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릉신영도>는 황해도 안릉(安陵)에 새로 부임하는 관리의 행차를 긴 두루마리에 그린 행렬도이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의궤도에 보이는 반차도(班次圖) 형태로 그려졌다. 그림에 달린 글에 의하면 김홍도에게 그리게 했다고 적혀있지만, 그림의 세부 필치에 차이가 있음을 근거로 후세에서는 여러 화원 화가들이 함께 그렸을 가능성을 추정하고 있다. 부임 수령의 가마 뒤를 따라 수행인원인 배행(陪行), 죄인을 다스리는 일을 맡았던 군졸인 군뢰(軍牢), 수령의 심부름과 명령전달을 하는 통인(通引)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
● 부임(赴任) 제6조 이사(莅事) 4
이날 영을 내려서 백성들과 몇 가지 일로써 약속하고 관아 바깥 문설주에 특별히 북 하나를 걸어 둔다.
(是日發令 以數件事 與民約束 遂於外門之楔 特懸一鼓)
▶이사(莅事) : 수령이 부임하여 실무를 맡아보는 일 |
행현령(行縣令)이 알리고자 하는 바,
관가와 백성 사이에 마땅히 약속이 있어야 하니 다음에 기록하는 조항을 일일이 깨우치고 살펴서 이에 의하여 준행하되 어기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만약,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고 엄하게 다스릴 것이니 각별히 주의하라.
■ 다음에 기록하는 조항
1. 백성들의 소장(訴狀)은 일일이 직접 가져와서 바치지 않아도 된다. 그 가운데 긴급한 것은 본인이 와서 바치고 긴급하지 않은 것은 서류로 갖추어 풍헌ㆍ약정 등에게 주어서 그들이 고을에 들어오는 날 함께 바쳐 관의 판결을 받게 하거나, 그 마을 사람 가운데 소장을 가지고 고을로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편에 부치도록 하라. 한 사람이 10명의 소장을 바쳐도 관가에서는 구애하지 않는다.
1. 연명(聯名)으로 된 등소(等訴) - 여러 사람이 함께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 의 소장은 그것을 의논할 때는 10명이 함께 서명하였더라도 소장을 가지고 고을에 들어올 때는 일의 내용을 잘 아는 사람 하나를 특별히 골라서 그 사람이 혼자서 가져오게 하라. 혹 중요한 일인 경우에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함께 고을에 들어오되,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세 사람 이외에는 더 들어오지 말도록 하라. 고을에 드나들면서 술값이나 밥값을 함부로 써서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끼쳐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약속한 후에도 만약 많은 사람이 고을에 따라 들어와서 주인집에 숨어 있고, 관아에 들어오는 사람의 수만 규정을 지킨 체하며, 또 술값이나 음식값을 지나치게 쓰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니, 각기 조심하라. - 영을 내린 뒤에도 혹시 방리(坊里)에서 큰 사건으로 호소해 오면, 가만히 사람을 방저(坊邸)에 보내어 정탐하고, 만일 그곳에 남아서 머물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다가 죄를 준다. -
▶주인집 : 조선시대 현(縣) 밑의 각 방(坊)에서 현아(縣衙)와의 연락을 위하여 읍내에 관계자로 정해둔 사람. 면주인(面主人), 방주인(坊主人), 방저(坊邸)라고도 한다. 방(坊)은 동네, 고을의 뜻. ▶방저(坊邸) : 방주인(坊主人). 주ㆍ부ㆍ군ㆍ현과 방(坊) 사이를 왕래하던 심부름꾼. |
1. 물건이나 문권(文券)을 잃었거나, 사람이나 소와 말이 없어져서 입지(立旨)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가 사는 마을 상호(上戶)의 문적(文跡)이나 혹은 풍헌(風憲)의 보장(報狀)을 첨부해 와서 바치도록 하라.
