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겸재 정선 사계산수도첩

從心所欲 2020. 11. 3. 08:09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의 진경풍속, 그 중에서도 진경산수화를 조선적인 화풍으로 정립하고 대성시키는 창조적 성과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그런 그의 화풍을 대표하는 작품이 그의 금강산 그림들이다. 하지만 너무 그 부분이 강조되어 정선은 진경산수화만 그린 화가로 인식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정선은 진경산수화뿐만 아니라 남종문인화풍의 산수화, 중국풍의 인물고사도(人物故事圖)를 비롯하여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현재 전하는 정선의 작품으로는 36세 때 그린 《신묘년 풍악도첩》이 가장 이른 시기의 기년작(紀年作)이다.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진경산수화는 50대 이후의 노년과 만년기의 작품들이다. 그래서 30대부터 50대 중년까지 이르는 시기의 진경산수화 중 제작시기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드물어 정선의 화풍이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사대부 문인화가로 정선보다 10살이 아래였던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 ~ 1761)은 그의 시문집 「관아재고(觀我齋稿)」에 실린 글에 정선을 이렇게 평했다.

 

【공(公)은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나 역시 지나칠 정도로 그림을 좋아하는 병이 있어 그 삼매(三昧)를 대충 이해하면서도 그것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으나, 공(公)은 나날이 정진하여 사혁(謝赫)이 주장한 육법(六法)과 형호(荊浩)의 육요(六要)를 익히고 정해(精解)하지 못하는 바가 없었다. 대저 우리나라 화가들 중에서 이것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는데 공(公)은 고화(古畵)를 박람(博覽)하고 공부 또한 열심히 하여 앞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들을 많이 알아냈다.

이 때문에 이름이 날로 무거워지고 그림 요청은 더욱 쌓이게 되어 쉴 틈이 없었다. 또한 예찬, 미불, 동기창을 공부하고 대혼점(大混點)을 써서 급작스런 요청에 응(應)하는 화법으로 삼았다. 세상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다만 공(公)의 중년 이후 거칠게 휘두르는 권법(倦法)만을 보고 그림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하며 다투어 흉내 내려 하니, 이는 찡그린 것만 흉내 낸 셈이다. 그러한즉 그들은 공(公)의 저 그윽하고 윤택한 멋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조영석의 글을 보면 그가 중국의 여러 화가의 필법들을 무수히 연마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선이 자신만의 화풍을 갖기 전에 여러 화풍의 그림이 있었을 것이지만, 화풍의 형성 과정을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는 작품들이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연구가와 전문가들은 아쉬워한다.

 

흔히 정선의 산수화를 평가할 때면 전문가들은 ‘휘쇄필법(揮灑筆法)’을 거론한다. ‘휘쇄필법’ 또는 ‘휘쇄법’은 한 번에 거침없이 쓸어내리듯 휘두른 빠른 붓질을 의미한다.

조영석의 ‘거칠게 휘두르는 권법’이라는 말도 결국은 이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사천(槎川) 이병연 또한 <정선이 안개 속에서 비로봉을 그리는 것을 보고(鄭元伯霧中畵毘盧峰)>라는 글에서 정선이 《해악전신첩》을 제작하면서 ‘더욱 방자(放恣)해진 쓸어내리듯 휘두른 붓질[揮灑太放恣]’을 사용했다는 언급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정선 작품들은 속필(速筆)로 그려진 그림들이다.

 

정선이 44살 때인 1719년에 그린 《사계산수도첩(四季山水圖帖)》이 있다. 《기해년(己亥年)화첩》으로도 불린다. 50년 가까이 겸재 정선을 연구하고 ‘진경산수’, ‘진경문화’와 같은 용어를 유행시킨 주역이기도 한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소장은 이 첩에 대하여 이렇게 평했다.

 

“《사계산수첩》은 겸재가 44세 때 그린 사실이 서문에 확실히 밝혀져 있어 겸재 그림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겸재가 36세시 진경산수화법 창안 이후에도 중국화보 방작(倣作)을 통한 자기수련을 이와 같이 치열하게 전개하여 진경산수화풍에 보편성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사계산수도첩》의 그림들은 기존에 보아오던 정선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소위 남종화풍에다 진경산수가 아닌 관념산수이다.

“『고씨화보(顧氏畫譜)』에 실린 원나라 문인화가 예찬(倪瓚)의 그림을 변화시켜 그린 것으로, 여유로운 구성, 여백의 강조, 부드러운 형태, 느긋한 필묘, 절제된 묵법이 구사되었다. 담백하고 온화한 분위기로 선비그림의 예술적 품위를 잘 표현하였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필법이 덜 세련되었다는 평도 있다.

 

[정선 《사계산수도첩》중 춘경(春景)산수도, 견본수묵담채, 30.0 × 53.3cm, 호림미술관]

 

[정선 《사계산수도첩》중 하경(夏景)산수도, 견본수묵담채, 30.0 × 53.3cm, 호림미술관]

 

[정선 《사계산수도첩》중 추경(秋景)산수도, 견본수묵담채, 30.0 × 53.3cm, 호림미술관]

 

[정선 《사계산수도첩》중 동경(冬景)산수도, 1719년, 견본수묵담채, 30.0 × 53.3cm, 호림미술관]

 

[정선 《사계산수도첩》중 설경(雪景)산수도, 견본수묵담채, 30.0 × 53.3cm, 호림미술관]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호림미술관은 따로 소개를 하지 않고 있지만, 유홍준 교수는 이 첩의 발문을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이 썼다며 그 내용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내가 병이 들어 장동의 집에 누웠는데 겸재가 보고 가려고 들렀다가 같이 자게 되었다. 한밤중 비바람이 쓸쓸히 치고 천둥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이윽고 우리는 등불을 밝히고 일어나 앉아 마주보면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겸재는 붓을 잡고 비바람이 치는 형상을 그리고는 또 첩첩 봉우리들 사이에 초가집을 배치하고 솔가지 사립문과 대나무 울타리를 그리니 그 경치가 빼어났다. 그 그림의 뜻이란 한 곳에 지덕이 좋은 땅을 얻어 그림 속의 사람처럼 나와 더불어 은거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느 세월에나 이 일단의 인연을 마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구나. ”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18세기 전반 최고의 서화감평가였다. 만권에 가까운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는 충청도 진천(鎭川)의 일명 만권루(萬卷樓)라 불리던 완위각(宛委閣)의 주인이기도 했다. 또한 영조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정선과 평생의 벗이었던 이병연(李秉淵)의 6촌 형이기도 하다. 1714년 금화현감으로 있던 이병연을 방문했다가 이병연이 갖고 있던 정선의 산수화를 보면서 정선과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 및 인용 : 愛情의誤謬. 鄭敾에 대한 평가와 서술의 문제(장진성, 2011.12, 미술사논단 제33호), 호림미술관, 한국의 미술가(안휘준, 2006, 사회평론),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