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49

추사 김정희 48 - 절필(絶筆)

1856년 10월. 추사는 그때도 봉은사에 있었다. 당시 봉은사에서는 남호(南湖), 영기(永奇)스님이「화엄경」, 정확하게는「화엄경수소연의본(華嚴經隨疎演義本)」80권을 직접 손으로 베껴 쓰고 이를 목판으로 찍어 인출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화엄경판이 마침내 완성되어 경판전을 짓고 보관하게 되어 그 현판 글씨를 추사에게 부탁하였다. 그때가 9월말이었다. 추사는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글자 하나의 크기가 어린아이 몸통만한 대자(大字)로 두 글자를 완성했다. 그리고 옆에 낙관하기를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 病中作)’이라고 했다. 이 글씨는 결국 추사의 절필(絶筆)을 고하는 작품이 되었다. 유홍준 박사는 이 글씨가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에 달한 것이라 했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

추사 김정희 2018.11.06

추사 김정희 47 - 봉은사

상유현은 먼저 추사가 기거하는 봉은사 동편 모습부터 아주 정밀하게 묘사했다. 【큰 방의 남쪽 벽 아래, 나무로 가옥(假屋) 한 칸을 짓고, 사방에는 장자(障子)1가 없고 앞은 반쯤 걷어 올린 휘장을 드리웠다. 가옥 안을 보니 화문석을 폈고, 자리 위에 꽃담요를 폈고 담요 앞에 큰 책상을 놓고, 책상 위에는 벼루 한 개가 뚜껑이 덮인 채 놓여 있고, 곁에 푸른 유리 필세(筆洗)2가 있고, 또 발이 높은 작은 향로가 있어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또 필통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크고 붉으며 하나는 작고 희었다. 큰 필통에는 큰 붓이 서너 개 꽂혀 있고 작은 필통에는 작은 붓이 여덟아홉 개 꽂혀 있었다. 그 사이에 백옥으로 만든 인주합(印朱盒) 한 개와 청옥으로 만든 서진(書鎭) 한 개가 놓여 있다. ..

추사 김정희 2018.11.01

추사 김정희 46 - 병진년(丙辰年)

병진년 5월, 그러니까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 어느 날, 전혀 모르는 스님이 추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에 자신은 호운(浩雲)이라는 중으로 해붕(海鵬)대사의 문도(門徒)인데 스님의 영정을 만들었으니 거기에 화상찬(畵像贊)1을 하나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편지를 받고 추사는 까마득한 옛날 같은 40년 전 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추사의 나이 30이 되던 1815년 겨울, 해붕스님이 수락산 학림암에 있을 때 추사는 산사로 스님을 찾아가 하룻밤을 지새며 공각(空覺)에 대해 일대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때 마침 초의가 해붕스님을 모시고 있어 두 사람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추사는 이때부터 해붕대사의 높은 경지를 존경해왔었다. 이에 추사는 ‘평생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홀연 서신을 보내오니 대단히..

추사 김정희 2018.10.28

추사 김정희 45 - 과칠십 칠십일과

추사는 70세가 되자 호를 과칠십(果七十)이라고 했다. ‘70세의 과천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71세가 되자 이번에는 칠십일과(七十一果)라고 했다. 그렇게 평범한 말로 자신의 호를 만들어 쓰면서도 과(果)자를 앞뒤로 옮겨가며 발음의 운을 살렸다. 과천시절 추사는 나날이 병중이어서 편지마다 자신의 추해져가는 모습을 한탄했다. 추사의 과천시절 간찰 중에는 직접 쓰지 않고 대필한 것들이 있다. 아마도 추사가 불러주고 아우나 아들, 제자들이 대신 썼을 것이다. 그들의 글씨 또한 추사와 방불하였으니 받는 사람은 이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추사는 글씨를 썼다. 과칠십이라 낙관된 은 추사의 여전한 건필을 보여준다. 추사가 70이 되는 해 어느 봄날, 정읍 백양사의 설두, 백암 두 스님이 과지초당으로..