▶입지(立旨) : 토지, 가옥 등의 소유권 혹은 연고권을 인정하는 관부의 증명. ▶상호(上戶) : 조선시대 태조 때에 제정한 호적법에 의하여 각 가구를 식구의 수, 전결의 수, 호주의 신분에 따라 상호(上戶), 중호(中戶), 하호(下戶), 하하호(下下戶)의 4등급으로 나누었다. 상호는 일반적으로 부유층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풍헌(風憲) : 조선 시대 면(面)이나 이(里)에서 풍기(風氣)를 바로잡고, 관리의 정사청탁(正邪淸濁)을 감찰하던 직임(職任). ▶보장(報狀) : 어떤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보고하는 공문. 보고서. |
1. 소장을 가지고 관아에 오는 사람은, 형리(刑吏)를 만나거나 문례(門隷) - 곧 사령(使令) - 에게 묻지 말고 곧바로 관아의 바깥문으로 해서 안문으로 들어와 직접 수령 앞에 바치면 형리나 문례가 뒤따라와서, 이를 가로막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가로막는 일이 있으면 관아의 바깥 문설주에 특별히 북을 하나 걸어 놓고 새벽이나 저녁, 혹은 언제라도 와서 이 북을 치면 관에서는 그 사람을 불러서 사정을 물을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라.
1. 소장의 제사(題詞)에 양편이 대질하게 한 것은, 만약 그들이 스스로 사화(私和)하면 아무 일도 없거니와, 만약 사화하지 않고, 또 피고인이 판결하는 때에 나오지 않아서 원고인으로부터 거역하였다는 호소가 있으면 관에서는 부득이 저졸(邸卒) - 면주인(面主人) - 을 보내지 않을 수 없고, 심한 경우는 관아의 문례(門隷)를 보내거나 혹은 군교(軍校)를 보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마을이 매우 소란하게 될 것이다. 무릇 거역하고 나오지 않는 사람은 마땅히 엄하게 징계하여 마을을 조용하게 할 것이다. 소송의 내용은 비록 피고측이 옳더라도 죄는 죄대로 다스릴 것이니, 이를 잘 알라. 만약 어떤 간민(奸民)이 처음부터 나오라는 제사를 아예 보이지 않고 거역한 것이라 무고하였다가 양편이 대질하는 날에 농간질을 한 것이 드러나면 엄하게 처리함이 갑절이 될 것이니, 이를 잘 알라.
1. 관에서 전하는 명령이 시급한 일은 저졸(邸卒)을 보낼 것이지만, 급하지 않은 것은 혹 풍헌이나 약정(約正)의 편에 부치거나 송사(訟事)로 고을에 온 사람 편에 부쳐서 마을이 조용하게 하겠거니와, 전달하는 명령의 일은 반드시 기한에 맞추어서 거행해야만 저졸이나 차사(差使)를 보내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무릇 관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지체하여 마을을 소란하게 하는 사람은 용서 없이 죄줄 것이다.
▶약정(約正) : 조선시대 향약조직의 임원으로, 풍헌(風憲) 다음을 뜻하는 부헌(副憲)이라고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행정계통의 풍헌에 대하여 교화를 맡는 집강(執綱)을 가리키기도 했다. 지방자치의 실질적 실무자였다. |
《치현결(治縣訣)》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입지(立旨)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문권(文券)을 잃어버리고 입지를 신청하는 사람은, 그것이 불타 버렸다고도 하고 도적이 가져갔다고도 하는데, 불에 타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 사람의 보증서를 갖추게 하고, 도적이 가져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향갑(鄕甲) - 이른바 면임(面任)이다 - 의 보증서를 증빙으로 해야 한다. 노비가 도망하였을 경우는 반드시 호적을 상고하되 그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으면 준거(準據)로 할 수 없다. 관(棺)을 만들 재목을 운반하는 것이 금물(禁物)일 경우에 그 근거가 확실하지 않으면 허가해서는 안 된다. 관명(冠命)으로 그 아명(兒名)을 대신하고자 하는 사람은 군적(軍籍)을 농간하려는 사람이며, 정군(正軍)을 보인(保人)으로 강등하고자 청하는 사람은 번차(番次)를 피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요즈음 수령 된 사람들은 백성들의 소장 끝에 ‘입지(立旨)’ 두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허실을 따지지 않고 일체를 준허(準許)하니 소홀함이 심하다.”
