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蔣生)이란 사람은 어떠한 내력을 지닌 사람인 줄을 알 수가 없었다.
기축년(1589, 선조22) 무렵에 서울에 왕래하며 걸식하면서 살아갔다. 그의 이름을 물으면 자기 역시 알지 못한다 하였고,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거주했던 곳을 물으면,
“아버지는 밀양(密陽)의 좌수(座首)였는데 내가 태어난 후 세 살이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께서 비첩(婢妾)의 속임수에 빠져 나를 농장(農莊) 종의 집으로 쫓아냈소. 15세에 종이 상민(常民)의 딸에게 장가들게 해주어 몇 해를 살다가 아내가 죽자 떠돌아다니며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의 수십 고을에 이르렀고 이제 서울까지 왔소.”
하였다.
그의 용모는 매우 우아하고 수려했으며 미목(眉目)도 그린 듯이 고왔다. 담소(談笑)를 잘하여 막힘이 없었고 더욱 노래를 잘 불렀으니 노래 소리가 처절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곤 했었다. 늘 자주색 비단으로 된 겹옷[裌衣]을 입고 다녔는데,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갈아입는 적이 없었다.
창녀(倡女)나 기생들 집에도 다니지 않는 곳이 없어 잘 알고 지냈으며, 술만 있으면 곧바로 자기가 떠다가 잔뜩 마시고는 노래를 불러 아주 즐겁게 해주고는 떠나가 버렸다.
어느 때는 술이 한창 취하면 눈먼 점쟁이ㆍ술 취한 무당ㆍ게으른 선비ㆍ소박맞은 여인ㆍ걸인ㆍ노파들이 하는 짓을 흉내 냈으니 하는 짓마다 아주 똑같이 해댔었다. 또 얼굴로 십팔나한(十八羅漢)을 흉내 내면 꼭 같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또 입을 찡그려서 피리ㆍ거문고ㆍ비파ㆍ기러기ㆍ고니ㆍ무수리ㆍ집오리ㆍ갈매기ㆍ학(鶴) 등의 소리를 내는데, 진짜와 가짜임을 구별하기 어렵게 하였다. 밤에 닭 우는 소리ㆍ개 짖는 소리를 내면 이웃 개나 닭이 모두 울고 짖어대는 지경이었다.
아침이면 밖으로 나와 거리나 저자에서 구걸을 했으니, 하루 동안에 얻는 것이 거의 서너 말[斗]이었다. 몇 되[升]쯤 끓여 먹고 나면 다른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밖으로만 나오면 뭇 거지 아이들이 뒤를 따랐다. 다음날에도 또 그와 같이 해버리니 사람들은 그가 하는 짓을 헤아릴 수 없었다.
전에 악공(樂工) 이한(李漢)이라는 사람 집에서 더부살이한 적이 있었다. 머리를 쌍갈래로 땋은 계집이 호금(胡琴)을 배우느라 조석으로 만나므로 서로 친숙하였다. 하루는 구슬로 이어진 자주빛 봉미(鳳尾, 머리에 꽂는 노리개)를 잃어버리고 있는 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연유를 들어 보니, 아침에 길거리에서 오다가 준수한 소년이 있기에 웃으며 농을 붙이고 몸이 닿고 스치더니 이내 봉미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더란다. 그래서 장생은,
“우습구나. 어린 것들이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아가씨야 울지 마라. 저녁이면 반드시 내 소매 속에 넣어 오겠다.”
하고는, 훌쩍 나가버렸다.
저녁이 되자 계집아이를 불러내어 따라오게 하고서는, 서쪽 거리 곁 경복궁(景福宮) 서쪽 담장을 따라 신호문(神虎門)의 모퉁이에 이르렀다. 계집의 허리를 큰 띠로 묶어 왼쪽 어깨에 들쳐 매고 풀쩍 뛰어, 몇 겹으로 겹친 문으로 날아서 들어갔다. 한창 어두울 때여서 길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급히 경회루(慶會樓) 위로 올라가니 두 소년이 있었다. 촛불을 들고 마중 나와 서로 보며 껄껄 웃어대었다. 그러더니 상량 위의 뚫어진 구멍에서 금구슬ㆍ비단ㆍ명주가 무척 많이 나왔다. 계집이 잃어버린 봉미 또한 있었다.
소년들이 그걸 돌려주자 장생(蔣生)은,
“두 아우는 행동거지를 삼가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종적을 보지 못하도록 하게나.”
하였다. 그런 뒤에 끌고 다시 날라서 북쪽 성(城)으로 나와 그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계집은 다음날 밝기 전에 이씨(李氏)의 집으로 가서 감사의 말을 하려 했더니 술이 취해 누워 있으며 코를 쿨쿨 골고 있었고, 사람들 또한 밤에 외출했던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4월 초하룻날 값을 뒤에 주기로 하고 술 몇 말[斗]을 사와, 아주 취해서는 길을 가로 막으며 춤을 추고 노래 부르기를 그치지 않다가는 거의 밤이 되어 수표교(水標橋) 위에서 넘어졌다. 다음날 해 뜬지 늦어서야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는데, 죽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었다. 시체가 부패하여 벌레가 되더니 모두 날개가 돋아 전부 날아가 버려 하룻밤에 다 없어지고 오직 옷과 버선만이 남아 있었다.
무인(武人) 홍세희(洪世熹)라는 사람은 연화방(蓮花坊)에서 살았으니, 장생(蔣生)과 친하게 지냈었다. 4월에 이일(李鎰)을 따라 왜적을 방어했었다. 조령(鳥嶺)에 이르렀을 때 장생을 만났다. 그는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면서 손을 붙잡고는 무척 기뻐하면서,
“나는 사실 죽지 않았소. 바다 동쪽으로 향하여 한 나라를 찾아 떠나버렸소.”
하더란다. 그러면서,
“그대는 지금 죽을 나이가 아니오. 병화(兵禍)가 있으면 높은 곳의 숲으로 향해 가고, 물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정유년에는 삼가고 남쪽으로는 오지는 마시오. 혹 공사(公事)의 주관한 일이 있더라도 산성(山城)으로 오르진 마시오.”
하고는 말을 끝마치자 날아서 가버리니 잠깐 사이에 있는 곳을 알 수 없더란다.
홍세희는 과연 탄금대(彈琴臺)의 전투에서 그가 해 준 말을 기억해 내서 산 위로 달아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정유년(1597, 선조30) 7월에 금군(禁軍)으로 숙직을 할 때,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정승에게 임금의 교지(敎旨)를 전해 주느라 그가 경계해 준 것을 모두 잊었었다. 돌아오면서 성주(星州)에 이르러 적군의 추격을 당하자, 황석성(黃石城)이 전쟁 준비가 잘 되어 있다함을 듣고는 급히 달려갔는데, 성(城)이 함락되자 함께 죽고 말았다.
내가 젊은 시절에 협사(俠士)들과 친하게 지냈고, 그와도 해학(諧謔)을 걸 정도로 아주 친하게 지냈던 탓으로 그의 잡기놀이를 모두 구경하였다.
슬프다, 그는 신(神)이었거나 아니면 옛날에 말하던 검선(劍仙)과 같은 부류가 아니랴!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3, 임형택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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