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두 거유(巨儒)인 퇴계 이황(李滉, 1501 ~ 1570)과 율곡 이이(李珥, 1536 ~ 1584 )는 이기심성론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황(李滉)의 학설을 따르는 영남지방의 영남학파와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 충청도, 호남지방의 기호학파라는 학맥이 생겼다.
이이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선 말기까지 정권을 장악했던 서인(西人)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으며 추종자들로부터 ‘동방의 대현(大賢)’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 어머니까지도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우상화되는 영광을 누렸다.
반면 당파적으로는 주로 동인들에 의하여 추종되었던 이황은 조선 안에서보다는 밖에서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없다.’거나 '고금절무(古今篩無)의 진유(眞儒)'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성인을 가리키는 ‘이부자(李夫子)’라는 호칭을 들었다.
이황은 선조가 17세의 비교적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성군(聖君)이 되어 온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국충정에서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성학(聖學)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라는 뜻에서의 유학을 가리키는 것이다. 흔히 <성학십도(聖學十圖)>로 불리는 이 상소문에는 도학적 학문정신의 핵심을 간결하게 집약하여 ‘성학’의 체계를 설명한 10개의 도상(圖象)과 도설(圖說)이 들어있다.
이황을 추종하는 영남학파의 유학자들은 이 도상을 병풍으로 만들어 거처에 배설하고 자신들의 학통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대하여 이황은 제1도에서 제5도까지는 “천도(天道)에 기본을 둔 것으로, 그 공과(功課)는 인륜(人倫)을 밝히고 덕업(德業)을 이룩하도록 노력하는 데” 있고, 제6도에서 제10도까지는 “심성(心性)에 근원을 둔 것으로, 그 요령은 일상생활에서 힘써야 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높이는 데 있는 것”이라고 그 대의를 밝혔다.
따라서 앞의 5개 도상은 천도에 근원해 성학을 설명한 것이고, 나머지 5개 도상은 심성에 근원해 성학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10개의 도상들 가운데 7개는 송(宋)나라의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주희(朱熹)와 원(元)나라의 정임은(程林隱), 그리고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학자인 권근(權近)의 것을 따왔고, 제3, 5, 10도 3개의 도상은 이황 자신이 작성한 것이다.
<성학십도>에 동원된 도설과 도상 전체가 비록 이황 고유의 학문적 치적은 아니지만, 이황이 유학사상의 정수들을 집약하여 독창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각각의 도설들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큰 것이다.
이황의 <성학십도>는 시간이 지나며 도형에 미적 감각을 추가하여 장식적 면모를 갖춘 병풍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참고 및 인용 : 한국민속예술사전(국립민속박물관), 국어국문학자료사전(1994,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옛 병풍'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풍 27 - 구운몽도(九雲夢圖) (0) | 2020.12.30 |
---|---|
병풍 26 -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 (0) | 2020.12.29 |
병풍 24 -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0) | 2020.12.27 |
병풍 23 - 무이구곡도 (0) | 2020.12.26 |
병풍 22 - 평생도 2 (0) | 2020.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