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기재(三奇齋) 최북 1
전하는 글들에 의해 ‘비운’ 또는 ‘기행’이라는 수식어로 묘사되는 조선 후기의 화가 호생관(毫生館) 최북.
그에 대한 글 가운데 지금 가장 널리 알려진 글들이 신광하의 <최북가(崔北歌)>와 신광수의 <최북 설강도가(崔北 雪江圖歌)>이다. 신광하(1729 ~ 1796)와 신광수(1712 ∼ 1775)는 서로 형제간이다. 신광수의 <최북 설강도가>는 최북에게 눈 덮인 강 풍경인 <설강도(雪江圖)>를 그려달라는 내용을 담은 시로 1763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신광하의 <최북가>는 최북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로 1786년 즈음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북 설강도가> - 신광수
崔北賣畵長安中 최북이 장안에서 그림을 팔고 있네.
生涯草屋四壁空 평생의 오막살이 네 벽이 텅 비었는데.
閉門終日畵山水 문을 닫고 종일토록 산수화를 그리는데
琉璃眼鏡木筆筩 유리 안경에 나무 필통이라.
朝賣一幅得朝飯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을 얻어먹고
暮賣一幅得暮飯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끼니 때우네.
天寒坐客破氈上 차가운 날에 손님은 헌 방석에 앉았고
門外小橋雪三寸 문 밖 작은 다리에는 눈이 세 치나 쌓였네.
請君寫我來時雪江圖 청하노니, 내가 오면서 본 설강도(雪江圖)를 그려주게.
斗尾月溪騎蹇驢 절뚝발이 당나귀타고 두미와 월계를 지날 때
南北靑山望皎然 남북 청산은 온통 하얀 빛에다
漁家壓倒釣航孤 어부의 집은 눈에 파묻히고 낚싯배 하나 외로웠네.
何必灞橋孤山風雪裏 어찌 꼭 풍설 속의 파교와 고산,
但畵孟處士林處士 맹처사 임처사만 그리려 하는가.
待爾同汎桃花水 복숭아 꽃 피는 물을 기다려 함께 배에 올라
更畵春山雪花紙 설화지에 다시 봄 산을 그려보세.
▶파교(灞橋), 고산(孤山), 맹처사, 임처사 :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이른 봄에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 나섰다는 고사(古事)로 ‘설중기려도(雪中騎驢圖)’ 또는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의 주인공이 된 당(唐)나라 시인 맹호연(猛浩然)과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매화를 부인 삼고 학을 자식 삼아[매처학자(梅妻鶴子)] 살았다는 송나라 시인 임포(林浦). |
<최북가> - 신광하
君不見崔北雪中死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최북이 눈 속에 얼어 죽은 것을.
貂裘白馬誰家子 갖옷 입고 백마 탄 너희들은 어느 집 자식인가?
汝曹飛揚不憐死 너희들 거드름 피우느라 그의 죽음을 슬퍼할 줄도 모르누나.
北也卑微眞可哀 최북의 낮고 천한 처지 참으로 애달픈 일이라.
北也爲人甚精悍 최북의 사람됨이 정갈하고 매서우니
自稱畵師毫生館 스스로 화사 호생관이라 칭했도다.
軀幹短小眇一目 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한쪽이 멀었지만
酒過三酌無忌憚 술이 석 잔을 넘어서면 꺼리는 것이 없었더라.
北窮肅愼經黑朔 북으론 숙신에 다다라 흑삭을 거치고
東入日本過赤岸 동쪽으론 일본에 들어가 적안을 지났다.
貴家屛障山水圖 대가 집 병풍의 산수 그림은
安堅李澄一掃無 안견과 이징을 무색케 하였으니
索酒狂歌始放筆 술을 찾아 미친 듯 노래하다 비로소 붓을 들면
高堂白日生江湖 대낮 대청마루에 강호(江湖) 풍광이 일어났다.
賣畵一幅十日饑 열흘 굶주린 끝에 그림 한 폭을 팔아
大醉夜歸臥城隅 크게 취하여 밤에 돌아오다 성 모퉁이에 쓰러졌네.
借問北邙塵土萬人骨 묻노니 북망산에 진토된 만인의 뼈들이여,
何如北也埋却三丈雪 세길 눈 속에 묻혀 죽은 최북은 어떠한가?
鳴呼北也 아! 최북이여
身雖凍死名不滅 몸은 비록 얼어 죽었으나 이름은 없어지지 않으리.
