그것이 몸을 보존하는 비결임을

도리어 기뻐하셨다. 그러면서도 항상 답답해하시며 멀리 떠났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마침 아버지의 삼종형(三從兄)7인 금성도위(錦城都尉)께서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북경에 가시게 되어 아버지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5월에 길을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으며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 곧이어 열하(熱河)로 가셨다가 그 달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셨다. 귀국 후

더욱 배회하셨으며 즐거운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당시 연암골에 혼자 들어가 지내셨는데 혹은 해를 넘기시기도

하고 혹은 반년이 지나 돌아오시기도 했다.  「과정록」

 

 

그로부터 16년 뒤인 1796년, 유언호가 작고했다.

 

유충문공(兪忠文公)8이 작고하셨다. 아버지는 안의에 계실 때9 공이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편지

속에 인삼 몇 뿌리를 넣어서 보내셨다. 마침 아버지께서 벼슬이 갈려 서울로 돌아오시게 되자 공은  이 소식을

듣고 날마다 시중드는 사람에게 “연암이 도성에 들어왔다더냐?” 하고 물으셨다. 공은 약을 안 먹겠다고 물리친지

이미 오래였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보내신 어의(御醫)가 약을 갖고 와 진맥하자,

“임금님께서 하사하신 약이니 먹지 않을 수 없구나.”라고 하시고, 조금 있다 다시 말씀하셨다.

“벗이 보내준 약도 한번 복용하고 싶구나.” 그리하여 약을 달여 오게 하여 한번 드시고는 탄식하셨다.

“벗을 만나보지 못하고 사별하니 한스럽구나!”

아버지는 공이 별세한 뒤 도성에 들어오셨는데, 마지막을 지켜보며 영결(永訣)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셨다.   「과정록」

 

[이명기, 〈유언호 초상〉, 1787, 견본채색, 116.7 × 57㎝, 보물 제1504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초상화 속의 유언호는 오사모에 흉배가 딸린 단령포 차림인데 관복을 입은 인물의 전면입상은 이 초상화가

처음일 정도로 조선시대의 초상화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왼편 아래에 작은 글씨는 “崇禎三丁未 畵官

李命基 寫(숭정삼정미 화관 이명기 사)”이다. 1787년(정조 11)에 도화서 화원 이명기가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명기(李命基, 1756 ~ 1813경)는 초상화에 뛰어났던 조선 후기의 도화서 화원이다.

오른쪽 상단에도 의정대신 유언호의 58세 상(像)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림 위의 글씨는 정조가 초상화를

보고 남긴 어평(御評)인데, “우리가 서로 만나는 것은 먼저 꿈속에서 점지되었지(相見于离, 先卜於夢), 팽팽한

활시위 하나 다듬은 가죽 하나로 내게 최선과 차선을 가르쳐주었네(一弦一韋, 示此伯仲)”라고 하여 세손 시절

곁에서 자신을 성심껏 보필한 노신(老臣)에 대한 감회를 표현했다. 그림 오른쪽 아래 부분의 ‘容體長闊

視元身減一半(용체장활 시원신감일반)‘은 ‘얼굴과 키를 원래 크기의 절반으로 줄인 것이다.”라는 뜻으로

유언호의 실제 신장 크기를 화면의 비율에 맞춰 계산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참고 및 인용 :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인물한국사( 표정훈, 장선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벼슬아치를 모시고 다니는 하인 [본문으로]
  2. 명나라 진계유(陳繼儒)가 편집한 향안독(香案牘)에 나오는 이야기로 옛날 중국의 백석생(白石生)이란 신선이 양식으로 흰 돌을 삶아먹었다고 한 것을 비유한 것 [본문으로]
  3. 개성에 있던 동네 이름 [본문으로]
  4.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본문으로]
  5. 서대문 밖에 있던 평동(平洞) [본문으로]
  6. 처남인 이재성 [본문으로]
  7. 팔촌(八寸)이 되는 형, 증조 때 형제였던 자손들 간에서의 손위 형 [본문으로]
  8. 유언호의 시호(諡號)가 충문(忠文)이었다. 유언호는 사후에 정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왕이나 사대부들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하는 호이고 묘정 배향은 공로 있는 신하가 죽은 뒤에 종묘 제사에 같이 제사되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9. 안의현감으로 재직할 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