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24 - 한정록(閑情錄) 유흥(遊興) 2

從心所欲 2021. 9. 16. 07:00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유흥(遊興)은 5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산천(山川)의 경치를 구경하여 정신을 휴식시키는 것은 한거(閑居) 중의 하나의 큰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5 ‘유흥(遊興)’으로 한다.”

 

 

● 왕면(王冕)이 큰 눈이 내린 뒤 맨발로 잠악봉(潛嶽峯)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외쳤다.

“온 천지가 모두 백옥(白玉)처럼 변해서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해맑게 만드는구나. 이대로 신선이 되어 떠나가고만 싶다.” 《옥호빙(玉壺氷)》

 

● 왕인(王寅)은 불교에 대한 얘기를 즐겨 일찍이 불제자(佛弟子)의 예(禮)를 행한 적이 있었다. 고봉선사(高峯禪師)를 만나 예를 올리고 꿇어앉아 청하기를,

“제가 가끔 기인(奇人)을 만났었지만 선사 같은 분은 없었습니다. 선사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

하니, 선사가,

“내가 해내(海內)의 오악(五獄)을 두루 유람한 것이 세 번이었다. 이제는 해외(海外)의 오악을 유람한 뒤 세상에 나오겠다.”하였다.

이리하여 왕인은 더욱 선사를 사모하게 되었고, 인하여 십악산인(十獄山人)이라 자호(自號)하였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오입부(吳立夫)는 유람을 좋아했다. 그래서 중원(中原)의 경치가 기이한 곳 및 옛사람들이 춤추며 놀던 곳과 싸움하던 전쟁터를 만날 적마다 술을 마시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면서 스스로 즐겼다. 그야말로 사마자장(司馬子長 : 자장은 사마천(司馬遷)의 자(字))의 유풍(遺風)이 있는 사람이었다.

강남(江南)으로 돌아와서는 바닷가를 따라 교문협(蛟門峽)을 거쳐 소백화산(小白華山)으로 갔다. 반타석(盤陀石)에 올라서는 바닷물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장렬하게 떠오르는 해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리고는 안기생(安期生)ㆍ선문(羨門)을 불러 그들과 함께 놀고 싶은 생각이 부풀었다.

이리하여 금회(襟懷)가 더욱 소랑(疎朗)해졌고 따라서 문장(文章)도 더욱 웅장하고 기이한 기상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잘 지으려면 3만 권의 책을 읽어야 함은 물론, 천하의 기이한 산천을 두루 구경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리 글을 잘 지었다 하더라도 아녀자들의 얘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미공비급》

▶안기생(安期生)ㆍ선문(羨門) : 안기생은 진(秦) 나라 사람으로 하상장인(河上丈人)에게 수학하여 신선이 된 사람이고, 선문은 옛날의 선인(仙人)이라 한다.

 

● 육종백(陸宗伯 : 육수성(陸樹聲))이 막운경(莫雲卿 : 운경은 막시룡(莫是龍)의 자)의 산수첩(山水帖)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나의 고향 집은 첩첩 산 속에 있기 때문에 아침엔 아침대로 저녁엔 저녁대로 모두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내가 성(城)으로 들어와 살면서부터 그 경치를 나무꾼과 목동들에게 빼앗겨 버렸다. 이 산수첩을 펴보니 갑자기 친구들이 있는 옛집으로 돌아간 느낌이고, 또 다시 짚신 신고 대나무 지팡이로 유람하고 싶은 생각이 일게 한다.” 《미공비급》

 

● 등 문결(鄧文潔 : 문결은 등이찬(鄧以讚)의 시호(諡號))은 평생 병이 많아 자신의 몸을 매우 아꼈다. 그러나 숭산(崇山)의 준령(峻嶺)에 올라서는 끝까지 가보지 않고는 쉬지 않았고, 절벽에 임하지 않고는 중지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정신이 산뜻해져서 훨훨 날고 싶었다 한다.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 육엄산(陸儼山 : 엄산은 육심(陸深)의 호)은 말했다.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너면서 오로지 시(詩)나 부(賦)만 일삼는다면, 도리어 유람의 참 즐거움을 잃게 된다. 섭석림기(葉石林記)에 ‘진후산(陳后山 : 후산은 진사도(陳師道)의 호)은 산에 올라 관람하다가 시구(詩句)를 얻게 되면 곧 돌아와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쓰고 침상에 누워버린다. 집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즉시 조용하게 하기 위해 고양이나 개는 멀리 쫓고 애기는 안고 어린애는 데리고 가서 이웃집에 맡긴다. 그리곤 서서히 그가 일어나 시(詩) 쓰기를 기다린다. 시가 완성된 뒤라야 감히 다시 애도 데려오고 고양이와 개도 불러온다.’ 했는데, 이는 시를 짓는 것 때문에 집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저 아름다운 강산(江山)에 날씨 또한 쾌청하면 풍류가 있는 훌륭한 벗들과 높은 산에 올라 조망(眺望)의 흥을 끝까지 즐겨야 함은 물론, 또 명멸하는 등불 아래서나 달빛 쏟아지는 저녁에, 가본 곳을 눈에 선하게 낱낱이 추억해 낼 수 있은 뒤 이를 발하여 시를 지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각각 자신의 뜻에 만족하여 일점의 누(累)도 없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육문유공집(陸文裕公集)》

