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32 - 추사체 성립론
유홍준 박사는 추사체가 단순히 추사의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보고, 추사체가 어떤 배경에서 출발하여
어떤 변천과정을 거쳐 어떻게 완성되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다가 추사와 동시대에 살았던 박규수가
당대의 안목으로 추사를 논한 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을 길잡이로 하여「완당평전」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박규수(朴珪壽. 1807 ~ 1876)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셔먼호사건1 때 평양감사를 지냈고 개화파의 선구이며
그 자신 명필이었다. 박규수는 추사체의 본질과 특징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였다.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 스물 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와 미불(米芾)을 따르고 이북해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蒼鬱勁健)해지더니
......드디어는 구양순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었고 .....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하며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다만 문장가들만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완당의 글씨를) 혹 호방하고 제멋대로 방자하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오히려 근엄의 극치임을 모르더라. 그래서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