▶숙신(肅愼), 흑삭(黑朔) : 숙신은 두만강 연안 일대, 흑삭은 흑룡강(黑龍江) 지역. |
이 시들을 통하여 최북이 가난했고 술을 좋아했으며 삶이 불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다시 60년 쯤 후에 조희룡이 지은 「호산외사(壺山外史)」속의 <최북전>에는 최북의 여러 기행과 함께 최북이 스스로 한 눈을 찔러 눈이 멀었다는 일화가 소개된다.
이런 글들을 읽고 나면 최북은 주정뱅이로 방탕하게 살았던 환쟁이 같은 인상을 갖게 된다.
실제로 최북에 대한 그런 평가가 당시에도 있었다. 정조 때의 문장가로 나중에 영의정에까지 오른 남공철이 최북에 대하여 <최칠칠전>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최북을 술꾼이라고도 하고 환쟁이라고도 하며 심지어는 그를 가리켜 미친놈[狂生]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남공철은 최북이 늘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산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때때로 묘한 깨달음을 주거나 쓸 만한 것도 있었으니 위와 같은 것이 그렇다”
여기서 ‘위와 같은 것’이란 남공철이 최북을 만났을 때 최북이 왜적에 대비하는 조선 수군의 전략에 대해 말한 내용이다. 또한 남공철은 최북이 “지은 시도 기이하고 고풍스러워 읊조릴만했지만 그것들을 감춰두고는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남공철은 최북을 직접 만나본 결과 그에게서 단순한 화가가 아닌 문사로서의 풍모도 발견했던 것 같다.
최북은 호생관 말고도 다른 여러 호를 썼었는데 삼기재(三奇齋)라는 호도 썼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화 수집가이자 비평가로, 말년에 평생 모은 방대한 서화 작품들을 『석농화원(石農畵苑)』, 『화원별집(畵苑別集)』, 『화원속첩(畵苑續帖)』으로 만들어 작품 보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 1727 ~ 1797)은 최북의 <운산촌사(雲山村舍)> 에 이런 글을 적어 놓았다.
【최북은 자가 칠칠이다. 호가 삼기재(三奇齋)인데 문장 글씨 그림이 모두 기이하다고 자부하여 쓴 호다. 만년에 자기 사는 집에 호생(毫生)이란 이름을 붙였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자가 있으면 응당 대답하기를 “나는 붓끝으로 살아간다”고 하였다. 최북이 붓을 놀린 지가 거의 칠십년인데 화법이 제법 넉넉하고 짙다. 그러나 끝내 북종화의 습속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안타깝다. 석농 원빈이 쓰다.】
최북과 거의 동시대 인물이었던 김광국이 ‘최북이 붓을 놀린 지가 거의 칠십년’이라고 했으니 일단 최북이 49세에 죽었다는 「호산외사(壺山外史)」에서의 조희룡의 말은 틀린 셈이다. 김광국의 글 가운데 눈이 가는 것은 최북이 스스로 ‘문장 글씨 그림이 모두 기이하다’는 의미로 삼기재(三奇齋)라고 자호했다는 부분이다.
최북이 굳이 그런 호를 지은 것은 자신은 시서화 모두에 뛰어난 문사(文士)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몰라주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지은 시들이 뛰어나다고 했고, ’광초(狂草)를 즐겨 썼다’거나 ‘초서를 잘 썼는데, 특히 반행(半行)의 서체는 아름다우면서도 기이하게 탁월했다‘는 기록들도 있다. 거기다 그림은 더욱 뛰어났으니 만일 그의 신분이 양반이었다면 그야말로 시서화 삼절이라는 칭송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중인신분에 남의 그림이나 그려주는 직업화가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였으니, 자신의 자부심과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이 그를 힘들게 했을 수도 있다. 최북의 주벽과 기이한 행동은 어쩌면 이런 현실에 대한 괴로움과 열등감의 표출이었을지도 모른다.
화제로 쓰인 ‘空山無人 水流花開’ 는 소동파(蘇東坡)의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이라는 게송(偈頌))에 나오는
구절로 유명하지만, 같은 시대의 또 다른 시인인 황정견(黃庭堅)의 시에도 등장하는 구절이다.
“빈산에 사람 없으나 물 흐르고 꽃이 피네.”
그런데 최북은 그림 한가운데에 자신의 낙관을 떡하니 찍어놓았다.
화제로 쓴 글씨로 미루어 술이 취한 상태라 짐작이 간다.
아마도 “내가 천하의 최북이다!” 이런 심정으로 찍었을 듯하다.
참고 및 인용 : 최북, 기인 화가의 탄생(유재빈, 2020, 대동문화연구 109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