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163

허균 8 - 후록론(厚祿論)

후록론(厚祿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여섯 번째 논(論)이다. 《예기(禮記)》에, “충신(忠信)으로 대접(待接)하고 녹(祿)을 후(厚)하게 해줌은 선비[士]를 권장하려는 까닭이다.” 하였으니, 그 말이야말로 의미심장하다. 남의 윗사람이 된 자가 그 아랫사람에게 녹을 후하게 내려주지 않는다면, 선비된 사람들이 어떻게 권장되어서 청렴한 정신을 길러서 이익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가는 짓이 없게 하랴. 이 때문에 옛날 군자(君子)로 나라에 벼슬하던 사람은 녹이 풍족하여 욕구를 채웠으니, 봉급은 아내와 자식을 돌보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고, 뇌물 받는 행위 없이도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양육하는 물품이 저절로 넉넉하였다. 여유만만하게 한가하고 편안한 틈을 내어 그가 쌓아 ..

우리 선조들 2021.07.09

허균 7 - 유재론(遺才論)

유재론(遺才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다섯 번째 논(論)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과, 함께 하늘이 맡겨 준 직분을 다스릴 사람은 인재(人才)가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는 고귀한 집안의 태생이라 하여 그 성품을 풍부하게 해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하여 그 품성을 인색하게 주지만은 않는다. 그런 때문에 옛날의 선철(先哲)들은 명확히 그런 줄을 알아서, 더러는 초야(草野)에서도 인재를 구했으며, 더러는 병사(兵士)의 대열에서 뽑아냈고, 더러는 패전하여 항복한 적장을 발탁하기도 하였다. 더러는 도둑 무리에서 고르며, 더러는 창고지기를 등용했었다. 그렇게 하여 임용한 사람마다 모두 임무를 맡기..

우리 선조들 2021.07.05

허균 6 - 병론(兵論)

병론(兵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네 번째 논(論)이다. 천하에 군대 없는 나라가 있을까? 그런 나라는 없다. 나라에 군대가 없다면 무엇으로써 포악한 무리들을 막겠는가? 포악한 것들을 막을 장비가 없다면 나라가 어떻게 자립하며, 임금이 어떻게 자존(自尊)하며, 백성들은 어떻게 하루인들 그들의 잠자리를 펴랴. 그런데, 천하에 군대 없는 나라가 있다. 군대가 없고도 오히려 수십 년이나 오래도록 보존함은 고금에 없는 바이나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다. 그렇다면 포악한 것들을 막을 장비도 없이 오히려 천승(千乘)의 왕위를 유지함에는 어떤 술법(術法)이 있다는 것인가? 그러한 술법은 없고 우연이었다. 왜 우연이라고 하는가? 왜적이 물러간 다음 우연히 다시 오지 않았고, 노추(奴酋)들이 우연히 우리..

우리 선조들 2021.06.29

허균 5 - 관론(官論)

관론(官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세 번째 논(論)이다. 삼대(三代) 이후로 관직을 함부로 늘리고 관원(官員)이 많았던 것으로는 당(唐)나라보다 더한 나라는 없었다. 관직을 함부로 늘린다면 권한이 분산되어 지위가 높아지지 못하고, 관원이 많으면 녹(祿)만 허비되고 일은 성취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고서야 훌륭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씨(李氏)의 번창하지 못했음은 오로지 여기에 연유하였다. ▶이씨(李氏) : 이연(李淵)이 건국한 당나라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관제(官制)는 당(唐)나라를 본받았으나, 더욱 관직이 늘어났고 또 헛 비용이 들게 되어 있다. 중국처럼 큰 천하로서도 오히려 권한이 분산되고 녹의 비용이 드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하물며 궁벽한 조그마한 우리..

우리 선조들 2021.06.24

허균 4 - 정론(政論)

정론(政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두 번째 논(論)이다. 예부터 제왕(帝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혼자서 정치하지는 않았다. 반드시 보상(輔相)하는 신하가 그를 도와주었다. 보상해 주는 사람으로 적합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 국가의 일을 적의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이런 것으로 매우 뚜렷이 나타난 것으로는,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이 임금이 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고요(皐陶)ㆍ직(稷)ㆍ익(益)ㆍ이윤(伊尹) 등의 보좌가 있었다. 그런 다음에 옹희(雍熙)의 다스림을 이룰 수 있었으니, 하물며 근래의 세상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보상(輔相) :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불급(不及)한 것을 보충하여 돕는다는 뜻. ▶옹희(雍熙)의 다스림 : 나라 전체를 화락하게 하는 정치로 요순시대의 정치..

