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삼기재(三奇齋) 최북 2

從心所欲 2021. 5. 10. 15:00

최북이 화가로 취급 받는 것을 싫어했던 정황은 여주 이씨 가문으로 성호 이익과 일가였던 이현환(李玄煥, 1713 ~ 1772)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현환이 1749년 가을, 최북에게 영모화 팔폭병풍을 받은 후 남긴 글이다.

 


【칠칠은 그림을 잘 그리기로 세상이 명성이 자자하였다. 사람들이 병풍과 족자를 들고 와서 그림을 청하였는데, 칠칠은 처음에는 기뻐하며 바람처럼 소매를 휘둘러 잠깐 사이에 완성했다. 대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지난 무진년에는 일본에 그림을 그리도록 파견되었는데, 왜인들이 보화(寶貨)를 들고 그 그림을 얻고자 몰려들었고, 돌아올 때에 이르자 더욱 그 이름이 높아졌다.
▶무진년...파견 : 무진년은 1748년. 최북이 1747년 11월 28일부터 1748년 윤7월 13일까지 일본으로의 통신사행에 참여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최북은 화원이 아니었지만, 화명이 높아 사행에 선발되었었다.
사방에서 찾아와 그림을 청하느라 사람들의 발길이 칠칠의 문에 이어졌다. 왕공과 귀인들이 심지어 화사로 그를 부리기도 하였다. 칠칠은 끝내 염증을 내었다. 흰 비단을 가지고 오는 자가 있으면 받아서 팽개쳐 두기 일쑤였다. 궤짝에 차고 상자에 쌓인 채 해를 넘겨도 붓을 들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 옛날 문여가(文與可)는 대나무를 잘 그렸는데 비단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문여가는 염증을 내어 땅에 던지며 “버선이나 만들어야겠다”고 욕했다. 지금 칠칠의 산수 화훼 그림은 문여가의 대 그림과 수준이 비슷하여 명성이 나란하다. 그림에 염증을 느낀 심경도 문여가처럼 비단으로 버선이나 만들고자 할 지경이다. 그래서 일찍이 말하기를 “그림에 빠져든 사람은 도덕 문장을 갖추더라도 한순간에 화사라는 치욕을 얻게 되니 말을 할 때마다 극으로 치달으니 그림을 경계한다.”고 하였다.
▶문여가(文與可) : 문동(文同, 1018 ~ 1079).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관료이자 문인으로 여가(輿可)는 자이다. 시문과 글씨, 죽화(竹畵)에 뛰어났으며, 묵죽(墨竹)은 ‘소쇄(蕭灑)의 자태가 풍부하다’는 평을 받았다.

내가 보니 아무것도 거리낌 없이 붓 가는대로 빠르게 휘두르니 견줄 사람이 없다. 그 큰 뜻으로 말하자면 옛 것[古法]을 본떠서 새로운 뜻[新意]을 드러낸 것이다. 내가 “그대의 그림은 성성이가 술을 좋아하여 꾸짖어도 또한 마시는 것에 가깝지 아니한가.” 라고 하였다.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시에서 두보(杜甫), 문에서 한유(韓愈), 글씨에서 안진경(顔眞卿), 그림에 있어서는 오도자(吳道子)에 이르러 고금의 변화가 이루어졌으니 천하의 능사가 모두 갖추어졌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대의 그림을 또한 능사가 갖추어졌다고 평가했으니 그대는 (재능을) 아끼지 말게나. 사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 가운데 그림만한 것이 없다. 환현(桓玄)이 전쟁 중에도 서화를 지키려고 빠른 배에 실어 놓은 것이나 왕애(王涯)가 서화를 이중으로 된 벽에 보관하였던 일은 결국 나라에 해를 끼치고 몸을 망치게 하였다. 옛 사람의 고질적인버릇이 쉽게 고쳐지지 않음이 이와 같다.
가만히 조화옹의 뜻을 헤아려 보니 그대에게 기묘한 제주가 있어 사람들이 그대의 그림을 보배로 여길 것이니, 명월주, 야광벽과 같은 보배를 어찌 가볍게 여기겠는가. 훗날 그대의 그림을 얻는 사람은 보배로 가질 것이니, 주저하지 말게나“라고 하였다.
▶오도자(吳道子) : 중국 당대의 화가인 오도현(吳道玄). 초명은 도자(道子)였는데 당 현종(玄宗)의 명으로 도현(道玄)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종의 눈에 띠어 궁정화가가 되었으며, 산이나 돌의 입체감이나 질감을 표현하는 자연주의에의 묘법을 추진해서 ‘산수의 변’을 가져왔다는 평을 받았으며 그림을 빨리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환현(桓玄) : 동진(東晋) 시대에 정치적 혼란을 틈타 단명 왕조인 환초(桓楚, 403 ~ 405)를 세웠던 인물. 황제에 오른 지 넉 달 만에 반란군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도망 다니다 3개월 후에 살해되었다.
▶왕애(王涯) : 당(唐)나라 후기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인물로 환관(宦官)을 주멸하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피살되었다.

칠칠이 말하기를, “그림은 내 뜻에 맞으면 그만일 뿐. 세상에는 그림을 아는 자 드무네. 참으로 그대 말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을 그린 나를 떠올릴 수 있으리. 뒷날 날 알아주는 지음(知音)을 기다리려 하네.”라고 하였다.

마침내 영모화를 그려 여덟 첩으로 내게 전해주니 나는 최백(崔白)의 영모라고 일컫고 이를 글로 남긴다.
기사년(1749년) 가을날, 9일
▶최백(崔白) : 중국 북송시대의 화가로 도석인물(道釋人物)과 화죽(花竹), 영모화(翎毛畫)에 뛰어났다.

