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7 - 붓을 놓다
영조 39년인 1763년, 강세황의 작은 아들 강흔(姜俒)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때 왕이 급제자들을 친견하는 자리에서
영조는 강흔에게 아버지의 근황을 물었다. 그러자 강흔은 아버지가 ‘시서화를 즐기며 소일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조의 장인인 홍봉한(洪鳳漢)이 ‘강세황이 문장을 잘하며 서화에 능하다’고 옆에서 거들었다. 이에 영조가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아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강세황은 그 때의 심정을 <표옹자지(豹翁自誌)>에 이렇게 적었다.
▶강흔(姜俒) : 종종 ‘강완’이라고 소개되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에도 ‘강완’으로 번역된 곳들이 있다. |
【대개 임금께서 미천한 신하를 사랑하고 아껴주시며 곡직하게 보살펴 주시기를 이렇게 보통이 넘게 하시었다. 옹이
이런 말씀을 받고는 땅에 엎드려 놀라 울기를 사흘 동안 하니 눈이 퉁퉁 부었다.
오직 이나 서캐 같은 이 천한 것이 어찌 일찍이 한 번이라도 임금님 곁에 가기를 바랐을 것이리오. 다만 선신(先臣)의
옛 은혜로 천고에 드문 은혜를 내린 것이니 정건(鄭虔)에게 임금께서 글을 써 준 것과 비교할지라도 훨씬 더 분에
넘치는 일이다.
이로부터 마침내 그림과 붓을 태워버리고 다시 하지 않기로 맹세하였고 사람들도 강권하여 구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영조가 이미 강세황이란 인물을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급제자의 가계에 관한 자료를 보고
강흔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기로소에 들어간 데다, 특히 할아버지 강현이 자신의 아버지 숙종을 모시던
신하였음을 보고 그 후손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여 근황을 물어봤을 가능성이 크다. 영조가 한 말도 2대에 걸쳐
기로소에 든 가문의 후손이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나 듣고 사는 것에 대한 안쓰러움과 염려에서였을 것이다. 그런
영조의 마음을 느꼈기에 강세황도 사흘간을 자책하며 운 끝에 붓을 꺾을 결심을 하게 된 정황이 글속에 보인다.
이런 연유로 「송도기행첩」이후 왕성하게 활동을 하던 강세황의 중기는 6년 만에 그치고 만다. 이때가 강세황의 나이
51세 때였다. 그 후로 강세황은 한동안 붓을 놓았고, 영조가 살아있을 동안은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망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이 기간 강세황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대신 남의 그림을 보고 즐기면서 그림에 많은 화평(畵評)을 남겼다. 그런데 강세황은 인품이 너그러워서인지 그림을 비판하기 보다는 그림이나 화가의 장점을 드러내주는 화평을 많이 썼다. 그럼에도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표현이 잘 들어맞아 강세황의 화평이 담긴
그림은 더 가치가 더 높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화평을 받으려고 강세황의 집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김홍도의 그림에서는 강세황의 화평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김홍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강세황의 화평이 크게
작용한 덕분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홍도필 매해파행도 (金弘道筆賣醢婆行圖)>는 김홍도의 초기 풍속도 중 가장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 중 하나이다.. 원래 병풍에서 4점만 남아있던 것 중 한 폭으로, 또 다른 폭에 사능’이란 관지가 있어 30대 작품으로 보고 있다.
7명의 여인들이 머리위에 광주리와 동이를 이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이다. '해(醢)'는 젓갈을, '파(婆)'는 할머니 또는 여인네를 의미한다. 그래서 ‘매해파행(賣醢婆行)’은 ‘젓갈을 팔러 가는 여인네들의 행렬’이라는 뜻이다. 그림 위에 있는
강세황의 화평에서 따온 그림 제목이다.
【내가 전에 바닷가에 살 때 젓갈을 파는 아낙네들이 길을 가는 것을 항상 보았다. 아이를 업고 광주리를 이고 십여 명이 무리를 지어 가는데, 바닷가에 해가 처음 떠오르고 갈매기들이 떼 지어 날아오르는 쓸쓸하고 차가운 풍경이 필묵 밖,
눈에 선하다. 지금 번다한 한양 성안에서 이 그림을 보니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시골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한다. 표암.
(余曾居海畔 慣見賣醢婆行徑 負孩戴筐 十數爲群 海天初旭 鷗鷺爭飛 一段荒寒風物 又在筆墨之外 方在滾滾域塵中 閱此 尤令人有歸歟之思 豹菴)】
▶바닷가에 살 때 : 안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 |
자신의 전문성을 드러내기 위해 뜻도 모호한 온갖 전문 용어를 끌어다가 무언가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듯이 포장을 했지만 결국 잘 이해되지 않는 요즘 전문가들의 화평과는 사뭇 다르다. 대단한 전문가적 화평을 기대했다면 맥이 빠질만한 내용이기도 하다. 옛 선조들은 마음의 눈으로 그림을 봤는데 지금 우리는 머릿속 논리로만 생각하나 보다.
하기는, 무엇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그렸든 무슨 상관인가? 결국 화평은 그림에 대한 느낌이 아닌가! 강세황은 그림을 통하여 지난날을 떠올렸고 그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음을 밝혔다. 그런 감흥을 일으키는 그림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기교를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림을 보고 감흥을 느끼지 못하여 쓸 말이 없기 때문에 기법이나 논하는 것은 아닐까? 강세황의 소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에 대한 감흥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행려풍속 8곡병」은 1778년 김홍도가 34세 때 강희언의 집 담졸헌(澹拙軒)에서 그린 것으로 알려진 병풍 그림이다.