우리 선조들 2021.06.20

허균 3 - 학론(學論)

허균의 문집『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허균이 생전에 직접 편찬한 시문집이다. 허균의 호로는 교산(蛟山)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성소(惺所) 역시 허균의 호이다. ‘깨닫는 곳’이라는 뜻이다. 부부고(覆瓿藁)는 "장독 뚜껑을 덮는 글"이라는 뜻으로 보잘 것 없는 글이라는 겸손의 표시이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작성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전라도 함열현(咸悅縣)으로 유배를 가 있을 때인 광해군 3년과 5년 사이인 1611년부터 1613년 사이로 보고있다. 그동안 자신이 썼던 글을 시부(詩部), 부부(賦部), 문부(文部), 설부(說部) 4부로 나누어 정리했다. 허균이 직접 필사했을 때에는 8권 1책이었으나 지금은 26권 8책으로 소개되고 있다.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에는 ‘논(論)’으로 분..

우리 선조들 2021.06.16

허균 2 - 자부심

【우리 선대부의 문장과 학문과 절행(節行)은 사림(士林)에서 추중(推重)되었다. 큰 형이 경전을 전해 받았고, 문장도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작은 형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고고(高孤)해서 근래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 누님의 시는 더욱 맑으면서 씩씩하고. 높으면서 아름다워 개원(開元)ㆍ대력(大曆)시대 사람들보다 뛰어났다는 명망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어서 천신사부(薦紳士夫)가 모두 칭찬한다. 재종형(再從兄) 체씨(䙗氏)는 고문(古文)을 공부해서 시격(詩格)이 매우 높고 굳세며 부(賦)는 더욱 뛰어나서 국조 이래로 그 짝이 드물다. 나도 문(文)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문예(文藝)를 담론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참여되고, 중국 사람에게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4부자(四父子)가 함께 제고(製誥)..

우리 선조들 2021.06.13

허균 1 - 실록 사관과 찌라시 주필

어제 아침에 똥을 밟았다. 어쩌다가 실수로 이름만 조선이고 실체는 왜구인 신문의 칼럼기사를 클릭한 것이다. 얼마나 지저분한 똥인지 하루가 지난 지금도 구역질이 나서 못 견딜 지경이다. 제목이 “이제 우리도 일본에 돈 달라는 요구 그만하자.”이다. 김양호가 내린 판결에 맞장구쳐주려는 의도에서 내지른 글임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역시나 글 내용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1965년 한일 양국은 청구권 협정을 통해 ‘두 나라와 국민의 청구권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데에 합의했다. 이때 일본에서 받은 돈 5억 달러는 당시 일본 외환 보유액의 4분의 1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이 돈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마중물이 됐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일본에 대한 청구권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에 따라..

우리 선조들 2021.06.11

대한(大韓)의 신민이 어찌 원수 나라의 돈을 받겠는가.

채용신이 1910년 정읍 칠보면을 방문했을 때 만난 사람 중에는 춘우정(春雨亭) 김영상(金永相, 1836 ~ 1910)이라는 분도 있었다. 전라북도 정읍 북서쪽의 고부(古阜) 출생으로 태인(泰仁)에 거주하며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이 1910년 8월 29일 순종의 조서로서 공포된 후, 일제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 황실의 작위를 주고 은사금(恩賜金)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주기도 했다. 매국 행위에 동참한 대신과 왕족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력인사에게도 회유 차원에서 돈이 뿌려졌다. 태인(泰仁)에 있던 김영상에게도 이 은사금이 배당되었다. 김영상은 집에 은사금을 준다는 사령서(辭令書)가 오자 “유자(儒者)로서 원수의 돈을 받겠느냐.”며 자손에게 사령서를 돌려..

우리 선조들 2021.02.05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 임병찬(林炳瓚)

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그 옆에서 함께 하였던 인물이 돈헌(遯軒) 임병찬(林炳瓚)이다. 임병찬(林炳瓚, 1851 ~ 1916)은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정읍에서 거사를 준비하던 중, 최익현이 경기도 포천에서 호남으로 내려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최익현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임병찬은 최익현과 사제(師弟)의 의(義)를 맺었다. 거병할 때 임병천과 함께 최익현의 막하에 있었던 최제학(崔濟學)은 그가 남긴 유고 『습재실기(習齋實記)』에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선생님께서 종산으로 나가시어 병찬에게 묻기를 “경영코자 하는 일이 어찌 되느냐”고 하니, 병찬이 대답해 올리기를 “재정이 텅 빈데다 농사일마저 바쁘고, 군사모집 마저도 뜻대로 아니되오니 ..

우리 선조들 2021.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