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Peter Paul Rubens)는 지금의 벨기에 플랑드르 출신으로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였다. 생전 동양이라고는 와본 적이 없는 그가 어떻게 조선 남자를 만나 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일제의 강제징용에 대한 왜노(矮奴)들 하는 짓거리에 토왜(土倭)를 제외한 우리 국민 모두가 분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잘 모르거나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왜놈들이 우리 백성을 억지로 끌어간 것이 일제 때가 처음이 아니란 사실이다.
왜구들이 왜란(倭亂) 때 조선에 저지른 만행이야 이루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 가운데 우리 선조들을 끌어다 노예로 판 얘기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1597년 정유년, 왜놈들은 두 번째 조선 침공에 나서면서 군사편제를 전투부대와 특수부대로 이원화하였다. 전투부대는 조선 정벌을 위한 전투가 목적이었지만, 특수부대는 전투 부대와는 별도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특수부대는 전투부대 후방에서 도서, 금속, 공예, 포로, 보물, 축(畜)의 6개 분야로 나뉘어 조선의 자원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수송하는 것이 그 주된 임무였다. 즉, 조선의 서적, 자기류를 비롯한 각종 공예품, 병기와 금속활자, 금은보화와 진기한 물품을 탈취하고, 가축과 함께 조선의 학자, 관리와 목공, 직공, 도공 등의 장인과 노동력을 가진 젊은 남녀의 납치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왜놈들은 애초부터 조선의 강토를 아작 내는 것은 물론 인적, 물적 자원까지 싹쓸이하기로 작정을 했던 것이다.
정유재란 때의 전투지역은 하삼도(下三道)라 불리는 충청, 경상, 전라도 지역에 국한되었지만, 이때 왜적에게 잡혀간 조선의 피로인(被擄人)은 임진왜란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많았다. 당시의 조선인 피랍인 수에 대해서는 한일 간에 의견 차이가 있어, 일본에서는 2~3만 명 정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1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헛소리를 해대며 진실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한 왜의 주장은 믿을 수가 없다.
《광해군일기》광해 9년(1617년) 4월 19일 기사에 의하면 정유재란이 끝난 20년 후에도 지금의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현(鹿兒島縣) 서쪽 지역인 사츠마(薩摩) 한 곳에만도 3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붙잡혀와 살고 있었다.
【경상도의 겸사복(兼司僕) 정신도(鄭信道)가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 신해년 봄에 포로로 잡혀간 전이생(全以生) 등의 편지를 얻어 보았는데, 그 가운데 국가에 있어 중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신이 그에 대해 상세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전이생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로서 살마주(薩摩州)에 잡혀 있는 자가 3만 7백여 명이나 되는데, 별도로 한 구역에 모여 사는 지 장차 24년이 되어갑니다....(후략)】
▶신해년 : 1611년 ▶겸사복(兼司僕) : 궁중(宮中)에서 쓰는 말을 관할하면서 세자궁(世子宮)의 호위(護衛)와 궁전(宮殿)의 시위(侍衛)를 맡아보던 금군(禁軍)의 하나. ≪경국대전≫에 따르면 정원은 50명으로, 만기 복무연한이 7년이고 정3품 ∼ 종9품의 체아직(遞兒職)이었다. |
「간양록(看羊錄)」은 강항(姜沆)이란 조선 관리가 정유재란 때 분조(分朝)의 호조참판 종사관으로 식량운송을 하던 중 왜적에게 피랍되어 끌려갔다가 돌아오기까지의 2년 반 남짓한 기간에 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기록이다. 그 시작에 적중(賊中)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 있는데 거기에는 자신이 잡혀가던 때 본 정황을 이렇게 적었다.
【...배를 돌려 무안현(務安縣)의 한 바다 모퉁이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는 적선 6백, 7백 척이 두어 리(里)에 걸쳐 가득 차있었고, 우리나라 남녀가 왜놈과 더불어 거의 반반씩 되었는데 이 배 저 배에서 부르짖어 우는 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하였습니다. ......(중략)...
