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의 기생 19 - 노류장화

從心所欲 2021. 7. 27. 18:13

박취문과 그 일행의 엽색(獵色)행각은 여행 내내 계속되었다.

 

[​1월 21일]
윤신길이 이른 아침에 방문했다. 기천(岐川) 정자(正字)의 아들 한희주(韓希注)가 들렸다. 식후에 천총(千摠) 이집을 만났다. 집주인이 나를 위해 성대하게 음식을 장만하여 주니 여러 동료들을 청하여 함께 먹었다. 매우 감사하였다. 저녁에 기생 4, 5명을 불러보았다.

[1월 23일]
병영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방(同榜) 급제자 김찬(金贊)이 술을 가져와서 마셨다. 정오에 홀로 향교에 갔는데, 훈장 문일장(文日章)과 유사(有司) 이정겸(李廷謙), 원기(元琦)가 명륜당 위로 맞이하여 술상을 차려주어서 크게 마시고 돌아왔다.
(중략)
​날이 어두워질 때 사향소(四鄕所), 향교의 사임(四任) 한희주(韓希注), 주목(朱楘) 등이 술과 안주를 성대히 준비해서 대접해 주어 이 때문에 머물러 잤다.
​향교의 계집종 옥환(玉環)을 가까이 하고자 하였는데 주인 오장손(吾莊孫)이 큰소리로 금하게 하였다. 주인의 말이 옳기는 하나 그녀의 자색이 심히 아름다워 몸에 큰 병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장선달이 몰래 데리고 가서 동침하였는데 다음날 아침에 주인이 크게 책망하며 말하길,
“그녀가 비록 자색이 아름답긴 하나 당창(唐瘡)이 있는 사람이다. 내말을 믿지 않았으니 가련하고도 가련하도다.”
​라면서 한탄해 마지않았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어찌 할 수 가 없었다.

[1월 24일]
숙회(叔晦)의 생일이라 머물렀다. 먼저 온 영장(領將)인 현풍 사람 곽삼립(郭三立)이 영(營)에서 방수하다가 관직에 임명되어 가는 길에 들렸기에 바로 찾아 만나 보았다. 김찬도 찾아 왔다. 전 날 잡았던 꿩을 삶아 간략하게 술과 안주를 준비했고 김찬과 곽삼립도 역시 술을 가지고 와서 기생을 불러 밤늦도록 술을 마신 후 각자 인사하고 헤어졌다. ​밤에 공망(公望)은 기생 귀비(貴妃)와 같이 잤는데 기생 중에 제일 늙었다.
▶공망(公望) : 이석로

[1월 26일]
공망(公望)의 종 간생(間生)과 용회(用晦)의 종 봉상(奉上)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침에 눈이 잠시 내려 아침을 먹은 후 눈길을 무릅쓰고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35리를 가서 홍원(洪原) 경계의 함원참역(咸原帖驛)에서 말을 먹이고 25리를 가서 홍원현(洪原縣)에서 머물렀다. 이날 저녁에 주탕 조생(趙生) 등 4, 5명을 불러 보았다. 두 박 선달과 장 선달이 뒤쳐졌다.

[2월 5일]
30리를 가서 산성 옆에 있는 아전 최득길(崔得吉)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그 주인 또한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 집의 계집종 대여섯이 다 미색이었다. 30리를 가서 길주 북문 밖 관노 최귀생(崔貴生)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저녁에 따뜻한 술을 들여보내 주었고 그 딸 예제(禮悌)와 더불어 거문고를 타고 놀다가 품고 잤는데 명기였다. 숙회(叔晦)는 그 주인집의 계집종 회덕(灰德)을 품고 잤는데 아주 통쾌하였다.

