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163

허균 15 -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 3

● 진도남(陳圖南 : 도남은 송(宋) 진박(陳搏)의 자)은 무당산(武當山)에 들어가서 20년 동안이나 벽곡(辟穀) 연기(鍊氣)하고, 뒤에는 화산(華山) 운대관(雲臺觀)에 살았다. 태평흥국(太平興國 : 송 태종(宋太宗)의 연호) 때 진박이 두 번 입조(入朝)하였는데, 제(帝)가 매우 후대(厚待)하였다. 이때 다시 와서 제를 알현하니 제가 재신(宰臣)에게 이르기를, “진박은 독선기신(獨善其身)하고 세리(勢利)를 구하지 않으니, 이른바 방외지사(方外之士)이다.”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를 중서성(中書省)까지 전송하였다. 재상(宰相) 송기(宋琪) 등이 조용한 여가에 묻기를, “선생은 현묵(玄黙 : 노자의 도) 수양(修養)의 방법을 터득하였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하니, 진박이, “나는..

우리 선조들 2021.08.11

허균 14 -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 2

● 사마덕조(司馬德操 : 덕조는 후한 사마휘(司馬徽)의 자)는 인륜(人倫)이 있는 사람이었다. 형주(荊州)에 있을 때 유표(劉表)가 혼암(昏暗)하여 반드시 착한 사람들을 해치게 될 것을 알아차리고서, 입을 다물고 다시는 논평을 하지 않았다. 이때 인물(人物)들을 놓고 사마덕조에게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초부터 인물들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번번이 좋다고만 말하므로, 그 아내가 간(諫)하기를,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바를 질문하면, 당신이 마땅히 분별해서 논해 주어야 하는데 모두 좋다고만 하니, 어찌 사람들이 당신에게 물어보게 된 본의이겠습니까?” 하니, 사마덕조가, “당신의 말 역시 좋은 말이오.” 하였다. ● 남군(南郡) 방사원(龐士元 : 사원은 촉한(蜀漢) 방통(龐統)의 자)이 사마덕조가 영천(穎川)에..

우리 선조들 2021.08.10

허균 13 -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 1

● 소부(巢父)는 요(堯) 시절의 은자(隱者)인데, 산 속에 살며 세속의 이욕(利慾)을 도모하지 않았다. 늙자 나무 위에 집을 만들어 거기에서 자므로 당시 사람들이 ‘소부’라고 했다. 요(堯)가 천하(天下)를 허유(許由)에게 양여(讓與)하려 할 때, 허유가 소부에게 가서 그 말을 하자 소부가, “자네는 어찌하여 자네의 형체를 숨기지 않고 자네의 빛깔을 감추지 않는가?” 하며, 그의 가슴을 밀쳐 버리므로 허유가 서글픔을 주체하지 못하여, 청랭(淸冷)한 물가를 지나다가 귀를 씻고 눈을 씻으며 말하기를, “전일에 탐욕스러운 말을 들음으로써 나의 벗을 저버리게 되었도다.” 하고, 드디어 떠나 일생을 마치도록 서로 만나지 않았다. 《고사전(高士傳)》 ● 허유는 사람됨이 의리를 지키고 행신이 발라, 부정한 자리에는..

우리 선조들 2021.08.09

허균 12 - 한정록(閑情錄) 범례(凡例)

내가 경술년(庚戌年)에 병으로 세간사(世間事)를 사절(謝絶)하고 문을 닫고 객(客)을 만나지 않아 긴 해를 보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보따리 속에서 마침 책 몇 권을 들춰내었는데, 바로 주난우(朱蘭嵎) 태사(太史)가 준 서일전(棲逸傳), 《옥호빙(玉壺氷)》, 《와유록(臥遊錄)》 3종이었다. 이것을 반복하여 펴 보면서 곧바로 이 세 책을 4문(門)으로 유집(類集)하여 『한정록(閒情錄)』이라 이름하였다. 그 유문(類門)의 첫째가 ‘은일(隱逸)’이요, 둘째가 ‘한적(閒適)’이요 셋째가 ‘퇴휴(退休)’요 넷째가 ‘청사(淸事)’였다. 내 손으로 직접 베껴 책상 위에 얹어 두고, 취미가 같은 벗들과 그것을 함께 보며 모두 참 좋다고 하였다. ▶경술년(庚戌年) : 광해군2년인 1610년 ▶주난우(朱蘭嵎) : 명..