이예주(伊豫州)의 대진현(大津縣)에 당도하여 드디어 유치되었는데, 좌도(佐渡)란 자의 사읍(私邑) 세 성(城) 중에 대진(大津)이 그 하나였습니다. 이곳에 당도해 보니 우리나라 남자와 여자로 전후에 사로잡혀 온 사람이 무려 천여 명인데, 새로 붙잡혀 온 사람은 밤낮으로 마을 거리에서 떼 지어 울고 있으며, 먼저 온 사람은 반쯤 왜 사람에 귀화하여 돌아갈 생각이 이미 없어져 버렸습니다.】
▶무안현(務安縣) : 전라 남도 무안군 ▶대진현(大津縣) : 현 일본 시가현[滋賀縣]의 오쓰시(大津市) 지역 |
정유재란 때 일본 규슈 우스키[臼杵]의 성주를 따라 그의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왜국 승려 케이넨[慶念]이 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 남원성을 공략한 왜구들의 만행을 이렇게 적었다.
【8월 4일
너나 할 것 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고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 이것저것 죽은 자의 재물을 먼저 탈취하려고 벌떼처럼 몰려들어 떠들썩한 모습이여.
8월 6일
들도 산도 마을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잘라 죽인다. 산 사람은 쇠줄과 대나무로 목을 묶어 끌고 부모는 자식 걱정에 울부짖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극적인 모습을 난생 처음 보았다. 들도 산도 불 지르라고 소리치는 무사의 소리, 마치 피범벅이 된 지옥 같은 광경이 되었도다.
8월 8일
조선 아이를 잡아먹고 그 부모는 내리쳐 죽어 갈라놓으니 다시 서로는 볼 수 없게 된다. 살아남은 사람은 치욕의 귀신이 공격해오는 것처럼 공포와 서러움에 몸을 떨고 있다. 애처롭구나. 네 마리의 새가 어미와 이별하여 둥지를 날아갈 때의 심정이 이와 같겠지.】
또 그 해 11월 19일에는 부산에서 목격한 현장을 이렇게 적었다.
【일본으로부터 수많은 상인이 왔는데, 그 중에는 인신매매자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남녀노약(男女老若)을 사서 새끼줄로 목을 얽어 뒤에서 재촉하는데, 말을 듣지 않을 때 채찍으로 매질하는 상황은 마치 죄인을 다루는 것과 같았다. ··· 이와 같이 사 몰아가지고 마치 원숭이 떼를 엮어서 걷게 하는 것과 같았고, 소나 말을 다루듯 하는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또 이런 글도 있다.
【지옥의 아방(阿防)이 사자(死者) 죄인을 다루는 것 같구나! 낮에 길에서 돌아다니는 젊은 조선남자는 무사들에게 붙잡혀서 개처럼 목에 줄을 매어 노예상인에게 팔려갔다. 이들 노예들은 다시 원숭이처럼 목에 줄을 연이어 매어 줄 끝을 말이나 소달구지 뒤에 연결하고 뒤따라가게 하였다. 이때 노예는 무거운 짐을 지거나 이고 소달구지에는 봉래산(蓬萊山)과 같이 짐을 가득 실었다.】
남의 이야기처럼 들었던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노예로 끌고 갔던 것과 똑같은 일들이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왜군 장수와 결탁한 왜국의 인신매매자들은 조선인을 끌어가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에게 팔아넘겼다.
포르투갈은 1543년부터 왜국과 교역을 시작한 이래, 일본에서 인신매매를 하여 포르투갈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노예로 팔아왔었고, 왜국 여자 수백 명을 사다가 포르투갈에 성노예로 팔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정유재란 때 왜국 인신매매자들은 처음부터 노예사냥을 목적으로 조선에 출정하여 조선인들을 사로잡아가 포르투갈인에게 넘겨주고 화승총, 비단 등과 바꿨다.
예수회 소속의 포르투갈 신부로서 일본과 마카오의 천주교 교구를 관할했던 루이스 세르꾸에이라(Luis Cerqueira)의 문서에는 보다 구체적인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1598년 9월 4일에 쓴 글이다.
