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선 장동팔경첩1

從心所欲 2019. 7. 30. 11:17

장동(壯洞)은 현재의 종로구 통의동, 효자동, 청운동 일대를 일컫던 옛 지명이다. 예전 이 지역은 숲이 우거진

바위산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흘렀던 도성 장안의 명승지였다. 정선은 이곳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살았다.

현재 전하는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간송미술관 소장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취미대, 대은암, 독락정, 청송당, 창의문, 백운동, 청휘각, 청풍계를 담은 8점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선이 나이 70세쯤 되는 1745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선, 「장동팔경첩」<취미대(翠微臺)> 지본담채 33.0 x 29.5cm 국립중앙박물관]

 

 

취미대(翠微臺)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는데 같은 제목으로 그려진 다른 그림들을

종합해볼 때 백악산 남쪽 자락에 있던 한 바위를 일컫는 듯하다.

 

[정선 <취미대(翠微臺)> 지본담채 30 x 22.5cm 개인 소장]

 

 

정선이 그린 또 다른 <취미대> 그림에서 두 선비가 앉아있는 바위가 취미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림 속

풍경이 「경교명승첩」의 <은암동록(隱岩東麓)>과 거의 똑같다.

 

[정선 「경교명승첩」<은암동록(隱岩東麓) >]

 

 

두 그림에서 회맹단(會盟壇)1의 위치를 기준으로 비교해보면 <은암동록>은 취미대에서 본 시선이 아닐까

싶다.  이 그림들은 모두 백악산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반면「장동팔경첩」의 <취미대(翠微臺)>는

회맹단의 서쪽에서 동북쪽을 바라본 시선으로 보인다.

 

 

[정선, 「장동팔경첩」<대은암(大隱岩)> 지본담채 33.0 x 29.5cm 국립중앙박물관]

 

 

지정(止亭) 남곤(南袞, 1471 ~ 1527)이 중종 때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집을 짓고 살면서 대은암이라는

바위 이름이 생겨났다. 같은 시대의 인물로 남곤과도 교류가 있었던 어숙권이 쓴『패관잡기(稗官雜記)』에

대은암(大隱岩) 바위 이름에 대한 내력이 실려 있다.

 

지정(止亭)이 백악산 기슭에 집을 지으니 그 북쪽 동산은 천석(泉石)의 빼어남이 있었다. 박취헌(翠軒)2

늘 이용재(李容齋)3와 더불어 술을 가지고 놀았는데, 지정은 승지(承旨)로 새벽에 들어가서 밤에 돌아오므로

더불어 놀 수 없었다. 이에 취헌이 장난으로 그 바위를 대은(大隱)이라 하고 그 시내[瀨]를 만리(萬里)라 했다.

대개 그 바위가 주인을 알아주는바 되지못하니 그런 까닭으로 대은이 되는 것이며 시내는 만 리 밖 멀리 있는 것

같다 해서 그렇게 일컬었다.

 

박은과 이행이라는 인물들이 종종 술을 들고 남곤의 집을 찾았는데 당시 남곤은 승지 벼슬을 지내고 있었기에

새벽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와 만나서 함께 즐길 수가 없게 되자, 이에 박은이 만날 수 없는 남곤을 빗대어 집

뒤에 있는 바위 이름을 ‘크게 숨었다’는 의미의 대은(大隱)암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이곳 대은암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던 김창흡의 증조부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이 대은암에 대하여

지은 시가 있다.

 

한번 겹쳐 돈 바위가, 푸른 절벽 에워싸고. 맑은 시내 돌을 쳐서 슬픈 옥이 우는 구나. 
동천(洞天) 속은 적막하여 사람 자취 드물거니 솔 그늘에 진 그림자 푸른 이끼 빛이구나. 
술 흥에다 시의 정이 좋은 경치 만났거니 외로운 구름 저녁 새와 함께 돌아오는구나. 
나의 집과 물을 격해 동쪽 서쪽 있거니와 어느 날에 돌아가서 다시 찾아보려는가.

 

남곤은 김종직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등 신진

사림파를 숙청하는 일에 가담했다. 그 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까지 올랐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나, 사화를 일으킨 전과로 인하여 양천에 소요정을 지었던 심정과 함께 후대 사림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정선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림 속 집에서는 서포(西圃) 신치복(辛致復·1680 ∼ 1754)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6대째 그 집에 살고 있었다고 하니 역시나 대대로 그 동네에 살았던 정선과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였을 것이다.

 

[정선, 「장동팔경첩」<독락정(獨樂亭)> 지본담채 33.0 x 29.5cm 국립중앙박물관]

 

 

독락정은 계곡 위에 지어진 초당(草堂)이다. 1770년경의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를 보면 육상궁 위에 위치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의 경복고등학교 길 건너편 즈음으로 추정된다. 독락정 바로 아래에 청송당이 있었다.

 

[[『한양도성도(漢陽都城圖)』부분]

 

 

[정선, 「장동팔경첩」<청송당(聽松堂)> 지본담채 33.0 x 29.5cm 국립중앙박물관]

 

 

청송당(聽松堂)은 조광조의 제자였던 대학자 청송(聽松)·성수침(成守琛, 493 ~ 1564)이 은거하며 공부했던

독서당의 이름이다. 성수침은 우계 성혼의 아버지이다. 성수침은 중종 21년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들이 사약을 받고 화를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독서에 전념하기 위하여 집 뒤에 ‘솔바람

소리를 듣는다’는 청송당을 지었다. 북악산 자락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호젓하게 자리 잡은 청송당의 개울

건너는 인왕산 줄기로 살림집이 있던 곳이다. 순조때까지만해도 청송당 주변은 온갖 꽃이 만발하여 도화동

(桃花洞)이라 불렸으며 봄놀이 장소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한다.

