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조선시대에는 어디서 먹고 자며 여행했을까? 2

從心所欲 2020. 9. 8. 13:41

조선에서는 역(驛)말고도 교통의 요로에 설치한 원(院)이라는 것이 있었다. 역이 완전 관용(官用)이라 한다면 원(院)은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으로 관이 아닌 사민(私民)이 관리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원(院) 역시 고려시대부터 있던 제도인데 공무여행을 하는 관원들을 위하여 역참이 없는 각 요로(要路)와 인가가 드문 곳에 두었던 숙식시설로 추정된다. 중종 때에 발간된 조선의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당시 전국의 원은 1,310개소로 한성부 4, 개성부 6, 경기도 117, 충청도 212, 경상도 468, 전라도 245, 황해도 79, 강원도 63, 함경도 37, 평안도 79개소에 이르렀다.

 

원의 감독은 한성부와 각 도의 관찰사가 맡았지만, 지방의 수령이 부근 주민 가운데 승려나 향리를 뽑아 원 운영의 책임을 맡겼는데, 대로는 5호(戶), 중로는 3호, 소로는 2호를 원주(院主)로 임명하였다. 이들에게는 원의 유지와 운영 경비를 충당할 수 있도록 원의 규모에 따라 원위전(院位田)이라는 명목의 토지를 지급하였다. 해당 지역에 원우(院宇)를 새로 짓기도 하고, 고려 때의 사원(寺院)이나 역원(驛院)이 원으로 전환된 경우도 있고 개인 소유의 주택이나 누정(樓亭)을 원으로 개조한 경우도 있었다.

 

원은 국왕이 지방을 순시하는 길에 이용되기도 했으며, 각 도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할 때에 점심을 먹거나 마필을 교체하는 곳으로도 쓰였다. 또한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되다 보니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려는 이유에서 일반 여행자들의 이용도 허가되었다. 이로써 민심을 파악하거나 고을 수령들에 관한 내사(內査) 자료를 얻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행객이 많지 않은 곳부터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관리하는 수령의 관심도 낮아지면서 원주를 정수대로 채우지 못하여 원우(院宇)가 파손되고 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여졌다. 시설이 낙후하다 보니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들도 원(院)보다는 고을이나 역을 이용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원은 점차 쇠락해갔다.

또한, 역참에 참점이 설치됨으로써 교통이 불편한 곳에 위치한 원은 그 효능성이 감소되어, 임진왜란 뒤에는 원이 주막 또는 주점으로 바뀌는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점차 지명만 전하게 되었다. 지금도 전하는 서울의 홍제원(弘濟院), 이태원(梨泰院)을 비롯하여 조치원(鳥致院), 장호원(長湖院), 황해도의 사리원(沙里院) 등이 그 흔적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제도들은 모두 공무 여행자들을 위한 장치였다. 일반 여행자들은 흔히 주막(酒幕)에서 먹고 잤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주막은 원래 술을 파는 곳이었다. 그러다 그 기능이 확대되어 잠자리도 제공하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고, 그런 때에도 주막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또 주막의 특성상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기 마련이어서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일반 여행자들은 먹을 식량과 때로는 땔감까지 지고 길을 가며 스스로 밥을 지어먹고, 가는 곳마다 재워줄 것을 청하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패설에 그렇게 하룻밤 재워달라고 청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다. 그것마저 여의치가 않으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윤국형(尹國馨)이 임진왜란 이후 자신이 국정에 참여했던 일을 기록한 「갑진만필(甲辰漫筆)」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중국은 방방곡곡 점포가 있고 술과 음식, 수레와 말을 모두 갖추고 있다. 비록 천리 먼 길을 간다 해도 단지 은자 한 주머니만 차고 가면 자신이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으므로 그 제도가 아주 편리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가난하여 시전이나 행상 외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농사로만 살 뿐이다. 호남과 영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지만, 여행하는 사람이 도움을 받는 것은 술과 물, 꼴과 땔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길을 떠나는 사람은 반드시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싣고 가는데, 먼 길일 경우 말 세 마리에 싣고, 가까운 길이라도 두 마리 분량은 되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괴로워한 지가 오래다.】

 

[김홍도 <주막>]

 

이로 미루어 1600년대 초까지도 잠을 잘 수 있는 주막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새로운 업종이 생기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수요가 있거나 기대수요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주막이 생기기 위해서는 여행하는 유동인구가 있어야 한다.

학계에서는 주막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로 보고 있다. 일본과 중국을 잇는 중계무역의 발달, 그리고 농업에서 발생한 잉여 농산물 등이 상업을 자극하여 물자의 이동이 보다 활발해지면서 주막들이 번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도 조선시대에 주막이 많기로 유명했던 곳으로는 한양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중간인 소사, 오류동에 많았는데, 서울에서 출발하면 점심때쯤 그곳에 도착하기 때문이라 했다. 또한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중요한 길목인 문경새재에 주막 촌을 이루었고, 천안 삼거리, 경상도와 전라도의 길목인 섬진강 나루터의 화개(花開), 한지와 죽산물, 곡산물의 집산지인 전주 등이 주막이 많았던 곳으로 꼽힌다.

