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연암 박지원 10 -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從心所欲 2019. 11. 17. 07:40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박지원이 쓴 아홉 편의 전(傳)이 실려 있는 한문 단편소설집이다.

『연암집』 8권 별집(別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맨 앞에 자서(自序)가 있고 이어서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양반전(兩班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의 순서로 실려 있다. 이 중 역학대도전과

봉산학자전은 유실되어 목록만 있고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아들 박종채는 「방경각외전」에 대하여 「과정록」에 이렇게 적었다.

 

세상의 벗 사귐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좇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세태가

꼴불견이었는데,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이런 세태를 미워하셨다. 그래서 아홉 편의 전(傳)을 지어 세태를

풍자하셨는데, 그 속에는 항상 우스갯소리가 들어 있다.

(중략)

이 아홉 편의 전은 모두 스무 살 남짓 때 지으신 것이다. 이 중 마지막 두 편은 잃어버리고 지금 일곱 편만

남았다. 일곱 편 가운데 <예덕선생전>, <광문자전>, <양반전>, 이 세 작품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 전(傳)은 그 체제가 자못 장난삼아 지은 것처럼 보이므로, 식견이 없는 자는 우스갯소리로 지은 글로만 알고,

식견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서 나는 이 글들에 대해 지계공1께 여쭈어본 적이 있다.

공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 당시 선비인 체하면서 권세와 이익을 구하는 자가 있었는데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둑놈전(역학대도전)>은

그 자를 풍자하기 위해 지으신 것이야. 후에 그 자가 죽자 네 아버지는, ‘저 옛날 소순(蘇洵)2이 간사한 자를

비판하는 글을 지어 명성을 얻은 적이 있지만 내가 다시 그런 명성을 얻을 필요는 없지.’ 라고 하시고는 마침내

그 글을 불태워버렸다. <봉산학자잔>이 없어진 것도 아마 이때가 아닌가 싶어.

또 <예덕선생전>, <광문자전>, <양반전> 등 세 작품은 네 아버지가 젊을 적에 심심파적으로 지으신 것이니,

그걸 갖고 왈가왈부할 건 없지. 하지만 그 각각은 본뜨고 모범으로 삼은 대상이 있으니, 이를테면 <양반전>은

<동약(僮約)>3을 본받아 지은 것이야. 게다가 이들 아홉 편의 전에는 모두 자서(自序)가 붙어 있는바,

연유가 있어 이들 작품을 창작했음을 분명히 밝혀놓고 있지.“

나는 지계공의 이 말씀을 삼가 기록하여 감히 잊지 않으려고 한다. 아아, 지으신 뜻을 공구하지 못하고 다만

장난삼아 지은 글로만 읽는다면 이 어찌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사실을 마음 아프게 여긴다.

 

 

지계공은 아버지에 대해 이런 말씀도 해주셨다.

“네 아버지는 스무 살 남짓해서 불면증으로 시달린 적이 있으셨다. 밤낮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는 날이 혹

사나흘씩이나 계속된 적도 있는데, 보는 사람들이 몹시 걱정했다. 아홉 편의 전을 지으신 게 아마 그때였을 텐데,

무료함을 잊고 병을 이기기 위해서였을 게다.”

 

『연암집』속「방경각외전」말미에도 아들 종간(宗侃)4의 이름으로 작품에 관련된 사실을 간략히 적어 놓은 글이 있다.

 

이상 아홉 편의 전은 다 부친께서 약관 시절에 지은 것으로서, 집에 장본(藏本)이 없어 매번 남들에게서 얻어 왔다.

예전에 부친께서 이들 작품을 없애 버리라고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가 젊었을 적에 작가에 뜻을 두어

작문하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 지은 것인데, 지금까지도 더러 이 작품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하셨다.

불초한 우리 형제가 비록 부친의 명을 받들고는 싶지만, 사람들이 전파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난번에 이러한 일로 외숙 지계공에게 상의를 드렸더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선친께서 지은 논설 중에는 전아(典雅)하고 장중(莊重)한 것이 많다. 반면에 이 작품들은 사실 저술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니 있건 없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더구나 젊었을 때의 작품이니만큼 더욱 그렇다. 게다가 예로부터

문장가들에게는 이와 같이 유희 삼아 지어보는 작품이 없지 않았으니, 반드시 폐기할 것까지는 없다. 다만 <양반전>

한 편은 속된 말이 많아서 조그마한 흠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실로 왕포(王褒)의 <동약(僮約)>을 모방하여 지은

것인 만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였으므로, 불초한 우리 형제가 감히 함부로 취사(取捨)를 할 수 없어

별집(別集)의 말미에 둔다.

 

 

박지원은 나이 17 ~18세 때 이미 오랜 병으로 몸이 지쳐 있었다고 했다. 불면증 외에 우울증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의 병은 20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어, 처음에는 주위에서 동정어린 눈길로 보던 이들도 나중에는 그를 미쳤다고

하며 꺼리거나 피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박지원은 스스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 사람들을 청해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와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박지원은 세상의 인정과 세태를 피지배층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여기에서 소재를 얻어 「방경각외전」에 실린 작품들을 쓰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당대 생존했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바탕으로 했다는 의미가 있고, 우리 고유의 지명,

속담, 속어 등을 반영하여 우리 고유의 문학성을 한층 더 끌어올린 작품들이라는 점에서도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소설집 이름인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찾지 못했다. 외전(外傳)은 ‘본전(本傳)에 빠진

부분을 따로 적은 전기’나 ‘정사(正史) 이외의 전기’라는 의미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으로 미루어 수긍이

가지만, 방경각(放璚閣)의 의미는 오리무중이다. 경(璚)은 ‘구슬 경’으로 구슬이나 옥(玉)을 뜻한다고 하니

방경(放璚)은 구슬을 내놓다, 방출하다의 뜻이다.