 

[작가미상 <산수도(山水圖)>, 지본담채, 122.8 x 50.2cm, 국립중앙박물관 ㅣ 그림은 중국의 소주(蘇州)와 삼강(三江) 지방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 곳을 주제로 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로 보인다. 화제(畵題) ‘雨中春樹萬人家[빗속의 봄 숲에는 수많은 인가로다]’는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왕유(王維)가 지은 <奉和聖制從蓬萊向興慶閣道中留春雨中春望之作應制( 황제가 봉래궁에서 흥경각으로 가는 도중 지으신 ‘봄비 가운데 머물며 봄 풍경을 바라본다[留春雨中春望]’는 시를 받들어 화운(和韻)하여 응제(應製)하다.)>라는 기다란 제목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 아름다운 경치의 유람을 논하는 사람은 반드시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신체적 조건을 우선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렇다. 그 사람의 정취(情趣)가 아름다운 경치와 한 덩어리가 되어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널 때 스스로 정신이 왕성해짐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잘 달릴 수 있는 건각(健脚)을 가졌더라도 갑자기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인 것이다. 《소창청기(小窓淸記)》

 

● 사람들은, 가슴속에 스스로 한 폭의 구학(丘壑)을 갖추고 있어야 바야흐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바야흐로 산을 보아야 비로소 글을 지을 수 있다. 산이 고요하면 낮도 밤 같고, 산이 담박하면 봄도 가을 같고, 산이 텅 비었으면 따뜻해도 추운 것 같고, 산이 깊숙하면 맑아도 비 내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파라관집(婆羅館集)》

▶구학(丘壑) : 언덕과 골짜기라는 뜻이나 산수의 한적하고 청아한 정취를 의미하기도 한다.

 

● 해산(海山)은 아득하여 보일락 말락 하고, 강산(江山)은 엄숙하게 우뚝 솟았고, 계산(溪山)은 아늑하게 조용하고, 새산(塞山)은 민둥민둥하여 흙 언덕 같다.  《암서유사(巖棲幽事)》

 

● 속세 밖 교정(交情)의 대상은 산(山)뿐이다. 산은 반드시 사물의 도리를 깊이 관찰하는 눈과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편리한 체구와 오래도록 머무는 인연이 있어야만 비로소 막역(莫逆)한 교우 관계를 허여하는 것이다. 《소창청기》

 

● 산수(山水)를 오르내리면서 그윽한 경치를 다 구경하고, 낮에 이어 밤까지 벌였던 성대한 모임의 이야기를 모아서 사람들에게 말해준다면, 이는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옥호빙(玉壺氷)》

 

● 높은 산, 깊숙한 숲, 감도는 시내를 따라 그윽한 샘과 기괴한 돌이 있는 곳이면, 아무리 멀어도 가지 않는 곳이 없다. 도착하면 풀을 헤치고 앉아서 술병을 기울여 술을 마시고 취하면 다시 서로 마주 베고 눕는다. 이리하여 자신의 뜻에 더없는 만족을 느끼게 되면, 꿈속의 정취(情趣)도 평시와 같게 된다. 《옥호빙》

 

● 천지 사이에 있는 운람(雲嵐)ㆍ목석(木石)ㆍ숭구(崇丘)ㆍ절벽(絶壁) 가운데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함을 발하게 하기에 흡족한 곳으로 아직도 인적이 닿지 않은 곳이 많다. 때문에 은거한 기인(奇人)이 세상을 잊은 채 자신의 즐거움을 스스로 즐기면서 늘 그 속에 묻혀 떠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위(地位)에서 밀려나는 누를 당하고, 쑥대머리에 때 묻은 옷을 입게 되어도 달갑게 여기는 것이다. 《소창청기》

 

● 일찍이 높은 산에 올라 성시(城市)를 내려다보았었다. 성이 개미집처럼 보이니, 모르겠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높은 데서 내려다보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 산이 성의 높이보다 과연 얼마나 더 높겠는가. 그런데도 이렇게 보이는데 항차 진짜 신선이 하늘 위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본다면, 개미집같이 보일 정도뿐이 아닐 것이다. 《지비록(知非錄)》

 

● 높은 산에 오를 적마다 깊숙한 골짜기로 가서 편안히 머물러 앉아,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걸린 폭포수와 고목에 드리운 덩굴을 구경했다. 깊숙하고 고요한 곳이면 해가 기울어도 돌아가길 잊게 된다. 《소창청기》

 

● 깎아지른 바위와 높은 절벽과, 고목에 드리운 덩굴에 붙어 있는 맑은 얼음이나 서리는 조각 구름이나 초승달과 다를 것이 없다.

