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 1

從心所欲 2019. 1. 13. 18:40

 

금강산을 부르는 이름은 10개가 넘는다. 우리나라 산 중에 이처럼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산은 없을 것이다.

계절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새싹이 트는 봄은 금강산이었다가 여름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이 되고, 단풍이 온 산을 붉게 물드는 가을에는풍악산(楓嶽山). 차가운 암봉

(巖峰)들이 뼈다귀처럼 우뚝 서서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장관을 이루는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 된다.

이처럼 철에 따라 다르게 부르게 된 것은 19세기경에 이르러서이다.

삼국시대에는 그저 ‘풍악’이라고 불리다가 통일신라와 발해 때는 상악(霜岳)으로, 16세기에는 신선 사상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인 봉래(蓬萊), 또는 그저 신선이 사는 산이라는 의미의 선산(仙山)으로도

불렸다 한다. 금강(金剛)은 불교경전「화엄경」에서 빌려온 이름이고, 열반산(涅槃山), 중향성(衆香城),

기달산(怾怛山) 등도 불교에 연원을 둔 이름들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 ~ 1759)은 이 금강산을 대표하는 화가라 할 만큼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다.

정선은 36세 때인 1711년 처음 금강산을 방문하여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岳圖帖)》을 남겼고 1712년과

1747년에 또 다시 금강산을 방문하여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남겼다. 1712년의 금강산 여행은 금강산

입구 마을인 금화현감으로 있던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 ~ 1751)의 초대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정선과 이병연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 ~ 1722)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인연을 시작으로 평생

지기로 지낸 사이다. 정선은 이때 금강산 그림 21폭을 그려 이병연에게 선물하였다. 스승 김창흡이 이 그림에

제화시를 썼고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화첩이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알려지게 되면서 정선의 화명이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당시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천거하여

정선은 음직으로나마 벼슬길에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화첩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정선의 금강산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금강전도(金剛全圖)>일 것이다. 국보 제217호로 지정된 작품으로

정선이 59세 때인 1734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故 오주석은 이 <금강전도>를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한데 묶은, 참으로 위대한 조형인 동시에 그 안에 지극한 철리(哲理)를 담고 있는. 세상에 유례가 없는 심오한

걸작”이라고 극찬했다.

 

[정선 <금강전도(金剛全圖)>, 지본담채, 130.6×94.1㎝, 삼성리움미술관]

 

 

오주석은 <금강전도>가 구도자체만으로도 「주역(周易)」의 근본이치를 상징하고 그림 속에는 음양과

오행이 들어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오주석이 본 <금강전도>의 구조]

 

 

“<금강전도>는 원이고 ‘음양의 두 거동’을 갖춘 태극이다. 금강산 전체는 맨 위쪽 비로봉②에서부터 저 아래

장안사 앞 무지개다리 비홍교③에 이르기까지 꽁꽁 묶여서 한 떨기 연꽃 송이를 이루었다. 이러한 동그라미를

그리기 위해 작가는 우하(右下)와 좌하(左下) 구석을 슬그머니 지우고 아지랑이를 깔았다. 정중앙에 금강산

모든 골짝 물이 하나로 합수(合水)져 내려오는 만폭동①이 보인다. 이 만폭동에서 왼편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흙산⑥들이 보이니 빼곡한 침엽수가 엄동(嚴冬)에도 푸르름을 자랑하고, 오른편으론 깎아지른

화강암봉④들이 늘어서서 희고도 장엄하게 솟아 있다. 검은 흙산과 흰 돌산의 대조는 다만 조형적인 것만이

아니다. 토산(土山)과 골산(骨山)의 대비란 곧 음양(陰陽)의 조화인데.....(중략)...,,,,만폭동은 금강산의 배꼽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너럭바위로 온 산의 물줄기를 한데 모아 아래로 흘려보낸다. 큰 바위는 오행(五行)의

중앙 토(土)다. 물길은 아래로 흐르면서 점차 커져서 장안사 비홍교에 이르러 큰 물, 즉 수(水)를 이루었다.

이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6시에서 2시 방향의 봉우리를 보라. 마치 불길이 번져 나가듯 크게 휘어져 있다.

이것은 화(火)다. 한편 정상부근에 창검인양 줄지어선 중향성 봉우리는 금(金)을 상징한다. 그 왼편 소나무,

잣나무 숲이 목(木)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금강전도>에는 오행까지 갖추어져 있다. 다만 구성이 상생(相生)

아니라 상극(相剋)이다.”

 

[오행상극도]

 

 

<금강전도>의 오른쪽 상단에 있는 제시(題詩)는 글자의 배열이 특이하다. 오른쪽부터 10→7→4→4→2→1

→2→4→4→7→11자로 정연하게 줄어들어 한 글자가 되었다가 다시 늘어나는 형상을 보인다. 또한 시계의

반대 방향으로 쓴 갑인동제(甲寅冬題: 갑인년 겨울에 적다)라는 기년명(紀年銘)도 예사롭지 않다.

<금강전도>의 제시(題詩) 내용은 이렇다.

 

萬二千峯皆骨山

일만 이천 봉 개골산을

何人用意寫眞顔

뉘라서 뜻을 써 그 참모습을 그려내랴

衆香浮動扶桑外

뭇 향기는 동해 끝의 해 돋는 나무까지 떠 날리고

積氣雄蟠世界間

쌓인 기운 웅혼하게 온 누리에 서렸구나.

幾朶芙蓉揚素彩

암봉은 몇 송이 연꽃인양 흰 빛을 드날리고

半林松栢隱玄關

반쪽 숲엔 송백이 현묘한 도의 문을 가렸어라

縱令脚踏須今遍

설령 내 발로 직접 밟으며 두루 다닌다 한들

爭似枕邊看不慳

그 어찌 머리맡에 두고 실컷 보는 것에 비기랴.