 

유실된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의 자서(自序)는 이렇다.

 

세상이 말세로 떨어져

허위만을 숭상하고 꾸미니

시를 읊으면서 무덤을 도굴하는5

위선자요 사이비 군자라네

은자인 체하며 빠른 출세를 노리는 것6

예로부터 추하게 여긴바

이에 역학대도전7을 짓는다.

 

<역학대도전>의 본문이 없는 대신 「방경각외전」에는 박지원의 아들 종간이 외삼촌인 이재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외숙 지계공의 말씀을 듣건대,

“<역학대도전>은 당시에 선비로서의 명성을 빌려 권세와 이권을 사들여 기세등등한 자가 있어서 너의 부친이

이 글을 지어 기롱한 것인데, 대체로 노소(老蘇)의 「변간론(辨姦論)」8과 같은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패가망신 당하자, 너희 부친이 마침내 이 글을 불살라 버렸으니, 아마도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자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편 <우상전>에 결락이 있고 하편들이 유실된 것은

권질(卷帙)상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함께 없어진 것이다” 하였다.

 

유생들의 생활을 풍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역시 유실된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의 자서(自序)이다.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손하면

배우지 않았어도 배웠다 하리니9

이 말이 비록 지나치지만

거짓 군자를 경계할 만하네

공명선(公明宣)은 글 읽지 않았어도

삼년을 잘 배웠으며10

농부가 밭을 갈며

아내를 손님같이 서로 공경하니

글자를 읽을 줄 몰라도

참된 배움이라 이를 만하네

이에 봉산학자전을 짓는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의 「이목구심서」에 의하면, 황해도 봉산에 사는 어느 농부가 한글밖에 모르지만

「소학언해(小學諺解)」를 읽고 그의 모든 언행을 이에 준하여 실천했다고 한다.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반드시 서로 절하기로 아내와 약속하고, 부부가 같이 날마다 「소학언해」를 읽어 그 고장의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소학(小學)」은 어린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수신서(修身書)이자 유학(儒學) 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하는 책이다. 일상생활에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소학언해」는 한문으로 된 「소학」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이런 사실들을 감안하면 <봉산학자전>은 한문을 모르는, 그래서 당시로서는 무식하다는 취급을 받는 농부지만

일상생활에서 유학의 기본적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는 모습과 한문을 배워 유식한 체를 하지만 생활에서는

가르침을 따라 행하지 않는 위선적인 유생들의 행태를 대비하면서 봉산의 농부가 진정한 학자라고 풍자한

작품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참고 및 인용 : 연암집(박지원 지음, 신호열, 김명호 옮김, 2007, 돌베개),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1998, 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국어국문학자료사전(한국사전연구사)

 

  1. 박지원의 처남이자 박종채의 외삼촌인 이재성(李在誠, 1751 ~ 1809) [본문으로]
  2. 소순(1009 ~ 1066)은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문학자. 날카로운 논법(論法)과 정열적인 필치에 의한 평론이 구양수(歐陽修)의 인정을 받아 유명해졌다. 아들 소식(蘇軾, 소동파)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렸고,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칭송되었다. [본문으로]
  3.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 출신의 문장가로 양나라에서 벼슬했던 왕포(王褒)가 지은 글로, 노비의 의무를 자세히 서술하고 그것을 위반할 경우 매 100대를 때리겠다.“는 내용의 글 [본문으로]
  4. 종간(宗侃)을 박종채와 동일인물로 보는 이도 있고, 2남(男)인 박종채의 동생으로 박지원의 3남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본문으로]
  5. ‘장자(莊子)’에 ‘시경(詩經)’의 시를 읊조리면서 무덤을 도굴하여 죽은 사람의 입에 물려진 구슬을 훔치는 타락한 유자(儒者)의 이야기가 있다. [본문으로]
  6. 당나라의 노장용이라는 인물이 수도 장안(長安)의 종남산에 은거함으로써 고사(高士)라는 명성을 얻어 도리어 재빠르게 출세한 것을 풍자한 말 [본문으로]
  7.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적에 대한 전기(傳記)라는 뜻 [본문으로]
  8. 노소는 소동파의 아버지인 소순으로, 그는 ‘변간론’에서 직접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씻지 않고 누더기를 걸치며, 성인군자인 체하지만 속은 간사한 소인배인 관리”라고 왕안석을 비난하였다 [본문으로]
  9. ‘논어’에 나오는 공자와 자하(子夏)의 말을 인용한 것 [본문으로]
  10. 공명선은 증자(曾子)의 제자로, 증자의 문하에서 3년이나 있으면서도 전혀 글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증자가 ‘왜 배우지 않느냐?’고 묻자 자신은 스승인 증자의 모범적인 행동을 보고 따라 배우고자 하는 중이라고 대답하여 증자가 감복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