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재봉래도권(眞宰逢萊圖卷)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목록에 작가도 명시되어있지 않은 채 그냥 ‘화첩(畵帖)’으로만 이름이 올라있는 화첩이 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공개한 자료에는 첩의 표지에 「진재봉래도권(眞宰逢萊圖卷)」이라 쓰여 있다. 이것으로만 보면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 ~ 1775)이 그린 금강산그림을 모은 화첩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화첩 표지에는 추사 김정희가 소장했었다는 의미의 ‘완당(阮堂)장(藏)’이라는 글씨까지 쓰여 있다. 박물관에서 아직 이 첩을 들여다볼만한 여가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 화첩이 김윤겸의 작품이라는 결론을 못 내려서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 화첩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다. 그래서 첩의 표지 글씨가 과연 김정희의 것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다.
화첩의 구성으로 보면 이 첩은 진재 김윤겸 자신이 만든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첩에는 김윤겸의 그림말고도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 ~ 1761)의 그림 두 점과 기야(箕埜) 이방운(李昉運, 1761 ~ 1815 이후)의 그림 한 점이 들어있다. 누군가 소장하고 있던 김윤겸의 금강산 그림과 조영석, 이방운의 그림을 모아 첩을 만들면서 「진재봉래도권(眞宰逢萊圖卷)」이라는 이름을 붙인 듯하다. 물론 그 누군가가 추사 김정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조영석의 그림이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는 강세황의 화찬(畫贊)이 적혀있다.
''관아재의 그림은 동국의 제일이고, 인물화는 관아재의 그림에서 제일이고, 이 그림은 또 관아재의 그림 중 제일이다. 내가 수십 년 전 이 그림을 보았고 지금 또다시 본다.“
조영석의 이 그림은 화제가 없다. 그러나 ‘어선도(漁船圖)’나 ‘출범도(出帆圖)’라 해도 지장은 없을 듯하다. 이 그림에도 역시 강세황의 화찬이 있는데, “필법에 아취와 묘함이 있고, 한 점의 속기도 없다[筆法雅妙無一點俗氣]”라고 적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배와 노의 넓은 돛대를 본떠서 꾸민 것이 매우 사실적이니 적당히 그렸다고 사의(寫意)를 논하는 것은 부당하다. 참으로 진귀하다 할만하다.”고 했다. 신축(辛丑)이라는 간지를 통해 표암 강세황이 1781년 9월에 화찬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조영석의 두 그림에 이어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 ~ 1775)의 금강산 그림들이 나온다. 정수영의 「해산첩(海山帖)」이 모든 경물들을 사실적으로 모두 담으려고 노력한 그림들이라면 이 「진재봉래도권(眞宰逢萊圖卷)」의 금강산 그림들은 생략의 묘를 살린 그림들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금강산 그림에서도 역시 김윤겸의 특징이라 할 ‘간결한 필치와 투명한 담채’가 곁들여져, 맑고 청신한 느낌들이 전해진다. 첩의 그림 중 <묘길상(妙吉祥)>에 있는 관지에 김윤겸이 58세 때인 1768년에 그렸다고 했다. 원래는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된 그림을 나중에 상태를 변형시켜 화첩으로 만들었다는 해석도 있다.
화제를 묘길상이라 쓰고 이어서 “진재(眞宰)가 무자(戊子)년 겨울에 붓 가는대로 그려 대옹(垈翁)께 드리니 대개 오래전의 약속에 따른 것이다. 그림은 모두 12폭이다[畵凡十二幅].”라고 적었다.
그런데 화첩에 들어있는 그림은 8점뿐이니, 4점은 유실된 것으로 짐작된다.
<마하연>까지가 「진재봉래도권」에 들어있는 금강산 그림의 전부다. 이어서 마지막으로는 기야(箕埜) 이방운(李昉運)의 산수화 한 점이 들어있다.
중국 금(金)나라의 원호문(元好問)이라는 시인이 누군가 수묵화를 그려달라고 하자 시로 답해준다며 쓴 글에 이런 글귀가 있다.
煙拂雲梢留澹白 雲蒸山腹出深靑
안개는 구름에 걸려 담백한 그대로이고 구름은 산허리에서 피어나 초록이 더욱 짙다.
이 구절은 예로부터 ‘문자로 그린 산수화’라는 칭송을 받을 만큼 표현이 뛰어나다는 평을 얻었다고 한다. 이방운이 쓴 제발은 원래의 구절과는 글자 몇 개가 다르다.
‘煙拂雲梢留淡泊 氣蒸山腹出深靑’
안개는 구름에 걸려 담백한 데 머물고 산허리에서 피어난 아지랑이로 초록이 더욱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