추사 김정희 2018.10.26

추사 김정희 43 - 노과시절의 졸(拙)과 허(虛)

과천시절 추사는 글씨를 무수히 써서 지금 남아있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과천시절에는 낙관을 할 때 명백히 이 시절 작품임을 알려주는 노과(老果), 과파(果坡), 과형(果兄), 과산(果山), 청관산인(靑冠山人), 과칠십(果七十), 칠십일과(七十一果) 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실수 없이 가려낼 수 있다. 여기에 간찰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자못 방대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원숙한 노경의 명작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으니 추사의 예술은 과천에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추사는 과천시절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 허물을 벗었다고 권돈인에게 자신감을 표하였다. 그 경지를 ‘잘되고 못 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고 했다. 이 말이야말로 추사체의 본령을 말해주는 한마디이다. ..

추사 김정희 2018.10.06

추사 김정희 41 - 석노시(石砮詩)

추사는 북청 유배시절에도 제주도 유배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책을 집에서 가져다 독서를 했고 또한 서정시를 여러 편 남기기도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그곳 문사들과 만나 학문과 예술과 서정을 교류하면서 북청의 숨은 인재를 열심히 서울로 추천해 올렸다. 그러면서도 역사와 지리, 금석학에 해박했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북청 곳곳에서 발견된 석노(石砮)라고 부르는 돌화살촉을 고증하여 숙신(肅愼)의 유물로 판정하였다. 현대의 고고학과 미술사적으로 말하자면 청동기시대 유물로 대개 기원전 5세기 무렵, 즉 고조선 말기이니 그때의 북청지역이라면 당연히 숙신1의 유물이라고 고증한 것이다. 추사는 청나라 학자들과의 잦고 깊은 교유 때문에 당시로서는 국제적 감각의 지식인이었지만, 동시에 사대주의적 경향이라는 비판도 ..

추사 김정희 2018.09.26

추사 김정희 40 - 북청 유배

추사는 철종 2년인 1851년 7월, 다시 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명받는다. 예송(禮訟)1에 휘말려 안동김씨의 공격을 받던 권돈인의 배후로 지목된 까닭이었다. 이는 무고(誣告)였지만 추사는 북청으로 떠나야 했고, 권돈인 은 강원도 화천으로 중도부처(中途付處)2 되었다. 어렵사리 강상에 터를 잡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독서와 서화로 마음을 달래던 추사로서는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두 아우 명희, 상희도 향리로 추방되었다. 그 때의 심정을 추사는 몇 달 뒤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밝혔다. “ 나는 동쪽에서 꾸고 서쪽에서 얻어 북청으로 떠날 여비를 겨우 마련했지만 아우 명희와 상희는 그 가난한 살림에 어디에서 돈이라도 마련하기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 26신) 그..

추사 김정희 2018.09.16

추사 김정희 39 - 불이선란(不二禪蘭)

추사는 강상시절에 그 동안 뜸했던 난초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추사의 난초그림은 이 워낙 유명하고 또 1에 갖가지 형상의 난초그림이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정법(正法)으로 그리지 않고 모두 파격적으로만 그렸다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추사의 글씨가 아무리 괴(怪)해도 과 같은 반듯한 해서, 과 처럼 예서의 법도에 충실한 작품이 있으며, 또 그처럼 법도에 기반을 두고 변화를 구했기 때문에 추사의 묘(妙)가 살아 있듯이 추사의 난초그림 역시 정도(政道)에서 그린 것이 있다. 오세창이 편집한 「근역화휘(槿域畫彙)」2에 들어 있는 이란 그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농묵의 잎에 담묵의 꽃, 난잎 굵기의 다양한 변화, 가지런한 가운데 각기 다른 방향으로 필세가 뻗어나간 점 모두가 그렇다. 특히 난초그..

추사 김정희 2018.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