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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7-1 - 신라 김생과 고려 탄연

從心所欲 2017. 11. 3. 16:45

 

우리나라의 역대 명필

 

보통 조선시대의 4대 명필로 안평대군 이용,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를 꼽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의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 후기의 김정희를 꼽는다.

여기서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생과 김정희이다.

그러면 한 명만 꼽으라면 어떻게 될까?

 

 

김생

 

김생(711 ~ ?)은 통일신라시대 사람이었다.『삼국사기』 김생조에 의하면, “김생은 부모가 한미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팔십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행서·초서가 모두 입신()의 경지였다1 고 한다.

김생은 왕희지의 법을 따르면서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남북조시대의 서풍과 당(唐)대 초기 저수량의 필의를 짐작하여 개성이 뚜렷한 서풍을 창안하였다.

김생의 글씨는 한획을 긋는 데도 굵기가 단조롭지 않고 변화가 무쌍하며, 글자의 짜임새에 있어서도

좌우와 상하의 안배에 있어 율동적 효과를 살려 음양향배의 조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고려의 이규보가 <동국제현서결평론東國諸賢書訣評論>에서 김생을 "신품제일(神品第一)이라고 평가하였다.

김생의 글씨로는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실제 김생이 직접 비문을 쓴 것은 아니고

김생이 써놓은 글씨들을 집자(集字)2한 것이다.

 

 

 김생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 탁본

 

 

탄연

 

고려시대 초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나라의 여러 대가들의 필법을 모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구양순3의 서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다 고려 중기에 우리나라 서예사상에 큰 변화를 일으킨 대가가 나타나는데 그가 곧 탄연(坦然, 1070 ~ 1159)이다.

그는 왕사와 국사를 지낼 정도로 학문과 덕이 높은 고승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불법보다는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체 일색이던 당시의 전통을 깨뜨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 서법을 창출하였다.

그의 글씨로 전하는 것은 '문수원기文殊院記'인데, 한국전쟁때 비가 파손되어 탁본으로만 전해지다가

10여년 전에 춘천 청평사에 비가 복원되었다.

글씨가 왕희지의 <집자성교서>4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왕희지의 글씨에서 볼 수 있는 경직한 맛이 전혀 없고

운치가 넘치는 유려함에 강철과 같은 힘이 들어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수원기 제액5 탁본>

 

 

<문수원기 비음6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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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2. 글씨를 찾아 모음. [본문으로]
  3. 중국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로 처음 왕희지의 서예를 배우고 후에 일가를 이루어 그의 서예명은 고려에까지 알려졌다. 모든 서체에 다 뛰어났으며 특히 해서가 훌륭하였다. 우세남, 저수량, 설직과 함께 “초당 4대가”로 꼽힌다. [본문으로]
  4.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는 당(唐)의 현장법사가 신역불전의 완성을 기념한 황제의 축하문을 승려 회인이 왕희지(王羲之)의 작품에서 집자하여 완성시킨 것으로 행서의 교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5. 제액(題額) : 비신(碑身)의 상단부나 이수에 비의 명칭을 새긴 부분 [본문으로]
  6. 비음(碑陰) : 비신(碑身)의 뒷면 또는 비석의 뒷면에 새기는 문장이나 문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