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문인화 7

從心所欲 2018. 10. 2. 08:09

 

[겸재 정선 「양천십경첩」中 <설평기려(雪坪騎驢)> 그림 23 x 29.2cm, 간송미술관]

 

정선의 그림 중에도 '심매(尋梅)'의 사의가 나타나는 그림이 제법 많다.

<설평기려>는 정선'이 양천(陽川) 현령(縣令)으로 재임하던 때에 친구 이병연(李秉淵)과 시(詩)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을 위해 그렸던 양천십경(陽川十景)을 비롯하여 한강과 남한강변의 명승지를 그린 그림들을

수록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들어있는 그림이다. 예전의 양천(陽川)은 지금의 강서구, 양천구와

영등포구의 양화동 일대를 포함하는 고을로, 관아는 강서구 가양동지역이었다. 멀리 우뚝하니 솟은 산은

지금의 강서구 화곡동 우장산이다. 그림 옆의 제시는 ‘높은 두 봉우리 긴 자락 끝은  아득한 십리 벌판일세. 다만

거기 새벽 눈 깊을 뿐, 매화 핀 곳 알지 못하네(長了峻雙峰 漫漫十渚 祗應曉雪深 不識梅花處)’라는 시가

달려있다. 이병연의 시이다. 비록 산수화로 그려졌지만 ‘심매’와 전혀 상관없는 그림은 아닌 셈이다.

어느 날 아침 눈 덮인 우장산 풍경을 보고 ‘심매’의 사의를 빌어 그렸을 이 그림에 대해 정선은 꽤나 만족했던

것 같다. 똑 같은 그림이 순천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양천십경첩」에 하나 더 있다. 두 그림의 차이는

인장의 크기와 위치, 그리고 그림의 크기로 순천대 박물관 소장 그림이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보다 작다.

 

[겸재 정선 <설평기려(雪坪騎驢)> 18.5 x 25.8cm, 순천대 박물관]

 

'설평기려'라는 글귀의 유무와 인장의 위치, 크기의 차이는 제시가 달린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에서의 그림

중심과 안정감을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정선 <파교설후(灞橋雪後)> 지본수묵 52.2 x 35.9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 <기려심매도>]

 

[정선 <건려방매(蹇驢訪梅)]

 

이 그림은 <건려방매>라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실상 그림은 매화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절뚝발이

나귀’라는 뜻의 건려(蹇驢)는 방매(訪梅)보다는 시(詩)와 더 연관성이 높은 단어이다.

정선 그림에는 '심매(尋梅)'와의 연관성은 없어도 나귀 탄 인물그림이 많다.

 

[독일에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謙齋鄭敾畵帖)' 中 <기려심춘(騎驢尋春)>]

 

[정선 <기려도>, 지본담채 32 x 23.5cm]

 

정선뿐만이 아니다. 옛 그림에는 나귀 탄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왜 하필 나귀일까?

<개자원화전>의 점경인물 그리는 법에는 이런 그림이 있다.

 

 

그림에 붙은 글귀는 ‘시상(詩想)은 파교 위 나귀의 등 위에 있다(詩思在灞橋驢子背上)’이다.

이 구절은『북몽쇄언(北夢瑣言)』에 실린 고사(古事)에서 유래한다. 『북몽쇄언』은 송나라  손광헌(孫光憲)이

당대(唐代)의 풍속과 문인들의 일화를 수록한 것인데 여기에 당 나라 대신이자 시인이었던 정계(鄭繫, 미상 ~

899년 추정)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어느 사람이 근래에 시를 지은 것이 있느냐고 묻자, 정계는 ‘시는 파교(灞橋)에 바람 불고 눈 올 때 나귀 타고 가는 사람에게나 있지(詩思在灞橋風雪中驢背上), 이렇게 편한 정승된 사람에게는 시가 없는 법이라.’ 고 답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거나 나귀를 타고 가는 행위는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행위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남송 육유(1125 ~ 1210)의 칠언율시 <동청일득한유우작(冬晴日得閑遊偶作)>에도 ‘시는 긴 다리위의 절뚝이는 나귀 등위에 있다(詩思長橋蹇驢上)는 구절이 있어 많이 인용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선비가 나귀를 타고가는 것은 시상에 빠져있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래의 나귀 위에서 조는 듯한 선비 역시 마찬가지다.

 

[김명국, <기려도(騎驢圖)>, 종이에 수묵, 29.3cm x 24.6cm, 개인소장]

 

[함윤덕, <기려도(騎驢圖)>,  견본담채, 15.6cm x 19.2cm, 국립중앙박물관]

 

아래는 정선의 ‘나귀를 타고 나그네가 되어 돌아다닌다.’ 는 <기려행려(騎驢行旅)>라는 그림이다.

 

[정선 <기려행려(騎驢行旅)>]

 

제시로 적혀있는 ‘客子光隂詩巻裏杏花消息雨聲中’은 송(宋)의 유명시인 진여의(陳與義, 1096-1138)가 지은

「회천경지로인방지(懷天經智老因訪之)」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진여의가 천경과 지로라는 가까운 친구들이

갑자기 생각나 이들을 찾아가면서 지었다는 시이다. 그 뜻은 “나그네의 빠른 시간은 시권 속에 있고 살구꽃 피는

소식 봄비 소리 섞여 들리네”이다. 이 시 구절로 인하여 진여의는 시인으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김홍도의 <기려행려>에도 같은 시구가 화제로 올려져 있다.

 

[김홍도 <기려행려>, 지본담채 22.0 x 25.8cm 간송미술관]

 

아래는 정선의 또 다른 <기려행려>이다.

 

[정선 <기려행려>, 지본수묵, 24.0 x 16.2cm]

 

 

 

이 글은 한시어사전(국학자료원), 한국 미의 재발견-회화(솔출판사), [최열 그림읽기], [윤철규의 한국미술

명작선](한국미술정보개발원) ,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한국인문고전연구소),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두산백과 등의 관련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