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조 9 - 기득권법

從心所欲 2020. 6. 26. 17:08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는 홍길동전의 구절은 조선의 서얼차별을 상징하는 대표적 표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는 바처럼 서얼(庶孼)은 정실부인의 자식이 아닌 첩의 자식으로, 양민 출신의 첩에게서 낳은 아들인 서자(庶子), 천민 출신 첩의 아들인 얼자(孽子)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런 구별은 양반에 한해서 적용되는 것이고 양반이 아닌 경우는 그런 구별의 의미도 없다. 조선에서 서얼에 대한 논란은 관직에 진출하는 자격의 문제를 규정한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 그 핵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 초기에는 양반의 신분이 따로 없었다. 조선은 백성의 신분을 양인(良人)과 천인(賤人), 둘로만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를 실시하였다. 천인이 아닌 자는 모두 양인(良人)으로, 모든 양인들에게는 벼슬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양반은 단지 관직에 진출한 양인을 부르던 말에 불과했는데, 문무반(文武班) 관료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관료와 그 가족, 가문까지도 양반이라 부르며 자신들을 특수계층화한 것이다. 즉 양반은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신분으로, 이런 계층의 분화를 통하여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서얼금고법은 양반 자제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법이지만, 그 이전에 첩의 소생에 대한 신분을 결정하는 법은 또 따로 있었다. 소위 종부법(從父法)과 종모법(從母法)이다. 즉 신분이 다른 남녀 사이에 태어난 자식을 아비의 신분에 따르게 하느냐 어미의 신분에 따르게 하느냐 하는 법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정략혼인으로 29명의 부인을 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래서 자칫 우리나라에서는 대대로 본처 외에 첩을 두는 것이 당연한 사회적 관습인 것으로 오해될 여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예에 따라 제후에게 허용된 특권일 뿐이었고 여성들의 권위와 지위가 남성과 거의 동등했던 고려 사회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혼인 형태였다. 그러다 고려 말에 이르면서 처를 여러 명 거느리는 풍습이 생겨나고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양반과 천민 사이의 혼인인 양천교혼(良賤交婚)은 기본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양천교혼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몽고 풍습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구 증가 정책과 다산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서로 맞물려 풍습이 달라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생자녀의 신분은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천한 쪽의 신분을 따르도록 규정하였다. 그 결과 천민의 수가 날로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러 처를 두는 풍조는 조선왕조 성립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는 유교의 기준인 일처주의(一妻主義)에 어긋나고 여러 처의 소생 사이에 상속에 대한 분쟁이 점차 늘어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일처주의는 한 사람의 처만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고려시대의 다처(多妻)를 인정하지 않고 정실부인 외에는 모두 첩으로 간주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면서 첩의 소생에 대한 신분 문제도 자연히 제기되었다. 

 

양인(良人) 남자가 천인(賤人) 출신의 처첩(妻妾)을 두는 경향은 늘어나는데 그 소생을 모두 천인으로 돌리자 양인이 국가에 필요한 신역을 담당하도록 되어있는 조선의 운영체계에 비상이 걸리게 되었다. 천인은 신역의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역 그 중에서도 특히 병역을 담당할 양인의 수가 줄어들어 국방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건국 초기의 조선으로서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책이 빈번히 논의된 결과 태종 14년인 1414년부터 양인의 비첩(婢妾) 소생에 대하여 부계(父系)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는 종량(從良)이 실시되었다. 이를 속칭 종부법(從父法)이라고 한다. 허나 이 제도는 세종 14년인 1432년에 폐지되고 부모의 신분 중 낮은 쪽의 신분을 따르도록 바뀌었다. 양인 남자가 노비를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를 ‘어미의 신분을 따른다’는 종모법(從母法)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는 이후 『경국대전』에 법제화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예외규정이 생겼다 없어지기가 반복되었지만 결국 1731년(영조 7)에는 종모법으로 확정되었다.