[2월 6일]
35리를 가서 명천(明川) 땅 고참역(古站驛) 역리 박인(朴潾)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는데 그는 동성(同姓)이라 하며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35리를 가서 명천 북문 밖에서 머물렀는데 장 선달의 종이 두역(痘疫)을 앓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장 선달이 뒤쳐졌다. 저녁에 공망(公望)과 언양 이(李)가 여색에 크게 무너지니 우스웠다. 숙회(叔晦)는 늙은 주탕 태향(苔香)을 품고 잤다.
나는 우연히 옥매향(玉梅香)과 같이 잤다.
▶두역(痘疫) : 천연두

[2월 11일]
아침에 경성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병사(兵使)의 사위 김익휘(金益輝)를 만났다. 이날 밤 기생 옥순(玉諄)을 품었다.

[2월 13일]
아침밥을 먹고 45리를 가서 부령(富寧)땅 청암창(靑岩倉) 가까이에 있는 별감 정진성(鄭振聖)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의 계집종 중 미색이 가장 뛰어난 율덕(栗德)을 품고 잤다.

[2월 14일]
아침밥을 먹고 30리를 가서 형제 들판[兄弟野地]이라는 곳에서 말을 먹였다. 20리를 가서 부령 성내 종 사림(士林)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 딸 향춘(香春)을 품고 잤다. 공망(公望)은 옥선(玉仙)과 같이 자고 용회(用晦)는 화선(花仙)과, 이득영은 늙은 기생 향개(香介)와 같이 잤다.

[2월 17일]
45리를 가 종성(鍾城)땅 행영(行營) 동문(東門) 안에서 숙박하였다. 행영에서 부방하고 있는 출신 군관인 한양 사람 이준성(李俊成), 문익창(文益昌), 충청도 이산(泥山)의 안덕함(安德涵), 백기성(白起成), 이윤진(李允蓁)등이 찾아왔고 회령 기생 월매(月梅)가 내가 울산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전의 일들을 상세히 물었다. 그녀의 어머니 배종(裵從)은 이미 죽었다고 하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내 처소에서 함께 묵었다.

 

회령 기생 월매(月梅)의 어머니라는 배종(裵從)은 박취문의 아버지 박계숙이 부방할 당시에 사귀었단 기생이다. 박계숙은 부방 당시 회령 인근의 보을하진(甫乙下鎭)이라는 곳에서 근무를 했다. 그의 일기에 기록된 배종과의 행적이다.

 

[여지도 속의 보을하진(甫乙下鎭). 회령에서 약 25리. 회령에서 병영까지는 5리]

 

[1606년 3월 2일]
별장(別將)이 회령 기생 배종(裵從)의 편지를 받아 보내주었다.

[4월 14일]
첨사를 모시고 술과 안주를 가지고 회령으로 갔다. 고령첨사도 함께 모여 연회를 열고 활쏘기를 했다. 병마우후(兵馬虞侯) 우치적(禹治績)이 또한 뒤이어 도착하였다. 나는 50발을 명중시켰다. 우후가 말하길
“우리들은 모두 50발을 명중시키지 못했는데 네가 어떤 자 이기에 감히 50발을 명중시키느냐? 그 벌이 없을 수 없다”
​고 하였다. 기생으로 하여금 뜰아래로 붙잡아 내려서 장차 곤장을 때리려고 할 때 곤장을 든 사람이 배종이었다. 볼기를 살짝 때리고 다시 붙잡아 대청 위로 올려서 큰 잔으로 술 석 잔을 마시게 했다.

[7월 18일]
밤에 회령에 도착하니 이미 성문이 닫혀 있었다. 말은 경기 출신인 고응선(高應善)의 집에 맡겨두고 걸어서 기생 배종의 집에 갔다. 마침 군아(郡衙)에 입번(入番)하는 날이어서 그 어미를 보내어 불러오게 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니 그 기쁨을 가히 알 것이다. 새벽에 나와서 밝기 전에 돌아왔다.

