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163

정조 11 - 규장각

즉위년 9월에 규장각(奎章閣) 건물 공사가 끝났다. 정조가 3월에 즉위하자마자 창덕궁의 북원(北苑)에 터를 잡아 설계를 하고 건물을 지으라는 명을 내린 결과였다. 이 당시의 규장각 건물은 위는 다락이고 아래는 툇마루 형태였다.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 유교(遺敎) 등 어제(御製)를 보존, 관리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조선의 관직 설치는 송나라 제도를 따른 것으로, 홍문관은 송나라의 집현원(集賢院)을, 예문관은 학사원(學士院)을, 춘추관은 국사원(國史院)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에서 왕들의 어제를 보관하는 용도각(龍圖閣)이나 천장각(天章閣)과 같은 제도가 조선에는 없었다. 세조 때에 일시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고, 숙종 때에 다시 실행하려 하였으나 왕의 권위를 절대화시키려는 의도로 해석한 신하들이 반대..

우리 선조들 2020.06.29

정조 10 - 정유절목

즉위한지 만 1년이 된 정조 1년 3월 21일, 정조는 이런 하교를 내린다. 【"옛날 우리 선조(宣祖)대왕께서 하교하기를,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여 기우는 데 있어 방지(旁枝)를 따지지 않는 것인데 인신이 충성을 바침에 있어 어찌 반드시 정적(正嫡)에게만 해당하겠는가?’ 하였으니, 위대한 성인(聖人)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를 설립한 규모(規模)에 있어 명분을 중히 여기고 지벌(地閥)을 숭상하여 요직(要職)은 허통(許通)시켜도 청직(淸職)은 허통시키지 않는 것으로 이미 옛사람이 작정(酌定)하여 놓은 의논이 있다. 지난해 대각(臺閣)에 통청(通淸)하게 한 것은 실로 선대왕(先大王)께서 고심(苦心)한 끝에 나온 조처였는데 그 일이 구애되는 데가 많아 도리어 유명무실한 데로 귀결되어 중도에 그..

우리 선조들 2020.06.28

정조 9 - 기득권법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는 홍길동전의 구절은 조선의 서얼차별을 상징하는 대표적 표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는 바처럼 서얼(庶孼)은 정실부인의 자식이 아닌 첩의 자식으로, 양민 출신의 첩에게서 낳은 아들인 서자(庶子), 천민 출신 첩의 아들인 얼자(孽子)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런 구별은 양반에 한해서 적용되는 것이고 양반이 아닌 경우는 그런 구별의 의미도 없다. 조선에서 서얼에 대한 논란은 관직에 진출하는 자격의 문제를 규정한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 그 핵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 초기에는 양반의 신분이 따로 없었다. 조선은 백성의 신분을 양인(良人)과 천인(賤人), 둘로만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를 실시하였다. 천인이 아닌 자는 모두 양인(良人)으로, 모든..

우리 선조들 2020.06.26

정조 8 - 흑두 봉조하

9월 26일의 《정조실록》 기사를 읽다보면 여러 가지 분위기가 느껴진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임을 예상한 듯하고, 신하들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말을 조심하고 있다. 사임을 발표하는 홍국영은 여전히 오만방자함을 보였지만 이내 다시 구차하게 상소를 올린 것은 조급합과 당황함으로 보인다. 사관은 위 기사의 사론에 【임금이 과단(果斷)을 결심하였으나 오히려 끝내 보전하려 하고 또 그 헤아리기 어려운 짓을 염려하여 밖에 선포하여 보이지 않고 조용히 함께 말하여 그 죄를 낱낱이 들어서 풍자하여 떠나게 하였다.】고 적었다. 홍국영의 사임은 그가 잘못을 저지르고도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정조가 홍국영을 따로 만나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물러나기를 권유한 결과라는 것이다. 홍국영은 비서실장인 도승지다. 물러날 생각을 했으..

우리 선조들 2020.06.23

정조 7 - 9월 26일

매월 여섯 차례 비변사(備邊司)의 도제조(都提調)와 모든 당상관, 삼사(三司)의 대표 관원이 입대(入對)하여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는 차대(次對)가 정조 3년 9월 26일 열렸다. 원래 차대는 5, 10, 15, 20, 25, 30일에 열리도록 되어있는데 전날 무신(武臣)들을 위로하기 위한 연사례(燕射禮)를 거행한 탓에 하루 늦춰진 것으로 보인다. 차대가 열리자마자 홍국영이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고 나섰다. 《정조실록》 정조 3년 9월 26일의 기사다. ▶연사례(燕射禮) : 군신 상호간에 예(禮)와 악(樂)을 배우는 의미를 담아 임금이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활 쏘는 예식. 【차대(次對)하였다.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이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신은 구구하게 아뢸 것이 있습니다. 성심(聖心)도 오늘을 기억..

