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11 - 한정록(閑情錄) 서(序)

從心所欲 2021. 8. 3. 15:22

허균은 17세 때인 1585년 초시(初試)에, 그리고 21세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대과인 과거에 급제한 것은 26세 때인 1594년이었다. 29세 때인 1597년에 예문관 검열이 되고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겸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총명함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1598년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됐다. 이어 1604년에는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1606년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든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 1607년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었을 때는 서류(庶流)와 가까이 지내고 평민들과 교류한다는 이유로 이듬해인 1608년에 파직을 당하였다. 1610년에는 청나라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인 천추사(千秋使)로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갈 수 없다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리고 그 준비과정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아 광해군으로부터 “신하로서의 의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면직되었다. 또한 그해 말 전시(殿試)의 대독관(對讀官)으로 참여했다가 형의 아들과 형의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이렇게 부침을 거듭하는 동안 허균도 벼슬에 대한 회의가 들었을 것이다. 허균은 병으로 천추사(千秋使)를 맡지 못하고 집에서 요양하던 1610년 여름에 그동안 중국사신으로부터 받았던 책들을 참조하여 ‘은거(隱居)’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였다. 당시에는 은둔(隱遁), 한적(閑適), 퇴휴(退休), 청사(淸事)의 4부문으로 나누어 편집하였다가 1618년에 다시 이를 16개의 주제로 나누어 재정리하였다. 이것이 지금 전하는 『한정록(閑情錄)』이다. 한정(閑情)은 ‘한가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책의 서문인 <한정록서(閒情錄序)>에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어찌 벼슬을 더럽다 하여 버리고 산림(山林)에서 오래 살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그 도(道)가 세속(世俗)과 맞지 않고, 그 운명이 때와 어긋난다 하여 고상(高尙)을 가탁하여 세상을 피한 자의 그 뜻은 역시 비장한 것이다.

당우(唐虞) 시대에는 요순(堯舜)을 임금으로 모시고 군신 간에 화합하여 임금을 도우니 정치가 잘 되었다. 그런데도 소보(巢父)나 허유(許由) 같은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귀를 씻고 표주박을 걸어 놓으며, 마치 자신들이 이 세상에 의해 더럽혀질까봐 세상을 버리고 가버렸다. 저들의 이러한 인생관은 또한 어떠한 것인가.
▶소보(巢父)나 허유(許由) : 소보와 허유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은자(隱者)이다.
요(堯) 임금이 천하를 소보에게 넘겨주려 하자 이를 거절했다. 요 임금이 이번에는 허유를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임명하자 허유는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며 영수(穎水)라는 강가로 도망쳐 귀를 씻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소보가 송아지를 끌고 와 그곳에서 물을 먹이려다 귀를 씻고 있는 허유를 보고는, 쓸데없이 떠다니며 명예를 낚으려는 행동은 옳지 않다고 나무란 뒤, 이곳에서 귀를 씻었으니 송아지 입이 더러워지겠다며 상류로 송아지를 끌고 가서 물을 먹였다고 한다.

성성옹(惺惺翁)은 어릴 때부터 응석받이로 자라 찬찬하지 못하였고, 또 부형(父兄)이나 스승 또는 훈장(訓長)이 없어서 예법 있는 행동이 없었다. 또 조그마한 기예(技藝)는 세상에 보탬이 될 만하지도 못하면서도 21살에 상투를 싸매고 과거를 보아 조정에 나갔다. 그러나 경박하고 거침이 없는 행동에 당세 권세가에게 미움을 받는바 되어 나는 마침내 노장(老莊)이나 불교(佛敎) 같은 데로 도피하여, 형해(形骸)를 벗어나고 득실(得失)을 구별 없이 하나로 보는 그런 것을 좋게 여겼다. 그리하여 세상일 되어 가는 대로 내맡기어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성성옹(惺惺翁) : 허균 자신을 가리키는 말.
▶조그마한 기예(技藝) : 문장 특히 시(詩)를 잘 짓는 능력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형해(形骸)를……하나로 보는 : 형해(形骸)는 사람의 몸과 뼈이다. 형해를 벗어나는 것은 불교의 유심론(唯心論)의 진리를, 득실을 하나로 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을 도(道)의 본체에서 보면 모두 같다는 노장(老莊)의 설을 각각 상징한다.