산 빛이 호수 위에 비칠 때 지팡이를 짚고 물가에 가서 서면, 마음도 함께 더없이 깨끗해진다. 《소창청기》

 

● 서리가 내려 나뭇잎이 떨어질 때 성긴 숲 깊숙한 곳의 나무 밑에 앉았노라면 누런 낙엽이 나부껴 옷깃에 떨어지고, 들새는 나뭇가지로 날아와 사람을 엿본다. 황량한 곳에도 자못 청광(淸曠)한 운치가 있는 것이다. 《소창청기》

 

● 봄 산은 아리따워 웃는 것 같고 여름 산은 푸르름이 뚝뚝 듣는 것 같고, 가을 산은 맑고 깨끗해 화장한 것 같고, 겨울 산은 참담하여 조는 것 같다. 이는 곽희(郭熙)가 한 말로 네 계절의 산 경치를 분명하게 그려냈다. 이로 보면 야인(野人)은 참으로 아무리 취해와도 금하는 이 없고 아무리 가져다 써도 바닥나지 않는 것이 경치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호산(湖山)과 달인(達人)은 대개 서로 걸맞은 점이 있다. 그래서 달인이 거처하는 곳에는 절로 왕기(旺氣)가 있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사안(謝安)의 사공돈(謝公墩), 정자진(鄭子眞)의 곡구(谷口), 왕적(王績)의 취향(醉鄕), 소식(蘇軾)의 소제(蘇隄)에 왕왕 그런 왕기가 있었으니, 이른바 초목(草木)과 금어(禽魚)도 모두 상서로운 빛과 맑은 소리를 낸다는 것이 헛말은 아닌 것 같다. 《지비록》

▶취향(醉鄕) : 술 마시어 느끼는 즐거운 경지.
▶소제(蘇隄) : 소동파가 항주 행정관으로 있을 당시 서호의 범람을 막기 위해 쌓은 제방.

 

● 신비스러운 동천(洞天)이나 오경(奧境)은 고상한 풍류를 지닌 사람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조물주(造物主)가 몰래 보관해 두고 경솔히 범인(凡人)에게 보이려 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화양(華陽)의 구곡산(句曲山)이 금릉(金陵)의 지폐(地肺 : 부도(浮島))가 되는데, 좌원방(左元放)이 3개월 간 청재(淸齋)한 다음에야 동천이 열렸었다. 또 선경으로 이름난 무릉도원(武陵桃源)도 어느 어부(漁父)가 우연히 들어갔던 곳이다. 이렇게 보면 오악(五獄)을 유람하는데도 두려워서 몸을 움츠리는 사람이야 선경(仙境)의 울타리나마 볼 수 있겠는가. 현묘(玄妙)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은 오히려 제이의(第二義)로 떨어지는 것으로, 이는 약초를 캐는 사람이 약초를 가탁하여 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산의 기이함을 탐방하는 사람이 산을 빙자하여 글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선경이 보통 사람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산신령이 꼭꼭 숨겨둔 채 그 선경을 영광스럽게 해줄 사람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지비록》

 

● 등달도(滕達道)ㆍ전순로(錢醇老)ㆍ손신로(孫莘老)ㆍ손거원(孫巨源)이 다같이 관(館)에 있었다. 꽃피는 계절이 되자 각각 경사(京師)에서 꽃이 가장 성대한 곳을 꼽았다. 그때 등달도가,

“여러분이 꼽은 곳은 자랑할 만한 곳이 못 됩니다. 10일 간 말미를 얻어 여러분과 같이 내가 좋아하는 곳 구경시켜 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하니, 세 사람은 달도가 말한 대로 승낙했다.

그날 등달도가 앞장서서 봉구문(封丘門)을 나서서 작은 암자(庵子)로 들어갔다. 몇 걸음 걸어서 어떤 문 앞에 다다랐는데 매우 초라했다. 거기서 또 몇 걸음을 가니 큰 대문이 있었는데 매우 장려했다. 말에서 내려 대청으로 가니, 도사의 모자에 자줏빛 반소매 옷을 입은 주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달도(達道)는 그와 평소부터 아는 사이였다. 달도가,

“오늘은 풍애(風埃)가 매우 심하군요.”

하니, 주인이,

“이곳은 변변찮으니 여러분께서는 소청(小廳)으로 가십시다.”

하였다. 소청으로 가니 온갖 꽃이 만발했고, 마루 난간을 화사하게 꾸민 매우 아름다운 누관(樓觀)이었다. 물과 뭍에서 피는 꽃들이 다 갖추어 있었는데 경사(京師)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주인이 또 사람을 시켜 후당(後堂)의 문을 열게 하니, 음악 소리가 좌석에까지 들려왔다. 손신로는 이때 상중(喪中)이었으므로 들어가길 사양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후당으로 들어갔다. 그 뒤 손신로는 사람들에게 늘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평생 꽃구경한 가운데 그곳만한 곳이 없었다.” 《염이편(艶異編)》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