 

종부법 반대 이유에 대하여 ‘시행상의 여러 폐단’이라는 표현들이 등장하지만, 그 내용들은 별 것이 없다. 제도의 효과로 본다면 종부법은 국가에서 운용할 수 있는 가용 인원을 늘리는 제도이고 종모법은 사익(私益)을 늘리는 제도이다. 조선의 노비제도는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여자가 상전으로 모시던 집안의 노비가 되도록 되어있었다. 종모법은 이런 노비 주인의 이익을 더 늘려주는 법에 불과했다. 종부법을 따르면 첩의 소생이 양인이 되어 국가 신역을 감당하는 인구가 늘어나지만 종모법에 따라 신분을 낮추면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의 숫자만 늘어날 뿐이다. 같은 인원이 느는데 한쪽은 국가에 도움이 되고 다른 쪽은 개인의 이익으로 끝나고 만다.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종모법은 기득권인 양반 사대부 집안의 자기 이익 변호에 불과한 것이고 종부법에 대한 반대 논리 역시 마찬가지다. 종모법은 그냥 기득권 보호법이다.

 

더 웃기고 황당한 것은 이 법이 양반에게는 적용이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종모법에 따르면 양반과 노비 첩과의 사이에 태어난 얼자는 당연히 천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서얼금고법이 있다는 것은 양반의 소생은 어떻든 간에 양반 비슷한 신분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모법은 양반이 아닌 양인에게만 적용된 법이라는 얘기다. 기득권은 자신들을 법 적용의 예외 계층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조선의 모든 양인 남자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徭役)과 일종의 병역의무인 군역(軍役)을 지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이 역(役)에서도 면제되었다. 양반이 요역에 동원된 사실도 없고, 건국 초기에 특권층 자식들이 잠깐 특수 병종에 참가하여 군역 흉내냈던 것 말고는 군역을 담당했다는 이야기도 나온 적이 없다. 그렇다고 양반들이 속전(贖錢)을 내고 역을 면제받았다는 기록도 없다. 뭐든지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은 찬 물에 담근 좆 줄어들듯 줄어들어 어느 틈엔가 슬그머니 빠져버렸다.

 

[엘리자베스 키스,  <평양 동문>, 1925년>

 

조선시대 내내 문제가 된 서얼금고법은 태종 15년인 1415년부터 시행되었다. 서얼금고는 서얼이라는 신분을 허물로 삼아 벼슬에 쓰지 않는 것을 뜻한다. 《태종실록》 태종 15년 6월 25일, ‘육조(六曹)에서 각사가 진언한 내용 중 시행할 만한 사안 33건을 올리다’라는 제목의 기사 속에 그 내용이 들어 있다.

【우부대언(右副代言) 서선(徐選) 등 6인이 진언한 것입니다. ‘종친(宗親)과 각품(各品)의 서얼(庶孽) 자손(子孫)은 현관 직사(顯官職事)에 임명하지 말아서, 적첩(嫡妾)을 분별하소서.’ 하였는데,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한 대로 시행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금고(禁錮) : 죄과(罪科)나 신분(身分)에 허물이 있어 벼슬에 쓰지 않음

▶우부대언(右副代言) :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의 조선 초기 관직명

▶현관직사(顯官職事) : 직사(職事)가 있는 9품(九品) 이상의 문무관직(文武官職)

▶적첩(嫡妾) : 적처(嫡妻)와 첩

 

기사에 따르면 서선(徐選) 등은 이 법을 통하여 본처와 첩을 구별하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본처의 소생과 첩의 소생에 차별을 두라는 말이다. 간략히 결과만을 기록한 기사라 이런 법을 발의한 배경과 결정이 이루어진 논의 과정은 알 수 없지만 이 법으로 얻어지는 국익이 무엇인지는 짐작조차 안 된다. 일설에는 이 법이 이복형제를 죽이고 왕권을 차지한 태종의 뜻에 맞았다는 말이 있다. 또 다른 일설에는 서자 출신인 정도전이 권세 있던 시절, 서선(徐選)이 정도전의 종에게 수모를 당한 보복심에서 이 법을 주도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이 법은 별 논란 없이 채택되어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후 서얼 출신임에도 어느 정도 벼슬을 한 사례가 있음을 보면 이 법의 시행에 느슨한 구석도 있었던 듯하다.

 

서얼금고법은 『경국대전』에서 더욱 구체화되고 명문화되었다. 우선 예전(禮典) 제과조(諸科條)에 재가하거나 실행한 부녀의 아들 및 손자 등은 문과,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이전(吏典)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 문무 2품 이상의 양첩(良妾) 자손은 정3품, 천첩(賤妾) 자손은 정5품에 한(限)하고, 6품 이상의 양첩 자손은 정4품, 천첩 자손은 정6품에 한하며, 7품 이하 관직이 없는 사람까지의 양첩 자손은 정5품, 천첩 자손은 정7품, 양인첩 아들의 천첩 자손은 정8품까지만 오를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아울러 ≪경국대전주해≫에서는 양첩산은 서(庶), 천첩산은 얼(孼)이라고 구분하는 설명과 함께 서얼 자손에 대한 법의 적용은 자자손손이라고 그 해석을 분명히 해놓았다.

