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47 - 봉은사

從心所欲 2018. 11. 1. 21:02

상유현은 먼저 추사가 기거하는 봉은사 동편 모습부터 아주 정밀하게 묘사했다.

 

【큰 방의 남쪽 벽 아래, 나무로 가옥(假屋) 한 칸을 짓고, 사방에는 장자(障子)1가 없고 앞은 반쯤 걷어 올린

휘장을 드리웠다. 가옥 안을 보니 화문석을 폈고, 자리 위에 꽃담요를 폈고 담요 앞에 큰 책상을 놓고, 책상

위에는 벼루 한 개가 뚜껑이 덮인 채 놓여 있고, 곁에 푸른 유리 필세(筆洗)2가 있고, 또 발이 높은 작은 향로가

있어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또 필통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크고 붉으며 하나는 작고 희었다.

큰 필통에는 큰 붓이 서너 개 꽂혀 있고 작은 필통에는 작은 붓이 여덟아홉 개 꽂혀 있었다. 그 사이에 백옥으로

만든 인주합(印朱盒) 한 개와 청옥으로 만든 서진(書鎭) 한 개가 놓여 있다. 책상에는 큰 벼루 한 개가 있어 먹을

갈아 오목한 못을 채웠고, 왼편에 목반(木盤) 하나가 있어 도장 수십 과(顆)가 크기가 고르지 않게 놓여있고,

바른편에 붉은 대나무로 만든 작은 탁자[紫竹小卓]가 한 개 있는데 단 위에는 깁[비단]과 생초(絹綃)와

지물(紙物)이 가득 꽂혀 있었다.】

 

[봉은사 판전 예전 모습]

 

지금 예산의 추사고택 사랑채에 추사 살아생전의 분위기를 재현해놓은 것은 대개 이 글에 따른 것이라 한다.

상유현은 이어서 추사의 인상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방 가운데 노인 한 분이 앉아 계셨는데 신재(身材)가 단소(短小)하고 수염은 희기가 눈 같고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밝기가 칠같이 빛나고, 머리카락이 없고, 중들이 쓰는 대로 짠 원모(圓帽)를 썼으며, 푸른

모시, 소매 넓은 두루마기[周衣]를 헤치고 젊고 붉은 기가 얼굴에 가득했고, 팔은 약하고 손가락은 가늘어

섬세하기 아녀자 같고, 손에 한 줄 염주를 쥐고 만지며 굴리고 있었다. 제공들은 배례(拜禮)를 하였다. 몸을

굽혀 답하고 맞는데, 그가 추사(秋史)선생인 줄 가히 알 수 있었다. 전에 듣건대 추사 선생이 다른 시대 사람

[異代人] 같다 하여 눈을 씻고 자세히 보았으므로 그 기구(器具)와 얼굴이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글을 읽다보면 추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면서 문득 과천시절 추사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자화상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림 오른편 상단의 자찬 ‘과로자제(果老自題)’는 다른 종이에 쓴 것을 오려 붙인 것이라서 이 자화상을추사가 그렸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전(傳) 추사 자화상>이라고도 부른다. 자찬의 내용은 이렇다. 

 

【謂是我亦可 謂非我亦可 是我亦我 非我亦我

是非之間 無以謂我 帝珠重重 誰能執相於大摩尼中

呵呵 果老自題

 

이 사람이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 해도 좋다.

나라고 해도 나이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나이다.

나이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제주(帝珠,·제석천의 구슬)가 주렁주렁한데

누가 큰 마니주(摩尼珠,·여의주) 속에서 상(相)을 집착하는가. 하하

과천 노인이 스스로 쓰다3.】

 

상유현의 예리한 눈은 마침내 추사가 이미 써놓은 서예작품에까지 이르러 “동편 가장자리 불탁(佛卓) 아래

옥색 화전(華牋)4 서련(書聯) 세 짝을 펴놓고 방금 볕에 쬐어 먹 마르기를 기다리고 계셨다.”며 석 점의 대련

작품의 내용까지 기록해놓았다.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

봄바람 같은 큰 아량은 능히 만물을 받아들이고, 가을 물살 같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으리라

 

<磵戶蒼苔馴子鹿 石田春雨種人蔘>

석간석 푸른 이끼는 어린 사슴을 길들일 만하고, 돌밭 봄비에 인삼을 심노라

 

<潞國晩年猶矍鑠5 呂端6大事不糊塗>

노국7의 만년은 오히려 건강했고, 여단은 큰일을 흐지부지 하지 않았다.