 

오주석은 이 또한「주역」의 괘(卦)를 통한 해석으로 그 의미를 밝혀내면서 ‘제시가 정선이 쓴 것이 아니라

후세에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는 항간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정선은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주역해설서를 남길 정도로 「주역」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정선이

세상을 떴을 때 30년 지기이자 이웃사촌이었던 관아재 조영석은 애사(哀詞)를 지어 그의 일생을 평하면서

정선이 그림뿐만 아니라 경학에도 뛰어났다고 했다. 중용과 대학을 논할 때 처음과 끝을 꿰뚫는 것이 마치

자기 말하듯 하였고, 만년에는 주역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힘써 손수 뽑아 베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역」을 동원한 오주석의 길고도 난해한 해설에 동의를 하든 안 하든, 그 내용을 이해하든 못 하든, 정선의

<금강전도>가 대단한 그림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라도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신비함과 장엄함이 그림에 담겨 있다. 전체적인 구도와 화면 구성도 빼어나지만 금강산 각

봉우리들의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낸 세부 묘사도 치밀하다. 정선 당시의 사람들은 이 파격과 특이함에 얼마나

놀라고 감탄했을까!

 

조선성리학을 이념기반으로 하여 조선고유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는 시기를 ‘진경시대’라고 할 때 정선은

그림에서 이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독창적인

회화미로 표현해냈다. 그래서 지금 정선을 말할 때면 흔히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금강전도>는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다. 그렇다고 <금강전도>가 내금강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낸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진경(眞景)이라는 말은 실경(實景)을 사진 찍듯이 그대로 옮겨냈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은거했던 곳의 산수를 실제로 사생하여, 송(宋) 이후의 산수화풍의 기초를 닦은 중국의 형호(荊浩)는

‘사(似)란 물(物)의 형태만을 얻어서 그 기(氣)를 잃어버린 것을 말하며, 진(眞)이란 기와 질(質)을 아울러

갖춘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대상의 겉모습만을 묘사한 형사(形似)의 그림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는

신사(神似)의 그림이 진경(眞景)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경산수화는 진짜(眞)로 있는 경치(景)를 그렸다는

의미도 있고 실제 있는 경치를 그 정신까지 묘사해냈다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진경문화를 선도했던 김창흡과 김창협 형제는 실제 산수보다 더 아름다운 산수를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산수와 산수화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산수화는 실제 산수가 가질 수 없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으며, 이러한 아름다움을 산수화의 ‘환(幻)’이라 불렀다. 그래서 김창협, 김창흡 형제의 문인이었던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대상이 되는 자연의 기이함을 강조함으로써 ‘환(幻)‘을 실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인 백인산은 이를 좀 더 쉽게 설명하였다.

 

“겸재의 후배 문인이었던 정지순(1723 ~ 1795)은 겸재의 그림에 대해 "실재(實在) 경치를 그리되 눈에 의지해

그리지 않고, 마음으로 이해하고 깨달아 그렸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겸재 진경산수화의 요체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것은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다. 우리 머릿속에 입력된 형상들은

대체로 그것을 본 당시의 분위기나 느낌과 어우러지면서 변형되고 단순화되는 경향이 강하다. 겸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겸재는 산수가 지닌 구체적 형상과 그것을 봤을 때의 느낌과 정취를 교묘하게 결합시켰다.

겸재의 그림이 실재보다 더 강력한 실재감을 주는 까닭이다.”1

 

이러한 설명들은 정선의 그림과 실제 경치를 비교해 보면 그 의미를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화적연(禾積淵)은

경기도 포천에, 삼부연(三釜淵)은 강원도 철원에 있는 명승지로 정선의 《해악전신첩》에는 이곳들을 그린

그림들이 있다.

 

[정선 《해악전신첩》中 <화적연>, 1747년, 견본담채, 32.2 x 25.0cm, 간송미술관]

 

 

[화적연, 이승희 사진]

 

 

[정선 《해악전신첩》中 <삼부연>, 1747년, 견본담채, 31.4 x 24.2cm, 간송미술관]

 

 

[삼부연폭포, chegnow님 블로그 사진]

 

 

<화적연>에서는 바위를 실제보다 훨씬 과장해서 크게 그렸고 강변의 산세도 절벽처럼 우뚝 세웠다.  

또한 <삼부연>에서는 폭포가 떨어지는 뒤쪽의 산을 아예 그리지 않았다. 만일 <화적연>의 바위를 실제 크기로

계곡에 묻힌 모양으로 그리고 옆의 산세 또한 완만하게 그렸다면 바위의 그 기이함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삼부연>의 폭포 위 뒤쪽에 있는 산을 그대로 그렸다면 20m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장대하고

상쾌한 정취가 그림에 살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금강전도>도 마찬가지다. 금강내산이 이렇게 보이는 곳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선은

눈에 보이는 대로 금강산을 화폭에 옮겨 낸 것이 아니라 내금강의 모습을 자신의 구상에 따라 재구성하여

<금강전도>를 그린 것이다. 

산수화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원망취세(遠望取勢) 근간취질(近看取質)'해야 한다고 하였다. '멀리서 보아 세를 취하고 가까이 살펴 본질을 취한다'는 뜻이다. 정선은 독창적인 구성을 통해 내금강의 전체적인 모습과 명승들의 세세한 자태를 그려냈다. 그래서 금강산의 자태와 기세가 이 한 그림에서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 :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오주석, 2003, 솔출판사), 간송미술36 - 회화(백인산, 2014. 컬처그라퍼),

테마로 보는 미술(한국학중앙연구원)

 

  1. 간송미술36 - 회화(백인산, 2014. 컬처그라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