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2 - 요지연도(瑤池宴圖)

從心所欲 2020. 12. 3. 18:00

왕실에서의 병풍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의례용뿐만 아니라 실내 장식과 감상의 용도로도 병풍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정조가 개인적으로 주문하여 제작했던 그림 대부분이 병풍 형식이었던 점은 병풍이 더 이상 사치품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궁중 행사를 기록한 계병이 아닌 것으로 궁중에서 병풍으로 많이 제작되었던 화재(畵材) 중의 하나가 요지연도(瑤池宴圖)였다. 요지연도(瑤池宴圖)는 서왕모(西王母)가 자신의 곤륜산 궁중의 요지(瑤池)에서 주목왕(周穆王)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푸는 장면이다. 서왕모(西王母)는 도교에서 중국 대륙 서쪽의 곤륜산에 살고 있으면서 모든 신선들을 지배하는 최고위직 여신(女神)이다.

 

중국에서는 한때 불로불사의 여신으로 서왕모를 섬기는 민간신앙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적이 있었다. 이 민간신앙에 따르면, 서왕모는 30세 정도의 절세 미녀로 결코 나이를 먹지 않으며, 사방 1천 리에 달하는 넓은 궁전에 산다. 또한, 그곳에는 불로장생하는 신비의 복숭아인 반도(蟠桃)가 있는데, 3000년에 한 번만 열매를 맺는 반도(蟠桃)가 열릴 때는 신선들이 모여 서왕모의 장수를 축하하는 반도회가 열린다는 것이다.

 

주목왕(周穆王)은 기원전 10세기 경 주(周)나라의 제5대 왕으로, 그가 대륙 서쪽에 갔다가 서왕모(西王母)를 만났다는 글이 전해지는 까닭에 요지연도(瑤池宴圖)에 등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주나라의 목왕(穆王)은 곤륜산 부근을 순시하던 중 서왕모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서왕모의 궁전 밑에는 약수(弱水)라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용(龍) 이외에는 건너다가 모두 빠져 죽는다는 곳이다. 그러나 목왕은 여덟 필의 명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힘들게 서왕모의 궁전에 도착했다. 서왕모는 그런 목왕을 위해 궁전 왼쪽의 요지(瑤池)라는 호수 옆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목왕은 너무나 즐거워 그만 인간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렸는데, 천계의 하루는 인간계의 1년에 해당한다고 한다. 목왕이 돌아갈 때 서왕모는 '불로장생의 비법을 알고 싶으면 다시 한 번 이곳을 방문하라'는 의미가 담긴 시를 전해주었지만, 목왕은 두 번 다시 천계를 방문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불로장생의 여신과 이상(理想)의 치세(治世) 국가인 주(周)나라 왕이 함께 연회를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상서(祥瑞)로운 일인데, 요지연도에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오는 수많은 도교의 신선들과 부처까지도 함께 그려진다. 따라서 요지연도(瑤池宴圖)는 장수와 기복(祈福)을 담은 당시의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이었던 것이다.

 

전하는 요지연도(瑤池宴圖)의 그림 구성과 배치는 대개가 비슷하다. 오른쪽은 서왕모가 주목왕을 위하여 베푸는 연회장이 그려지고 왼쪽으로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물을 건너거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석가모니, 노자(老子), 보살과 수로인(壽老人), 팔선(八仙)을 비롯한 선계(仙界)의 수많은 신선들이 그려진다.

 

[전(傳) 윤엄(尹儼) <요지연도(瑤池宴圖)> 부분 1, 견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ㅣ 윤엄은 선조 때의 문신이자 서화가로 필법에 조예가 뛰어나고 감신안도 높았다고 한다.]

 

[전(傳) 윤엄(尹儼) <요지연도> 부분 2]

 

[전(傳) 윤엄(尹儼) <요지연도> 부분 3]

 

[전(傳) 윤엄(尹儼) <요지연도> 부분 4]

 

위 <요지연도>에서 흥미로운 점은 서왕모의 뒤에 보이는 가리개이다.

 

[전(傳) 윤엄(尹儼) <요지연도(瑤池宴圖)> 부분 1 확대]

 

이런 가리개가 병풍의 초기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여러 폭으로 구성된 병풍과는 달리 한 폭으로 되어있다. 그림으로 치장된 나무 판은 양 옆의 지지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을 삽병(揷屛)이라고 한다. ‘꽂을 삽(揷)’이라는 한자를 쓰는 이유는 그림 나무 판을 지지해주는 양 옆 지지대가 나무 판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나무 판을 꽂고 뺄 수 있도록 제작된 때문이다.