 

이 석 점의 대련 중 <春風大雅>는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추사 만년의 명작으로 해서의 단정함과

행서의 편안함이 함께 어우러져, 글 내용대로 봄바람 같은 도량을 말함에는 ‘바람 풍(風)’자가 부드럽고, 가을

물살 같은 문장을 씀에는 ‘가을 추(秋)’자에 자못 준엄함이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주황빛 냉금지가 아름답게

빛나고 먹빛의 광택이 아직도 남아 있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칭찬을 받고 있다.

 

[김정희 <春風大雅>, 각폭 130.5 x 29.0cm, 간송미술관]

 

 

「추사방현기」는 이윽고 추사의 목소리를 전해준다. 추사가 찾아온 제공(諸公)에게 윤정현의 안부를 물었다.

 

“그래. 침계공은 기거가 편하시냐?”

 

유홍준 박사는 이 대목을 읽는 순간, 기록문학가로서 상유현이라는 분의 탁월함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고 했다.

상유현은 아주 평범한 인사말 한마디까지도 기록할 줄 아는 뛰어난 문필가라고 칭찬했다. 김약슬선생도 귓가에

추사의 육성이 들리는 듯한 환상조차 일어났다고 했다는 것이다.

상유현은 이어 추사가 이때 스님들과 똑같이 발우공양을 하고 계셨던 것을 상세하게 기록하였고, 이어서

자화참회(刺火懺悔)하는 모습까지 증언하였다.

 

‘늙은 스님 한 분이 댓가지를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댓가지 끝에 작은 종이통 하나를 매달았다.

통 가운데에는 바늘과 같은 까끄라기[針芒]가 있었다. 한 개를 골라 공의 바른팔 근육 위에 곧추세웠다.

작은 스님이 석유황에 불을 붙여 가지고 와서 까끄라기 끝에 붙였다. 타는 것이 촛불 같았으나 바로 꺼졌다.

나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일이었다. 스님이 나간 후 공들에게 물었다. “그 하시는 것은 무슨 뜻이고 무슨 법이며,

뭐라고 부릅니까?” 어당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불경에 있으니 ‘자화참회(刺火懺悔)’가 곧 이것이라.

또 수계(受戒)라고도 부른다. 무릇 중이 되면 비로서 삭발한다. 스승의 계를 받을 때도 이와 같다. 이는 모두

더러운 것을 사르어버리고 귀의청정(歸依淸淨)하는 맹세이니 불법(佛法)은 그러하니라.”

 

상유현은 나중에 가서야 한나라, 당나라 명류재사(名流才士)중에 이런 경우가 많음을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후세는 이때 추사가 그때 불교에 크게 ‘미망’되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학자들 눈에

추사는 겉은 유학자지만 속은 불교에 젖어든 것으로 비쳐, 혹자는 추사를 ‘외유내불(外儒內佛)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추사는 그런 비판과 눈총에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유교와 불교를 갈라 보려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추사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곧잘 했지만 남들이 이를 비판하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추사의 나이 71세. 이제 늙고 병들어 자신의 그림자 보는 것조차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졌다는 노(老) 완당.

반년 뒤에 세상을 떠난 추사에게 불교가 그렇게 절실히 다가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해동의 유마거사로 불리던 추사가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결코 ’미망‘된 것도, 이상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이 글은 유홍준著『완당평전』(2002, 도서출판 학고재)을 근간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1. 방의 아랫간이나 또는 방과 마루 사이에 가리어 막은 문. 미닫이와 같이 되었으나 운두가 썩 높고 문지방이 낮게 되어 있음 [본문으로]
  2. 먹이나 물감이 묻은 붓을 빠는 그릇 [본문으로]
  3. 출처: 추사3- 아니라고 해도 좋다..작성자 정영두 [본문으로]
  4. 남을 높이어 그의 편지나 문서를 이르는 말 [본문으로]
  5. 확삭(矍鑠) : 늙은 사람의 기력이 정정함 [본문으로]
  6. 여단 : 송나라 사람 [본문으로]
  7. 중국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인 문언박(文彦博, 1006 ~ 1097). 두산백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