그림의 각 폭마다 강세황이 화평을 달았는데 ‘다리를 건너다 놀라는 나그네’라는 뜻의 그림에 쓴 강세황의 화평이다.
【다리 아래 물새는 당나귀 발굽소리에 놀라고 당나귀는 날아오르는 물새 소리에 놀라네. 사람이 당나귀가 놀라는 것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 가히 입신의 경지에 들어섰다.】
【물품을 맡은 자들이 각기 자기 물건을 들고 가마의 앞뒤에 있으니 사또의 행색은 초라하지 않다. 시골사람이 나서서
진정을 올리고 아전이 판결문을 쓰는데 술 취한 가운데 부르고 쓰느라 오판이나 없을는지.】
화가 김홍도에 대한 강세황의 평은 훨씬 나중에 쓴 <단원기(檀園記)>에 상세하다. 김홍도는 1783년 말에 경상도
안기역도(安奇驛道) 역참(驛站)의 찰방에 임명되어 다음 해에 부임하고 1786년 5월까지 2년 반을 근무했다. 찰방은
역과 역도를 관리하는 종6품 관직이다. 김홍도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단원(檀園)이라는 호를 쓰겠다며 이에 대한
글을 스승 강세황에게 부탁했다.
【(찰방으로 근무를 마친 후) 돌아와서는 방 하나를 마련하고 뜰과 집을 깨끗이 하여 아름다운 꽃나무를 심으니, 추녀와 기둥이 깨끗하여 한 점 티끌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상과 안석에는 오래된 벼루, 좋은 붓, 아름다운 먹, 흰 비단이 있을
뿐이었다. 이에 스스로 ‘단원(檀園)’이라 호를 짓고 내게 기(記)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생각하니 단원은 명나라
이유방(李長蘅)의 호이라, 군이 이어받아 스스로 하고자 하는 뜻이 어디 있으리오? 다만 그 문사(文士)의 높고 맑음과
그림의 기이하고 우아함을 따르고자 할 뿐이다. 지금 사능의 사람됨은 용모가 아름답고 속에 품은 뜻이 맑으니 보는
사람은 (사능이) 고아초속(高雅超俗)하여 거리의 어리석은 자들과 다름을 알 것이다. 성품이 또 음악을 좋아하여 매번
꽃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때로 한두 곡을 연주하여 스스로 즐겼다. 그 기예가 바로 옛사람을 따를 뿐 아니라
풍신(風神)이 뛰어나 진(晉)나라, 송(宋)나라의 고사(高士)와 같다. 만약 이유방과 비교한다면 이미 멀리 뛰어나
(이유방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앞부분은 강세황이 생각한 단원(檀園)이라는 호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지만 이미 김홍도에 대한 칭찬은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칭찬은 그 뒤에 이어진다.
【지금 화가는 각기 한 가지에 장점이 있을 뿐 여러 가지를 다 잘 하지는 못한다. 김 군 사능은 오늘날 동방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 못 그리는 것이 없다. 인물, 산수, 신선, 부처, 꽃과 과일, 동물과 벌레, 물고기와 게 등이 모두
묘한 경지에 이르러, 옛사람과 비교해도 거의 대적할만한 자가 없다. 그중에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 그려, 이것만으로도 일세를 울리고 후대에 전해지기에 충분하다. 또 우리 동쪽사람들의 풍속을 잘 그려, 유사(儒士)가 공부하는 모습,
장사꾼이 시장으로 가는 모습, 여행객, 궁중의 문, 농부, 해녀, 겹쳐진 방, 늘어선 집, 황량한 산, 들판의 나무 등의
물태(物態)를 모두 곡진하게 그려내니, 이는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다. 무릇 화가는 전해오는 옛 그림을 따라 배우기를
거듭하여야 비슷하게 되는데, 홀로 창안해내어 교묘함이 하늘의 조화를 빼앗으니, 어찌 하늘이 내린 특이한 재주로서
세속을 뛰어넘음이 아니랴!】
이제 갓 40을 넘은 김홍도에 대하여 70평생 수많은 그림을 보고 누구보다 그림에 대해 높은 안목을 가졌던 강세황이
이 정도 칭찬을 할 정도면, 그가 그린 그림에 대하여 기법을 운운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강세황이 절필했던 시절에 그려진 그림이 하나 있다. <우금암도(禹金巖圖)>이다.
강세황의 둘째 아들인 강흔(姜俒)이 1770년 8월부터 1772년 1월까지 부안 현감으로 재임한 일이 있었다.
부안현(扶安縣)은 전라북도 부안군의 옛 행정 구역이다. 이에 강세황은 1770년에 부안을 방문하여 이틀에 걸쳐 변산
일대를 유람하였는데 그때 그곳의 경치에 취했는지 7년 만에 붓을 들어 남긴 그림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공력을 들여 그린 그림 같지 않아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꺼려지는 바가 있어, 몸을 사린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그래도 18세기 부안 일대를 그린 유일한 실경산수화라는 의미를 갖는다.
우금암은 부안 상서면 감교리에 위치한 우금산의 정상부를 이루는 바위로 그림에는 우금굴(禹金窟)과 더불어 옥천암(玉泉庵)을 그렸다. 왼쪽 부분의 문현(門懸)은 내변산을 들고나는 문(門)과도 같은 지형에 있던 기암의 바위절벽인데, 부암댐이 생기면서 수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상사(實相寺)는 부안 내변산 천왕봉 아래에 위치한 남북국 신라시기에 창건된 절이지만 6·25때 전소되었다. 용추(龍湫)는 직소폭포(直沼瀑布) 밑의 소(沼)이고, 극락암(極樂庵)은 일대에 있던 암자로 추정된다.
참고 및 인용 : 한국의 미술가(2006. 안휘준외 11인), 한국미술정보개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