우리 선조들 2021.08.04

허균 11 - 한정록(閑情錄) 서(序)

허균은 17세 때인 1585년 초시(初試)에, 그리고 21세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대과인 과거에 급제한 것은 26세 때인 1594년이었다. 29세 때인 1597년에 예문관 검열이 되고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겸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총명함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1598년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됐다. 이어 1604년에는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1606년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

우리 선조들 2021.08.03

연암 박지원 35 - 백이론(伯夷論) 하(下)

백이론(伯夷論) 하(下)는 상(商)나라가 망할 때의 상황과 당시 인물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연암 박지원의 글을 읽어도 그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상(商)이란 나라는 고고학적으로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중국의 가장 오랜 국가이다. 그 앞에 존재했다는 하(夏)나라는 전설 속의 왕조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상(商)이 중국 최초의 왕조이다.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1세기까지 존재했고, 주(周)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흔히 은(殷)나라로 많이 불리지만, 은(殷)은 상나라 후기인 1300년부터 1046년까지의 상나라 도읍 이름이다. 이 상(商)의 마지막 임금이 주왕(紂王)이다. 총명하고 용맹했지만,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여 신하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즐기..

우리 선조들 2021.07.30

연암 박지원 34 - 백이론(伯夷論) 상(上)

박지원의 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에 실린 에 대하여 논박한 글로 『연암집』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에 실려 있다. 에 실린 백이와 숙제(叔齊)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의 제후(諸侯)인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숙제에게 지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숙제가 형인 백이에게 양보하려 하였다. 백이는 “아버지의 명이다.”라고 하고는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숙제도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달아나 버리니, 나라 사람들이 다른 형제를 왕으로 세웠다. 백이와 숙제가 뒷날 문왕(文王)이 되는 서백(西伯)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로 갔는데, 도착해 보니 서백은 이미 죽었고, 그 아들 무왕이 아비의 신주(神主)를 수레에 싣고서 동쪽으로 은..

우리 선조들 2021.07.25

연암 박지원 33 - 옥새론(玉璽論)

‘론(論)’은 사리를 판단하여 시비를 밝히는 한문문체의 하나로, 일종의 논설문이다. 조선시대의 글 가운데는 박지원(朴趾源)의 <옥새론(玉璽論)>과 <백이론(伯夷論)>을 명작으로 꼽는다. 박지원은 <옥새론>에서 천하를 얻는 것은 본래 덕(德)으로 얻는 것이지 옥새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논하였다. 『연암집』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에 들어있다. 조(趙)나라 왕이 화씨(和氏)의 옥(玉)을 얻자 진(秦)나라가 열다섯 성을 주고 바꾸려 하였는데 인상여(藺相如)가 속임수임을 알고는 옥을 온전히 보전하여 조(趙)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진 나라가 제후들을 합병함에 따라 그 옥은 다시 진나라로 들어와 나라를 전하는 옥새가 되었다. 그 옥새(玉璽)에는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니 수(壽)를 다하고 길이 창성하리라[受命于..

우리 선조들 2021.07.21

허균 10 - 호민론(豪民論)

호민론(豪民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여덟 번째 논(論)이다.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우리 선조들 2021.07.16

허균 9 - 소인론(小人論)

소인론(小人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일곱 번째 논(論)이다. 요즈음 나라에는 소인(小人)도 없으니 또한 군자(君子)도 없다. 소인이 없다면 나라의 다행이지만 만약 군자가 없다면 어떻게 나라일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군자가 없기 때문에 역시 소인도 없는 것이다. 만약 나라에 군자가 있다면 소인들이 그들의 형적(形迹)을 감히 숨기지 못한다. 대저 군자와 소인은 음(陰)과 양(陽), 낮과 밤 같아서 음(陰)이 있으면 반드시 양(陽)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반드시 밤이 있으니, 군자가 있다면 반드시 소인도 있다. 요순(堯舜) 때에도 역시 그랬는데 하물며 뒷세상에서랴. 대개 군자라면 바르고 소인이라면 간사하며, 군자라면 옳고 소인이라면 그르며, 군자라면 공변되고 소인이라면 사심(私心)을..

우리 선조들 2021.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