[7월 26일]
회령부사가 기생들을 거느리고 와서 풍악을 잡히고 보을하진(甫乙下鎭) 첨사를 위한 전별연을 열어 해질녘이 되어 파하고 돌아갔다.
​돌아가는 편에 상으로 받은 돗자리와 땅에 까는 깔개는 삼상월(三湘月)에게 보내주었다. 삼상월이 바로 기생 배종이다. 나중에 종에게 시켜 큰 항아리 2개도 보내주었다.

[11월 20일]
아침에 삼상월(三湘月)집의 사내종이 음식을 가득 실어서 왔다. 여러 벗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꿩 12마리와 좁쌀 1석, 콩 1석을 실어 삼상월에게 보내주었다.

[11월 24일]
오후에 우리의 방환관문이 회령부로부터 전송되어 왔다. 초료도 동봉되어 도착했다. 기뻐서 주체 할 수 없었다. 밤이 된 후에 삼상월과 그 어미가 함께 왔다. 밤이 새도록 잘 수가 없었다.
▶방환관문(放還關文) : 부방(赴防)하는 기간이 완료되어 귀향하라는 명령서
▶초료(草料) : 관원이 공무(公務)로 지방에 여행할 때에 지나는 길의 각 역참(驛站)에 거마(車馬), 숙식 따위를 공급할 것을 명령(命令)한 급여(給與) 명령서.

[11월 25일]
아침에 여장을 꾸리고 전별의 술잔을 받았다. 첨사는 오늘까지만 머물기를 간절히 권했으나 한시도 지체하여 머무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소매를 떨치며 하직하였다. 삼상월 모녀와 함께 작별인사를 하고 오후에 출발하였다.

 

박계숙의 일기에서 배종과 처음 연을 맺게 된 계기는 찾지 못했지만, 그 후의 기록을 통하여 부방하는 기간 동안 두 사람이 가까운 관계였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박계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끝까지 남아 전송한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40년 전 일이다. 월매(月梅)가 어머니 배종으로부터 박계숙의 이름을 귀에 박히게 듣지 않았다면 굳이 월매가 박계숙의 아들이라는 소리에 박취문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월매가 찾아온 다음날인 2월 18일, 부방을 위해 올라온 박취문 일행의 근무지가 정해졌는데, 박취문은 회령에서 부방하는 것으로 배치되었다. 그래서 박취문은 그 후로 월매와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박취문이 월매와 동침했는지까지는 분명하지 않다.

[2월 19일]
눈이 내려서 머물렀다. 공망(公望)과 숙회(叔晦)가 늙은 기생[말기(末妓)]인 회덕과 동침하였다.

[2월 22일]
동료들과 헤어졌다. 떠나고 남는 사람의 설움과 회포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악수하고 헤어지는데 눈물이 무수히 흘렀다. 회령 부사가 돌아왔다. 관노 춘방(春方)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명천기생 옥매향이 편지와 함께 한 소쿠리의 반찬, 세포 수건 등을 보내주었다.

[2월 27일]
방직기(房直妓)를 의향(義香)으로 바꾸었다. 부사를 모시고 활을 쏘고 나서 술을 많이 마셨다.
▶방직기(房直妓) : 집을 떠나 홀로 변방 지역에 근무하는 군관에게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배정해 주던 관노비. 기생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부북일기에 보이는 방직기들은 가무의 소양은 없고 군관의 생활을 보필하는 것이 주업이었다.

[2월 29일]
부령 기생 향춘(香春)이 편지와 함께 황대구 2마리와 백대구 2마리를 보내주었다.

[3월 14일]
아침에 의향의 어미가 술과 안주 및 땔감 한 수레, 볏짚 한 수레를 가지고 촌가에서 왔다. 경성에서 부방하고 있는 출신 군관 나두천(羅斗天)이 찾아왔다. 나주 사람으로 함흥에서 부방하고 있는 출신 군관 이견(李汧)이 함흥에서 와서 만나고 바로 병사가 순행하고 있는 곳으로 갔는데 신문(新門) 밖에 사는 동방(同榜) 급제자이다. 김량기(金亮起)라는 사람도 또한 찾아왔고 부사와 함께 월매와 쌍륙(雙六) 놀이를 하였는데 크게 졌다.