 

주막이 늘어났다고 해서 잠을 잘 수 있는 주막들이 바로 생겼다는 의미는 아니다. 주막에서 잠을 잤다는 기록들은 17세기 후반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간단히 술만 팔다가 요기할 것을 찾는 길손이 늘어나면서 밥을 팔고 또 그 뒤에 잠자리까지 제공하는 순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고증된 바는 없지만 잠을 잘 수 있는 주막은 쇠락한 원이 여행객에게 술과 밥을 팔면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 사람을 재우려면 그에 따른 시설이 필요한데, 술과 밥을 파는 영세한 주막들이 지금처럼 건물을 새로 지어 영업을 시작할 리는 없었을 것이고 결국 있는 시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원은 애초부터 숙박을 위한 용도였기에 거기서 술과 밥을 팔면 손님 재우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효시가 되어 기존에 술과 밥만 팔던 주막들이 손님을 끌 목적으로 하나 둘 잠자리를 제공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재워주는 것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의식은 없었던가 보다. 조선의 주막은 술이나 밥을 사먹은 손님에게 잠자리를 무상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그 대신 한 방에서 여러 사람이 침구도 없이 자야 했다. 소규모의 주막은 그 주막에서 가장 큰 방을 길손들에게 제공하여 자고 갈 수 있도록 했는데 그 방을 봉놋방이라 불렀다. 시골집의 큰 방이라고 해봐야 1 ~ 2칸에 불과했기에 그 좁은 방에 여러 사람이 온 순서대로 자야 했으니, 사람이 많을 때는 칼잠을 잤을 것이고 그도 모자라면 툇마루나 봉당에서 이슬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을 것이다. 옛날이야기에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상황들이다.

 

이런 주막과는 별도로 17세기 후반부터 상공업의 발달로 보부상(褓負商)을 비롯한 행상과 같은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들 상인들을 위한 숙박업소가 생겨났다. 객주(客主)나 여각(旅閣)이라 불리는 시설들이다. 원래 객주(客主)는 상인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중계해주는 거간(居間)이나 구전상인(口錢商人)을 가리키는데 , 이들이 보부상들의 편의를 위하여 숙박시설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객주에게 여숙업무는 상품의 위탁자를 위하여 무상 또는 실비로 숙박을 제공하는 관습화된 일이었지만, 이와는 별도로 숙박을 전업으로 하는 보행객주(步行客主)가 생겨나고 이들은 숙박료를 받는 영업을 하였다.

여각(旅閣)은 여상(旅商)의 객주라는 뜻으로서, 객주와 대체로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취급하는 물품의 품목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객주는 품목 제한이 없으나, 여각은 미곡, 어물, 소금, 과채, 땔나무, 석탄 등 부피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품목을 취급하였다. 그래서 여각에게는 창고와 마방의 설비가 필수적이었다. 부피가 큰 품목들이기 때문에 팔릴 때까지 그것을 보관할 시설과, 판매소까지 운반하기 위한 우마차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에 가서는 객주와 여각의 구별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들 객주와 여각은 도시, 그 중에서도 한양에 주로 소재했다. 따라서 상인들도 지방에서는 주막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여상(旅商) : 물건(物件)을 가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파는 일이나 사람

 

[김준근 《기산풍속도첩》 중 〈넉넉한 객주>, 19세기 말, 무명에 채색, 28.5 × 35.0㎝,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김준근 <주막>,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그림으로 보는 객주와 주막은 규모의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그나마 주막도 꽤 정갈해 보인다. 자신의 고객을 대접하기 위한 시설이었으니 객주는 실제로도 여건이 꽤 괜찮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하지만 실제의 주막은 어땠을까?

사극에서 흔히 보이는 마당에 평상이 깔린 주막 풍경에, 도대체 그런 주막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모르겠다고 질책하는 소리도 있다. 주막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는 것이다. 그 마저도 숫자가 많지 않았고,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촌락 10∼20리 사이에 주막이 하나 정도 있는 수준이 되었다고 한다.

불편한 잠자리에 열악한 위생 상태로 온갖 물것이 난무하는 방에서 다른 사람과 섞여 자고, 주막 음식이라고는 이집 저집 할 것 없이 어디나 장국밥이 주종이라, 맛있는 음식 찾아먹는 재미도 없는 여행길은 고되기만 했을 것이다.

“집 나가면 고생”이란 말이 공연히 나온 말이 아니다.

 

[주막의 멍석위에서 식사를 하는 손님들, 1902년 사진]

 

[일제가 강점기에 조선의 주막 풍경을 찍어 조선풍속이라고 발행한 엽서사진]

 

[일제강점기의 엽서 속 주막 풍경]

 

 

 

참고 및 인용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강명관, 서울신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