 

글에 최북이 “그림에 빠져든 사람은 도덕 문장을 갖추더라도 한순간에 화사라는 치욕을 얻게 되니 말을 할 때마다 극으로 치달으니 그림을 경계한다.”라는 말을 했다는 구절이 있다. 최북은 자신이 화가로 취급받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최북은 그런 세태에 염증을 느꼈다고까지 했다.

최북 자신은 스스로를 선비라 여기고 자신의 그림 솜씨를 사대부들처럼 여기(餘技) 정도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다른 면모는 모른 체하고 그림 그리는 재주만 높게 보았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현실은 그나마 그림이라도 그려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최북이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할 수 밖에 없었던 심정이 그려진다. 최북의 기행은 바로 이런 그의 심정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다. 흔히 최북의 성격이 오만했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열등감에서 나오는 무의식적 반발이었을 수도 있다. 남공철의 <최칠칠전>에 있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마찬가지다.

 

일찍이 최북이 어느 귀인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 하인이 최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 미안해서 “최 직장(直長)이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최북이 화를 내며 “너는 어찌 나를 최 정승이라 하지 않고 직장이라 하느냐?”고 힐난하였다. 이에 하인이 웃으면서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 하고 반문하니 최북이 “그러면 내가 언제 직장이 된 적이 있었더냐? 기왕에 헛벼슬로 부를 바에야 어찌 정승이라 하지 않고 직장이라 하느냐?”라고 말하고는 주인을 만나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직장(直長) : 조선시대 각 관아에 두었던 종7품 관직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부터가 덧붙여진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보통 이런 일화는 우스갯소리로 끝날법한데, 최북은 끝까지 진지했다. 이는 그만큼 최북이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민감했다는 이야기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최북의 수많은 기행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분의 표시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같은 <최칠칠전>에 있는 ‘그림을 사는 사람이 그림 값을 너무 적게 주거나 지나치게 후하게 쳐줄 때마다 최북이 화내거나 비웃으며 안목이 없다고 소리친’ 일화 역시 자존심과 열등감 사이에서 갈등하는 최북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 속 울분 탓에 그의 그림은 거친 필법으로 가득할 만도 한데, 막상 남아있는 그의 그림들은 세련되지는 않더라도 소박하고 시정(詩情)있는 분위기의 그림들이 많다. 당대의 강세황은 최북의 <송하초옥도(松下草屋圖)>에 “고아해서 즐길만하다[古雅可喜]”고 했다. 또한 김홍도의 <단원도>에 등장하는 인물인 창해(滄海) 정란(鄭瀾, 1725 ~ 1791)은 최북의 <난초> 그림을 두고 “필의가 지극히 고풍스럽다[筆意極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와유첩(臥遊帖)」 중 최북의 <난초>, 지본채색, 17.3×23.5cm, 개인소장]

 

최북의 교유 관계에 대하여 특별히 밝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 그가 자신처럼 불우했던 강세황, 심사정, 허필 등과 어울렸던 정황들이 있다. 위 「와유첩(臥遊帖)」은 표암 강세황, 최북, 허필의 그림 4점과 강세황의 것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함께 들어있는 얇은 그림첩이다. 이 첩은 정란(鄭瀾)이 보관했다가 신광수에게 건네져 그 후손들이 계속 수장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런가 하면 1763년 4월에 안산의 ‘대나무 움집’이라는 뜻의 균와(筠窩)에서의 모임을 그린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에도 최북의 모습이 있다. 이 그림은 강세황, 심사정, 최북, 김홍도가 합작한 그림으로 최북은 그림의 선염(渲染)을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세황, 심사정, 최북, 김홍도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中 부분 : 오른쪽 나무 아래에 상투머리에 바둑을 두는 사람이 최북이고, 그 오른쪽 모서리에 앉아 바둑을 구경하는 사람이 허필(許佖). 최북 왼쪽이 심사정이지만 그림이 훼손되었고 심사정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아이를 건너 뛰어 거문고를 타고 있는 강세황과 그 옆에서 퉁소를 불고 있는 김홍도이다.]

 

아래 <계류도>는 최북이 신라시대의 문장가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를 화제로 삼은 시의도(詩意圖)이다. 최치원이 말년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때에 지은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란 시의 일부 구절을 따왔다.

 

[최북 <계류도(溪流圖)>, 지본담채, 28.7 x 33.8cm, 고려대박물관]

 

却恐是非聲到耳 세상의 다투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故敎流水盡籠山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에워싸게 했노라.

 

어쩌면 이것이 최북의 세상을 향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환쟁이 취급만 하는 세상이 싫었을 것이다. 

 

[최북, <애련도(愛蓮圖)>, 지본담채, 55 × 32.5 cm, 개인 소장]

 

<애련도(愛蓮圖)>에 화제로 쓰인 蓮之愛同予者何人 즉 ‘나만큼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말은 중국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 있는 글귀다. 주돈이는 이 글에서 연꽃을 꽃 중의 군자[花之君子]라며, 자신의 연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자신이 군자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고 드러냈다.

최북도 군자처럼 살며 군자로 대우받으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최북필산수도(崔北筆山水圖)>, 견본담채, 61.5 x 37cm, 국립박물관]

 

戊辰年 仲夏, 즉 1748년 음력 5월에 그린 그림이다. 거기재(居基齋)는 최북의 또 다른 호이다.

살 거(居), 터 기(基)...남의 그림 그려주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끝내고 싶다는 뜻이었을까?

 

 

 

 

참고 및 인용 : 최북, 기인 화가의 탄생(유재빈, 2020, 대동문화연구 109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최북 계류도(김남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