▶예전(禮典), 이전(吏典) : 『경국대전』은 조선 중앙관청을 6조(六曹)로 나누어 업무를 관장한 것을 따라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의 순서로 편찬되었는데,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면·사령(辭令) 등에 관한 사항을, 「예전」에는 과거(科擧)와 관리의 의장(儀章) 등에 관한 사항들을 규정하였다.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 : 신분과 직종에 따라 관리로 임용하는 품계(品階)를 제한하여 규정한 조항

▶≪경국대전주해≫ : 『경국대전』 가운데 어려운 조항을 뽑아 풀이한 책. 명종 5년(1550)에 왕명에 희하여 편찬을 시작하여 명종 10년(1555)에 완성하였다.

 

선조 즉위년인 1567년, 서얼 1,600여명이 허통(許通)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허통은 서얼에 대한 금고법을 풀어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이 상소는 무위로 끝났다. 그 후 1583년에 이탕개(尼蕩介)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이(李珥)는 난을 평정할 인력확보책의 하나로, 6진(六鎭) 일대에 근무를 지원하는 서얼에게는 허통하여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이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중에는 전시 재정난 타개의 한 방법으로 쌀을 받고 허통해 주거나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허통해 주는 사례가 생겨나기도 했다. 서얼허통에 관한 요구가 점차 공론화되자 인조, 현종, 숙종 연간에 조정에서 이에 대하여 간혹 논의가 있었으나 별다른 결론은 없었다.

명종 때에도 서얼들아 양첩손에게 문무과의 응시를 허용해달라는 소를 올린 일이 있었고, 숙종 때인 1695년에는 영남 지방 서얼 988명이, 영조 즉위년인 1724년에는 5,000명이 집단 상소한 일이 있었다. 영조는 말년인 1772년 서얼을 청요직에도 등용한다는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내리는 한편, 서얼도 아버지와 형을 아버지와 형이라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선조 때인 1597년부터 영조 11년인 1735년까지의 138년간, 서얼출신 문과 급제자가 42인에 불과한 정도로 간혹 실시된 허통은 겉치레에 불과했다.

역대에 허통을 주장한 인물로는 중종 때의 조광조와 선조 때의 이이, 숙종 때의 송시열, 박세당, 김수항(金壽恒)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모두 일시적 관심에 그쳤다.

 

박지원의 「연암집」에 실린 <의청소통소(擬請䟽通䟽)>에는 서얼차별의 부당함과 차별이 국가에 미치는 폐해에 대하여세히 열거되어 있다. 이처럼 제도의 문제점이 너무나 확연한 데도, 절개와 의리와 굳셈을 자랑하는 그 많은 조선의 역대 관료들 중에 이 제도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제도 개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기득권인 자신들에게 유리한 제도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관직에 오르는 길이다. 그런데 경국대전에 규정된 조선시대의 총 관직의 수는 5,500여과에 불과하다. 이 자리를 놓고 조선의 선비들이 평생 칼을 가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모든 선비들이 선망하는 한양에서 정식으로 녹봉을 받으며 근무하는 문신의 경관정직(京官正職)은 541과에 불과했다. 당연히 그 경쟁은 치열했고 경쟁자가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편이 경쟁하는 입장에서는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이미 관료로 선발된 입장에서는 그 자리가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우월의식을 갖고 스스로를 양반이라는 이름으로 특권화 하였다. 그런 자리에 서얼들을 끼워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서얼금고법 역시 또 다른 기득권 보호법이었던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신분보다는 능력이 더 중시되어야 할 경사대부 임용에는 그렇게 신분에 엄격한 제한을 두었던 조선시대에, 막상 능력보다 신분이 더 중시되는 왕위 계승에 있어서는 전혀 서얼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상식적인 법안이 분명한 이유 없이 입법되지 않고, 입법된 법에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조항들이 숨어있는 경우들이 있다. 왜 그런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명백한 실수로 사람을 죽여도 의사 면허가 취소되지 않고, 검사, 판사들이 아무리 법을 어겨도 제대로 처벌받는 일이 거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다.

 

 

 

 

참고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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