【배가 들어오는 항구인 나가사키[長崎]에 인접한 곳의 많은 일본인들은 포로를 사려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의도에 따라, 그들에게 팔기 위한 조선 사람들을 사려고 일본의 여러 지역으로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이미 잡혀 있는 지역에서 그들을 구매하는 한편, 조선인들을 포획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갔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포획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중국 배에서 이들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았다.】
또 다른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예수회 총책임자 신부에게 보낸 글도 있다. “이곳 나가사키에는 남자뿐 아니라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도 포함된 조선인 포로들이 (기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는 1300여 명입니다.”
나가사키는 당시 포르투갈 상인들이 상가를 차릴 정도의 국제무역항으로, 유럽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던 시장이었다. 이곳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끌려와 노예로 매매되었다. 조선이 노예가 얼마나 많았던지 노예 값이 대폭락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인 노예는 일인당 2.4수쿠도(scudo)에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다시 유럽으로 가서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 당시 아프리카 노예는 170스쿠도, 페루 노예가 400 스쿠도였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조선 노예가 2.4스쿠도였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노예로 끌려왔는지 짐작케 하는 것이다.
▶수쿠도(scudo) : 당시 포르투갈의 화폐단위로, 1스쿠도는 쌀 두 가마 값에 해당했다고 한다. |
이들 가운데는 이탈리아 피렌체를 거쳐 로마까지 간 노예도 있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카를레티(Francesco Carlatti)는 <나의 세계 일주기>라는 글을 남겼는데, 그는 1597년부터 1599년까지 일본의 나가사키와 중국 마카오 등을 여행하였다. 카를레티(Carlatti)는 신부라는 설도 있고 상인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가 남긴 글이다.
【이 나라(Corea)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노소가 노예로 잡혀왔다. 그중에는 보기 딱할 만큼 불쌍한 어린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주 헐값에 매매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12큐스티를 내고 5명을 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 인도 고야에 데려가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었다. 그중 한 사람만은 플로렌스로 데려갔는데, 그는 지금 로마에 살고 있다. 그는 안토니오(Antonio)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한복을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에 등장하는 인물을 카를레티의 글에 언급된 안토니오(Antonio)로 가정한 소설이 등장하여 동일인물 여부에 대한 논란이 한때 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림 속 인물의 복장을 트집 잡아 아예 조선인이 아니라는 주장도 계속되고 있다.
이 그림은 작은 스케치로 1617년 정도에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한복을 입은 남자’라는 그림 제목은 1983년 영국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이 그림이 공개될 때 경매관계자에 의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그림의 주인공이 안토니오이든 아니든, 그림 제목을 누가 붙였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림에 있는 이가 조선인이 아니라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묻고 싶다. 지금 짱깨들이 지껄여대는 한푸[漢服]를 거론하는 이들은, 한푸에는 본래 남녀를 불문하고 바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나 말하는지 모르겠다. 또 명나라 사람이 외국에 가면서 굳이 원나라 때 유행했던 고려양(高麗樣)을 입고 갈 이유는 무엇인가? 루벤스가 이탈리아에 머물고 있던 1606년부터 1608년 사이에 이 남자를 피렌체에서 만나 그렸다면 피랍된 지 10년이고, 1617년이면 20년이다. 그 세월 동안 그림 속 인물은 피랍되었을 때 입었던 옷을 계속 입고 살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생전 보지도 못한 한복이 이탈리아 사람의 손에 의해 제대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면 건(巾)이나 의복의 디테일한 모양을 갖고 논란하는 것이야말로 쓰잘데없는 짓으로 보인다.
루벤스 그림 속 인물의 정체와 관계없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우리의 선조가 왜구에 의해 저 먼 나라까지 팔려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유럽의 수도원 농장까지도 팔려갔다.
강항의 「간양록(看羊錄)」에는 일본에 잡혀있는 조선 부인(俘人)들에게 고하는 글이라는 <고부인격(告俘人檄)>이라는 글이 있다. 부인(俘人)은 포로라는 뜻이다.
【우리 인생이 다난하여, 이와 같이 국운의 불행을 만날 줄을 어찌 뜻했으랴? .......