 

현재 병풍 형식으로 전하는 요지연도는 대략 20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일부 작품은 18세기 작품으로 추정되지만 19세기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필자미상 요지연도(瑤池宴圖)>, 지본채색, 각폭 145 x 54cm, 국립중앙박물관]

 

[<요지연도 8폭 병풍(瑤池宴圖 八幅 屛風)>, 견본채색, 전체크기 180.0 x 411.2cm, 각 폭 그림부분 115.5 x 43.0cm,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요지연도>는 계병(稧屛)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오른쪽에 서문(序文)이 있고 맨 왼쪽에는 좌목(座目)이 들어있다. 이러한 양식은 18세기에 제작되던 양식으로 위의 <요지연도 8폭 병풍>보다는 제작 시기가 앞선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병풍을 보면 그림을 장황(粧潢)한 방식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필자미상 요지연도>는 2폭부터 7폭까지 한 그림처럼 장황된 것에 비하여, <요지연도 8폭 병풍>은 8폭 전체가 한 그림인 것을 각 폭마다 별도의 그림처럼 테두리를 두어 장황하였다.

▶장황(粧潢) : 표구(表具)와 같은 의미이나, 표구(表具)는 왜국에서 건너온 말이다. 원래 우리나라는 장황(粧潢)이라고 했다.

 

이러한 차이가 조선 전통방식과 왜장병풍의 영향을 받은 방식의 차이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조선 후기로 가면 병풍 제작에 왜장병풍(倭裝屛風 또는 倭粧屛風) 방식이라는 말이 간혹 등장한다. 그러나 ‘왜장병풍 식(式)’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인지는 역시 불분명하다. 전폭병풍(全幅屛風)이라는 설명이 있는가 하면, 연폭 병풍을 가리키는 용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천무천왕(天武天皇) 주조 원년(朱鳥 元年)조에는 신라에서 일본의 천왕에게 보낸 선물의 품목에 병풍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때는 서기 686년으로 신라 31대 왕인 신문왕(神文王) 6년에 해당한다. 이것이 우리가 왜국에 병풍을 전해줬다는 증거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왜국도 병풍을 제작해왔다. 조선에서는 왜국에 병풍을 예물로 보낸 일이 적지 않고 왜국에서 조선에 보낸 병풍은 셀 수 없이 많다. 통신사들이 왜국에 가서 받는 선물 목록에는 병풍이 꼭 들어있었고, 왜국 막부에서 조선 왕에게 보내는 예물에도 거의 빠짐없이 병풍이 들어있었다. 다만 왜국의 병풍은 두 개가 한 세트를 이룬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모르는 통신사들은 선물로 받은 왜국 병풍을 자신은 갖지 않고 일행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하나씩 따로따로 떼어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왜국 병풍의 특색은 여러 가지로 논의되는데, 자수병풍이 왜국병풍이라는 설도 있고 금이나 금박으로 장식한 화려한 병풍을 가리키거나 병풍 전체를 하나의 그림처럼 사방 테두리를 두고 장황하는 병풍을 말하기도 한다.

 

[<유교수차도병풍(柳橋水車圖屛風)>, 종이, 156.7 x 352.0cm, 국립중앙박물관]

 

[<야마모토소켄 필 사계화조도병풍(山本素軒筆四季花鳥圖 屛風)>, 종이, 127.1 x 286.8cm, 국립중앙박물관. ㅣ 야마모토소켄(山本素軒, 1600 ~ 1690년대 말)]

 

[<야마모토소켄 필 사계화조도병풍(山本素軒筆四季花鳥圖 屛風)>, 종이, 127.1 x 286.8cm, 국립중앙박물관]

 

위의 <유교수차도병풍>은 1573년 ~ 1615년 사이의 작품이고 <사계화조도병풍>은 17세기 중반 이후의 작품이다.

공통적인 것은 병풍 전체를 한 그림으로 꾸몄다는 것이고, 폭에 따라 그림의 끊어짐이 없이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병풍 전체를 그림틀처럼 화려한 무늬로 테를 둘러놓은 것도 조선의 병풍과 차이나는 점이다. ‘왜장병풍 식(式)’이라고 하는 것은 때에 따라 이런 특징 중의 하나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그러한 추측대로라면 조선의 전통적인 병풍은 한 그림이 아닌 여러 그림으로 제작되었거나, 아니면 각 폭의 그림이 이어지지 않고 <요지연도 8폭 병풍>처럼 제작되었다는 논리의 비약에 이르게 된다.

어느 때부터인가 일본 병풍의 제작방식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확인은 되지 않는다.

 

[<필자미상 요지연도(瑤池宴圖)> 1, 2폭]

 

[<필자미상 요지연도(瑤池宴圖)> 3, 4폭]

 

[<필자미상 요지연도(瑤池宴圖)> 5, 6폭]

 

[<필자미상 요지연도(瑤池宴圖)> 7, 8폭]

 

좌목으로 보면 이 병풍은 선전관(宣傳官)들의 계병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맨 앞에 나오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격(李格)의 생몰년이 1682년 ~ 1759년이라, 이 병풍은 1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가선대부는 종이품(從二品)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한국미술정보개발원, 조선후기 병풍 연구(김수진, 2017, 서울대학교대학원), 여신(이만옥 역, 2002, 들녘), 조선후기 요지연도의 현황과 유형(박본수, 2016.12. 한국민화 제7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