▶면임(面任) : 각 면(面) 즉 방(坊)의 호적(戶籍) 기타의 공공사무를 맡아보던 사람. ▶정군(正軍) : 조선 시대의 병역 의무를 가진 양인(良人) 장정으로 군역(軍役)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정병(正兵)이라고도 한다. ▶보인(保人) : 군역에 징발된 정군을 경제적으로 보조하기 위한 군보(軍保). 보미(保米)나 보포(保布)를 상납할 의무를 진다. 조선 시대에 정병(正兵) 한 사람에 보인(保人), 또는 봉족(奉足)이라 불리는 두 사람을 지정하여 정병의 농작을 대신하게 하였다. 후기에는 양병(養兵)의 비용을 쓰기 위하여 조정에서 역(役)을 면해 주고 그 대가로 군포(軍布) 등을 바치게 하였다. ▶번차(番次) : 정군(正軍)들이 교대로 현역복무를 하는 차례. 복무를 위하여 군영(軍營)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번(上番)이라 하고 복무교대 하여 비번(非番)이 되는 것을 하번(下番)이라 한다. |
나의 생각으로는, 큰 고을의 소장은 구름같이 모이고 산같이 쌓이는데 이것을 일일이 상세히 조사하려 하면 도리어 얽매여서 아전과 백성이 의심 많은 사람으로 지목할 것이니 역시 좋지 못하다. 막힘없이 처리하는 중에 때로 한 장을 집어내어 그 간사하고 거짓됨을 찾아낸다면 이것이 어진 수령일 것이다.
「운곡정요(雲谷政要)」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호소하러 오는 백성이 부모의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친숙하고 사모하며 하정(下情)이 통달하여 막힘이 없어야 백성의 부모라 할 수 있다. 바야흐로 밥을 먹거나 목욕하는 때라도 문지기가 이를 금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문지기가 이를 어기면 곤장 서너 대를 호되게 쳐야 할 것이다.” - 마침 뒷간에 가 있는 때라면 부득이 잠깐 기다리게 한다. -
▶「운곡정요(雲谷政要)」: 조선시대 문신 운곡(雲谷) 이광좌(李光佐, 1674~1740)가 지은 목민서(牧民書). 박사한(朴師漢)이란 인물이 봉화수령(奉化守令)으로 갈 때 지어준 것이다. ▶하정(下情) : 아랫사람들의 사정(事情) |
포증(包拯)이 개봉지부(開封知府)로 있을 때였다. 옛날 제도에는 무릇 소송하는 사람이 곧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부리(府吏)가 문 앞에 앉아서 소장을 거두었는데 이것을 첩사(牒司)라 하였다. 포증이 관아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람들이 곧바로 뜰아래까지 와서 스스로 옳고 그름을 말하게 하였더니 아전과 백성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포증(包拯) : 중국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 포청천(包淸天, 999 ~ 1062) |
김익경(金益炅)이 여러 번 수령이 되었는데 대체를 지킬 뿐 까다롭고 자잘한 일은 일삼지 않았다. 관아의 바깥문을 활짝 열어놓고 억울함이 있는 백성은 모두 뜰아래에 와서 직접 호소하게 하였더니, 그 사정을 모두 털어놓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구준(寇準)이 파동지현(巴東知縣)으로 있을 때 매양 기회(期會, 기일을 정해 모이는 일)와 부역(賦役)이 있을 적마다 공문을 내지 않고 오직 향리(鄕里)와 성명만 관아의 문에 게시하였으나, 백성들이 기일보다 늦게 오는 사람이 없었다.
충세형(种世衡)이 무공지현(武功知縣)으로 있을 때 사람들이 그의 위엄과 신망에 복종하였다. 혹 사람을 부르는 일이 있어도 사람을 시켜서 문서를 가지고 마을에 들어가게 하지 않고 다만 종이쪽지에 써서 관아의 문에 방을 붙여도 모두 기일에 맞추어 왔다.
진서산(眞西山)이 천주 지사(泉州知事)로 있을 때 소송을 청리(聽理)함에 있어서 군의 군졸을 보내지 않고 그 성명만을 게시하여도 백성들이 스스로 고을에 와서 소송 청리에 응하였다.
장횡거(張橫渠)가 운암현령(雲巖縣令)이 되었을 때, 교시(敎示)하는 포고를 할 때마다 그 문서가 백성들에게 제대로 도달하지 못함을 근심하여, 향장(鄕長)들을 관아의 뜰에 불러서 거듭 깨우쳐 주고 마을로 돌아가서 알리게 하고, 간혹 백성들이 일이 있어 관아에 오거나 또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그때 아무에게 명하여 아무 일을 말한 것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묻고, 들었다 하면 그만이지만 못 들었다 하면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을 죄주었다. 그러므로 한마디 영이 내리면 비록 우매한 백성이나 어린아이까지도 모두 미리 알고 있었다.
▶김익경(金益炅)...장횡거(張橫渠) : 김익경은 조선의 문신이고 그 외 예시된 인물들은 모두 중국 송(宋)나라 때의 관리들이다. |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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