우리 선조들 2020.06.23

정조 6 - 무리수 승부수

홍국영은 당쟁의 세력관계를 교묘히 활용해서 정권에 방해되는 세력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우선은 노론의 의리를 중히 여겼던 김종수, 정이환(鄭履煥) 등과 합세하여, 영조의 탕평책에 동조했던 홍인한, 정후겸, 윤양후, 홍계능 등을 사도세자에 대해 불경하고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죄를 물어 쳐냈고, 이후 정순왕후의 친동생인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와해시켰다.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집안도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어려운 지경에 몰아넣었다. 물론 이는 홍국영의 단독 행보가 아니라 척신 세력을 배격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의 ‘정조의 뜻’은 거의 홍국영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정조 주변의 척신 세력들을 정리하고 난 홍국영은 정조의 후계에 주..

우리 선조들 2020.06.21

정조 5 - 선정의 현손

정조가 즉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몇 건의 상소가 연속으로 올라왔다. 모두 임오년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는 정조를 격발하여,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 지목된 노론 인사들을 치죄함으로써 노론을 공격하려는 소론의 공세였다. 그러나 정조는 상소를 올린 것과 관련된 인물들을 친국하면서, 【선대왕의 하교에서 이르시기를, ‘임오년에 관계된 일은 혹 의리에 있어 충분히 옳은 것 같다 하더라도 이는 곧 나를 모함하는 것으로서, 단지 나에게만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또한 너에게도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 앞날에 이 일에 대해 간범(干犯)하는 자는 빈전(殯殿) 뜰에서라도 반드시 준엄하게 국문해야 하고, 비록 성복(成服) 이전이라 하더라도 왕법으로 처단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오늘 친히 국문을..

우리 선조들 2020.06.19

정조 4 - 일인지하

만 7년. 정조와 홍국영(洪國榮)이 함께 한 기간이었다. 정확히 영조 48년인 1772년 9월 26일에 만나 정조 3년인 1779년 9월 26일에 헤어졌다. 홍국영은 정조보다 나이가 4살 위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정조는 21세, 홍국영은 25세였다. 홍국영은 1771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1772년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정조를 만나게 된다. 홍국영은 과거에 급제하기는 했지만 그 성적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갑과 3인 을과 7인 뒤의 병과 23인 중 11위였으니 홍국영의 성적은 과거에 급제한 전체 33인 중 21위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세손 신분이었던 정조의 측근 자리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안을 감안한 영조의 배려였을 가능성이 높다. ▶부정자(副..

우리 선조들 2020.06.17

정조 3 - 군사(君師)

정조는 공부하지 않는 신하들을 꾸짖었다. “모래나 자갈땅이라도 가난한 백성들은 지어 먹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여 농사짓는다. 하물며 좋은 밭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매번 그대들이 일없이 한가하게 노는 것을 보면 애석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대들은 나이가 젊고 재주도 그리 노둔하지는 않으니, 조금만 노력을 기울인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은 게으른 농사꾼이 좋은 밭을 버려두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수확하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되겠는가.” 정조는 경연에서 신하들을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균관 유생들의 추시(秋試), 초계문신의 친시(親試), 그리고 문신들을 대상으로 한 제술(製述)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험문제를 직접 출제하였다. “공령(功令)이나 응제(應製)..

우리 선조들 2020.06.12

정조 2 - 피곤한 왕

관물헌이 더워 정조의 몸이 손상될까 염려할 정도였으면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신하들의 고역은 어떠했을까! 정조는 그들에게 피서법을 알려준다.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책을 읽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책을 읽으면 몸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마음에 주재(主宰)가 있어서 외기(外氣)가 자연히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지금도 직장생활에 잘난 상사 만나면 피곤하다. 정조를 모시던 신하들도 많이 피곤했을 듯싶다. 경연(經筵)은 ‘경전(經典)을 공부하는 자리’란 의미이다. 유학에 대한 학문이 깊은 신하들이 왕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며 왕을 학문으로 인도하는 자리다. 물론 일방적 강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토론도 이루어지지만 강의의 주체는 신하이고 임금은 주로 그것을 듣는 것이 일반적 형태다. 경연의 종류..

우리 선조들 2020.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