[3월 15일]
아침에 의향의 어미가 돌아갔다. 이날 병사가 북쪽지방을 순찰하는 길에 회령부에 도착하여 갑옷을 갖추어 입고 10리 앞에 마중 나갔다 왔다. 바람이 크게 불었다. 월매, 설매 등과 함께 병사와 종일 쌍륙 놀이를 하였는데 이기지 못했다. 오후에는 월매가 가야금을 타고 연합(燕合)에게 노래를 부르라 하였고 나에게도 노래를 시켰는데 노래는 내가 크게 이겼다.

[3월 19일]
병사의 첩이 경성으로 갔고 행영 기생 막개(末叱介), 월순(月順), 민례(敏禮)등이 와서 내 처소에서 머물렀다.

[3월 20일]
행영 기생들이 돌아갈 때 월매와 설매에게 종과 말을 보내서 병사에게서 상으로 받은 물건들을 받아와서 함께 나누자고 하고 첩지를 써 주어 보냈다.

[3월 27일]
우후, 부사, 첨사 세 사람과 회령부 판관이 함께 경성을 향해 출발하였다. 숙회(叔晦)에게 가서 저녁을 먹고 함께 잤다. 행영 기생 계선(桂仙)과 승옥(承玉)이 찾아왔다. 숙회(叔晦)와 함께 고향 일을 이야기 하다가 나도 모르게 마음이 심란하여 눈물을 끝없이 흘렸다. 승옥(勝玉) 등이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하며 위로해 주어 그쳤다.

[4월 6일]
아침 전에 부사를 모시고 활 6순을 쏘다가 몸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아 들어가서는 앓아누웠다. 판관이 경성(鏡城)에서 돌아왔는데 옥부선(玉富仙)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옥부선은 경성의 명기이다.

[4월 13일]
부사를 모시고 일찍 운두성(雲頭城)에 올라 유람하였다. 또 보을하진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밤중에 돌아왔다. 운두성에 올랐을 때 출신 군관 및 기생 들이 각기 남북으로 나뉘어 하늘 높이 솟은 나무사이로 말을 타고 달렸다. 그러나 우리는 말을 달리지는 못했다. 기생들과 토착 군관들은 소리를 지르며 달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내 말에는 설매가 탔었는데 경혈(經血)로 말안장이 더러워졌다. 우스웠다.
▶경혈(經血) : 생리

[4월 14일]
회령부에 사는 양반 강덕길(姜德吉), 덕목(德木) 형제가 만나보기를 청하여 저녁밥을 먹고 술을 많이 마셨다. 월매가 술을 가지고 왔고 의향이 옷을 빨고 재단하기 위해 종 봉남을 데리고 그 어미 집으로 갔다.

[4월 16일]
바람이 크게 불었다. 저녁에 판관이 술과 기생을 데리고 찾아와서 숙회(叔晦)도 불러 많이 마시고 밤이 되어 돌아갔다.

[4월 18일]
활 10순을 쏘았고 부사가 술을 내려주었다. 저녁에 부사가 사슴다리 1개, 대구 5마리를 보내주어 바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부사가 또 군관청에 사슴다리 1개, 대구 8마리, 소주 5선을 내려주었다. 판관은 군관청에 소주 6선을 보내주었고, 내 처소에도 사슴고기 및 소주 3선을 보내주었다. 회령부 기생 월매와 행영 기생 사학(思鶴)과 같이 술을 마셨다. 부사의 종이 한양으로 가는 편에 집으로 보낼 편지를 부쳤다.

 

 

참고 및 인용 : 부북일기(꽃향기 나는 돌, 네이버 블로그 ‘조선왕조실록’),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