이 칠치(漆齒)의 더러운 나라를 생각해 보면, 실로 횡목(橫目)의 이류(異類)로서, 우(禹) 임금의 자취가 미치지 못한 곳이요, 주(周) 나라의 궤도(軌道)와도 같지 않은 곳이다. 안사고(顔師古)의 화이도(華夷圖)에 실리지 아니했고, 유종원(柳宗元)은 또한 풍토기(風土記)에서 빼 놓았다.
참람히도 일출(日出)의 천자(天子)라 일컬으며 남몰래 해외의 지방을 차지했다. 임금 처치(處置)하기를 바둑 두듯이 하여 난신(亂臣)ㆍ적자(賊子)가 후세에 발자국을 맞대었고, 사람 보기를 초개같이 하여, 하찮은 물건이나 세세한 연고라도 모두 음형(淫刑)에 몰아넣었다.
적괴(賊魁) 수길(秀吉)은 시랑(豺狼) 같은 화심(禍心)에다가 쐐기 같은 추한 종자로서 환견(豢牽) 같은 옛 주인에 의지하여, 이미 뱁새가 나는 황새가 되자 당랑(螳螂)이 큰 수레를 항거하여 감히 해를 쏘는 독한 화살을 퍼부었다. 견마(犬馬)의 마음만도 같지 못하면서 한없는 욕구는 만족할 줄을 모른다. 우리나라가 백 년 동안의 태평으로 장정들이 전쟁에 익숙하지 못함을 틈타고, 우리나라가 여러 해의 흉년으로 창생이 길거리에 많이 굴러다니는 것을 요행으로 여겨서, 먼저 완(沅)을 침노하여 공(共)으로 가는 군사를 일으켜 감히 괵(虢)을 멸하고 우(虞)를 탈취하는 꾀로 삼았다. 닭ㆍ개ㆍ돼지까지도 종자를 남기지 못하였고, 초목 곤충도 아울러 해독을 입었음에랴.
대개, 국가의 원수로써 말하자면, 우리 사직을 불태워 버렸고, 우리의 강토를 더럽혔고, 우리의 좌척우평(左墄右平)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남궁 북내(南宮北內)를 점령했다. 석 달 동안 구중궁궐이 불타고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있었겠으며, 십세(十世)의 원릉(園陵)이 마침내 한 무더기 흙을 도적맞았다. 병부(兵符)의 황석(黃石) 장로는 거의 전쟁의 원통한 넋이 되었고, 왕자는 백의(白衣)로 다니며 오래 모구(旄丘)의 이로(泥露)를 노래했다. 신하가 된 자로서 차마 말 못할 고통이었고, 혈기가 있는 자로서는 누군들 이 마음이 없겠는가?....(후략)】
▶칠치(漆齒) : 이에다 검은 칠을 하는 일본의 야만적 풍습에 빗대어 왜국을 가리키는 말 ▶횡목(橫目) : ‘눈은 가로이고, 코는 세로’라는 횡목종비(橫目縱鼻)의 준말로, 사람을 가리키는 말 ▶이류(異類) : 별종(別種) ▶음형(淫刑) : 부당한 형벌. 법을 벗어나 멋대로 형벌을 적용함 ▶환견(豢牽) : 가축이나 짐승 ▶완(沅)을 침노하여 공(共)으로 가는 군사를 일으켜 : 왜적이 조선을 침략한 것을 비유 ▶괵(虢)을 멸하고 우(虞)를 탈취하는 꾀 : 정명가도를 빗댄 말 ▶좌척우평(左墄右平)을 무너뜨리고 : 왜적이 조선 궁궐을 침입한 것 ▶모구(旄丘)의 이로(泥露) : 타향살이 |
왜놈들의 지금 작태를 보면 강항의 이런 분노가 어찌 그 시대의 일로 끝날 일인가?
반성은커녕 아침저녁으로 우리나라 망하기만 바라고 있는 왜놈들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데, 세일 조금 해준다고 해서 왜놈차 사서 타고 다니는 것들은 배알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조상이 바다를 건너온 것인가?
참고 및 인용 : KBS HD역사스페셜 임진왜란 2편 일본 승려의 정유재란 종군기,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1(김명호 외, 2006, 휴머니스트), 한국고전번역원,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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