금년으로 내 나이 이미 42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무엇인가 할 만한 일도 없고, 세월은 유수같이 흐르는데 공업(功業)은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내 스스로를 가만히 생각하니 슬퍼지누나. 제일 멋지게 산 저 사마자미(司馬子微)나 방덕공(龐德公)처럼 산과 계곡에 마음과 뜻을 자유스럽게 내팽개쳐 놓게 하지도 못하였고, 이들보다 못하지만 그 다음으로 멋지게 산 저 상자평(向子平)이나 도홍경(陶弘景)처럼 자녀를 필혼(畢婚)하고 멀리 유람하거나 관직을 사직하고 멀리 여행을 떠나거나 하지도 못하였으며, 또 그들보다 못한 것이지만 마지막으로 저 사강락(謝康樂)이나 백향산(白香山)처럼 벼슬을 하다가 자연 속으로 돌아와 정회(情懷)를 푼 것과 같이 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는 형세(形勢)에 급급하여 끝내 한가하지 못하여 조그마한 이해(利害)에도 어긋날까 마음이 두렵고, 보잘것없는 자들의 칭찬이나 비방에도 마음이 동요되었다. 이렇게 되자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이며 혹시 함정에 빠질까 여겨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큰 기러기나 봉(鳳)이 멀리 날 듯, 매미가 허물을 벗듯 초연히 탁세(濁世)를 벗어나는 옛날의 어진 이와 나를 비교해 보니, 그들의 지혜와 나의 어리석음의 차이가 어찌 하늘과 땅의 차이에 그치겠는가.
▶42세 : 광해군 2년인 1610년.
▶사마자미(司馬子微) : 자미(子微)는 사마승정(司馬承禎)의 자(字)이다. 사마승정은 중국 당나라 때의 도사이자 도교학자였다. 21세에 숭산(嵩山)에 들어가 도교의 방술을 전수받고 천대산(天臺山)에 은거했으나 빈번한 궁정의 부름을 받았다.
▶방덕공(龐德公) : 후한(後漢) 때의 명사(名士)로, 당시에 양양(襄陽)에서 은거했던 사마휘(司馬徽), 제갈량(諸葛亮) 등과 친밀하게 지냈다. 제갈량은 방덕공(龐德公)을 스승으로 예우하여 자주 인사하러 오기도 했다. 뒤에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며 약초를 캐면서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상자평(向子平) :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고, 자녀의 혼사(婚事)를 다 끝내자 오악(五嶽) 명산(名山)을 두루 유람한 뒤 행적이 묘연해졌다 한다.
▶도홍경(陶弘景) : 유 ·불 ·도 삼교에 능통했던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 도가(道家). 양생(養生)의 뜻을 품고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였는데, 양나라 무제의 신임이 두터워 국가의 길흉과 대사에 자문역할을 하여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불리었다.
▶사강락(謝康樂) : 중국 남송(南宋)의 시인인 사영운(謝靈運). 벼슬살이를 했으나 뜻에 맞지 않자 바로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 산수를 노닐고 시를 지으며 자적(自適)하였다.
▶백향산(白香山) : 향산(香山)은 당(唐)나라 사람 백거이(白居易)의 별호. 당나라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벼슬을 하는 중에도 연이어 뛰어난 시를 발표하여 세상에서 명성을 얻었다.

근래 병으로 휴가를 얻어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중에 우연히 유의경(劉義慶)ㆍ하양준(何良俊)의 <서일전(棲逸傳)>, 여백공(呂伯恭)의 <와유록(臥遊錄)>, 도현경(都玄敬) 의 《옥호빙(玉壺氷)》을 열람하게 되었는데, 거기 담긴 서정(敍情)이 소산(蕭散)하여 내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네 사람의 차록(箚錄)을 합하고, 그 사이에 내가 보고 기록한 바를 덧붙여 책 1권을 만들고, 또 거기다 고인(古人)의 시부(詩賦)나 잡문(雜文)에서 한일(閒逸)에 대해 읊은 것을 가져와 후집(後集)을 만들었는데, 모두 10편(編)으로 『한정록(閒情錄)』이라 이름하고는 내 스스로 반성하려는 것이다.
▶<서일전(棲逸傳)> : 후한 말부터 동진까지의 명사들의 일화를 모은 책인 《세설신어(世說新語)》의 편명 가운데 하나.
▶《옥호빙(玉壺氷)》 : ‘옥호빙(玉壺氷)’은 ‘옥으로 만든 병 속의 얼음’이란 뜻으로 은자의 고결함을 비유하는 말로, 속세에 물들지 않은 채 고결한 절조를 지키면서 고상한 정취를 즐기는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나라부터 명나라 초까지의 여러 전적 중에서 고일(高逸)한 문장이나 고사만을 가려 뽑아 편록(編錄)한 책.
▶모두 10편(編) : <한정록서(閒情錄序)>에 이어서 나오는 범례에 의하면 16부문(部門)으로 분류하고 권(卷)도 16권으로 하고, 4종을 부록으로 붙인다고 하였다. 원문에 모두 10편이라 하였는데, 이 서문을 쓸 당시는 10편이었고, 그 뒤 중국에서 책을 구입, 더 보완하여 17권(부록 1권)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늙은이는 적은 재주로 아직 도(道)를 듣지 못하였으나 성세(聖世)에 태어나 관(官)은 상대부(上大夫)요, 직(職)은 교서(敎書)의 직분이니, 어찌 감히 소부(巢父)나 허유(許由)를 따르려고 요순과 같은 임금과 결연히 결별하고 내 스스로 고상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
다만 때와 운명이 맞지 않으므로 옛사람이 탄식한 바와 비슷한 데가 있다. 내 만약 몸이 건강한 날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나의 천수(天壽)를 다한다면 행복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겠다.
다음날 언젠가 숲 아래에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을 버린 선비를 만나게 될 때 이 책을 꺼내 가지고 서로 즐겨 읽는다면 내 타고난 인간으로서의 본성(本性)을 저버리지는 않으리라.

 

[전김홍도필 산수인물도(傳金弘道筆山水人物圖), 견본채색, 69.1 x 40.6cm,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