 

[정선, 「장동팔경첩」<창의문(彰義門)> 지본담채 33.0 x 29.5cm 국립중앙박물관]

 

 

창의문은 한양 도성 4소문 중에서 서북문으로 자하문으로도 불린다. 예전에는 이 문을 나서 홍제천을 따라가면

홍제동, 홍은동, 녹번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어 개성 이북의 황해도와 평안도를 내왕하는 지름길로 삼았었다.

이 문은 한양 도성이 완성되는 태조 5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문루는 원래 없다가 영조

17년인 1741년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지금은 창의문으로 오르는 도로 왼편이 담으로 막혀있고 그 아래로는 청운중학교와 빌라, 주택이 잔뜩 들어서

사람 사는 동네로 바뀌었지만 정선 당시에는 이곳에 집 한 채 없었던 모양이다. 작고 큰 바위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는 사이로 솔숲이 있고 골짜기마다 개울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한적하고 그윽한 느낌이 절로 드는 풍경이다.

창의문 너머로 보이는 검은 색 바위는 인왕산의 맨 북쪽 봉우리인 벽련봉(碧蓮峯)이다.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백색 암봉(岩峯)이지만 정선은 검게 그렸다. 그림의 벽련봉 왼쪽 능선 위에 콩알만 하게 바위

하나가 올려져있다. 바위 이름이 부침바위이다. 지금도 있지만 정선의 그림과는 달리 나무에 가려서 멀리서는

안 보이고 가까이 가야만 확인할 수 있다. 벽련봉 아래 동네의 부암동(付岩洞)이라는 이름은 이 부침바위에서 나왔다고 한다.

 

[정선, 「장동팔경첩」<백운동(白雲洞)> 지본담채 33.0 x 29.5cm 국립중앙박물관]

 

 

백운동은 인왕산의 세 봉우리 중 낙월봉(落月峯) 줄기가 흘러내려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곳으로 계곡이 깊고

개울물이 풍부하며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도성 안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로 손꼽혔다. 지금 이곳을

부르는 청운동(淸雲洞)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가 동명을 지으면서 아래 동네인 청풍계와 백운동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그림의 골짜기 안에 보이는 큰 집은 원래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형부로 부귀를 누렸던 지중추부사

이념의(李念義·1409∼1492)가 짓고 살았던 저택이다. 얼마나 굉장한 대저택이었던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로 세월이 지나면서 주인이 바뀌었지만 순조와 고종 때의 기록에도 여전히

등장했던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조선말까지는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정선, 「장동팔경첩」<청휘각(晴暉閣)> 지본담채 33.0 x 29.5cm 국립중앙박물관]

 

 

청휘각은 17세기 말 영의정을 지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 집 후원에 세운 정자다.

김수항은 할아버지인 청음(淸陰) 김상헌이 살던 궁정동에서 출생하여 살다가, 벼슬이 높아지면서 안국동과

옥류동에 저택을 마련했다. 옥류동 저택의 사랑채가 육청헌(六靑軒)이고, 후원의 정자가 청휘각(晴暉閣)이다.

김수항의 둘째 아들인 농암(農岩) 김창협이 육청헌 뒤 석벽에서 감천이 흘러나온다고 하여 이곳을 옥류동이라

이름 지었고. ‘비갠 뒤 (맑은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집’이란 뜻의 청휘각(晴暉閣)이란 이름도 그의 뜻이

담겼다고 한다.

정선의 스승 집에 있던 정자라 정선도 수시로 출입하였던 곳이었을 터이니, 70줄의 정선이 옛날을 추억하며

그렸을 것이다.

 

[정선, 「장동팔경첩」<청풍계(淸風溪)> 지본담채 33.0 x 29.5cm 국립중앙박물관]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일대의 골짜기로 백운동 아래편에 있다. 원래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푸른 단풍나무가 있는 계곡이라는 의미의 ‘청풍계(靑楓溪)’라고 불렸던 곳이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절했던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 ∼ 1637)이 별장으로 꾸미면서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을

의미하는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 한다.

19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측되는 작자 미상의 인문 지리지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청풍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한다.

 

청풍계는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그 골 안이 깊고 그윽하며 경관이 아늑하고 아름다워서 놀며 즐길 만하다. 
집 안에 태고정과 늠연당이 있어 선원의 초상화를 모셨다. 후손들이 근처에 살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창의동 김씨라 한다. 시냇물 위 바위에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 百世淸風)' 여덟 자가 새겨져 있다.

 

 

그림 가운데 기와집 뒤의 절벽이 大明日月 百世淸風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청풍대이다. 大明日月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고 百世淸風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긴 것이라 하는데 현재는 百世淸風 글자만 남아있다.

청풍대 밑 기와집이 김상용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을 늠연당(凜然堂)이고 왼쪽의 초당이 태고정(太古亭)이며,

오른쪽 기와 건물은 연못가에 세운 누각인 청풍지각(靑風池閣)이다.

정선의 청풍계 그림은 여럿이 있다. 이 그림 말고도 간송미술관소장본 「장동팔경첩」에도 있고 낱개 그림으로

고려대소장본과 간송미술관소장본이 더 있다.

 

 

참조 : 미술백과(간송미술문화재단), 한국미술산책(송희경, 2012)],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회맹단은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공신을 녹훈한 뒤에 왕실에 충성을 다짐하고 서로 간의 의리를 지킬 것을 맹서하는 ‘공신회맹(功臣會盟)’의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본문으로]
  2. 취헌은 박은(朴誾)의 호 [본문으로]
  3. 용재는 이행(李荇)의 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