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45 - 과칠십 칠십일과

從心所欲 2018. 10. 26. 17:13

추사는 70세가 되자 호를 과칠십(果七十)이라고 했다. ‘70세의 과천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71세가

되자 이번에는 칠십일과(七十一果)라고 했다. 그렇게 평범한 말로 자신의 호를 만들어 쓰면서도 과(果)자를

앞뒤로 옮겨가며 발음의 운을 살렸다.

과천시절 추사는 나날이 병중이어서 편지마다 자신의 추해져가는 모습을 한탄했다. 추사의 과천시절 간찰

중에는 직접 쓰지 않고 대필한 것들이 있다. 아마도 추사가 불러주고 아우나 아들, 제자들이 대신 썼을 것이다.

그들의 글씨 또한 추사와 방불하였으니 받는 사람은 이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추사는 글씨를

썼다. 과칠십이라 낙관된 <산중당유객(山中儻留客)시첩>은 추사의 여전한 건필을 보여준다.

 

[김정희 <산중당유객시첩>부분, 각폭 38.5 x 12.3cm, 청관재]

 

추사가 70이 되는 해 어느 봄날, 정읍 백양사의 설두, 백암 두 스님이 과지초당으로 추사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3년 전에 돌아가신 백파스님의 비문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제주 유배시절 추사는 나이 58세 때,

당시 화엄종의 종장으로 나이 77세이던 백파에게 「 백파망증15조(白坡妄證十五條)」를 써 보내 백파와

서한으로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는데, 추사는 이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제주 유배에서 돌아오는 길에 백파에게

정읍 장터에서 만나자고 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눈 때문에 길이 지체되어 백파를 헛걸음질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백파스님은 1852년 입적하였는데 그 때 추사는 북청 유배중이어서 그런 사실을 몰랐었다. 그랬는데 이제

그 제자들이 찾아와 백파의 비문을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추사는 백파스림의 비문을 쓰면서 종래의

비문 형식을 다 버리고 비의 앞면에는 비의 이름을 해서체 큰 글씨로 쓰고, 뒷면에는 그 비의 이름을 풀이하는

글을 행서체 작은 글씨로 채웠다. 종래의 비문 형식은 통상 앞면은 전서로 쓰고 뒷면은 예서로 썼었다.

이 글씨는 결국 추사 만년의 최고 가는 해서, 행서의 금석문이 되었다.

추사는 비의 이름을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라고 썼다.

비 뒷면에는 추사가 백파를 사모하는 마음, 사죄하는 마음이 절절이 배어 있는 글이 적혀 있다.

 

[백파선사 비문 탁본, 불교신문사사진]

 

[백파선사 부도비 뒷면 부분, 윤일원사진]

 

이 비는 지금 선운사 부도 밭에 있다. 탁본을 구하고자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아 절에서는 함부로 탁본을

못하도록 비에 콩기름을 발라놓아 항시 반들반들 빛나고 있다고 한다.

 

추사는 백파스님의 비문을 지으면서 이를 부탁하러 온 스님의 제자에게는 바로<百蘗(백벽)>이라는 횡액을

써서 선물하였다. 백벽이란 추사가 백파선사의 비문 <우일본(又一本)>1을 쓰면서 말한 바, 백장스님은 대기를

얻었고, 황벽스님은 대용을 얻었다고 하였는데, 백장과 황벽을 모두 얻는 것이 곧 대기대용을 두루 갖추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추사의 작품에는 이렇듯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추사는 <百蘗> 끝에 이렇게 그 뜻을 명확히 했다.

 

백파의 선문(禪門)의 종취(宗取)는 대기대용을 드높이는 것이므로 이 두 자를 써서 설두상 인에게  준다.

  (白門宗取 擧揚大機大用 以此二字書 付雪竇上人)

 

[김정희 <百蘗>, 37.0 x 95,0cm, 개인소장]

 

또한 추사는 백파스님의 제자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추사가 전부터 소장하고 있던

<달마대사 초상>인데 추사가 아주 아끼던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달마상이 꼭 백파스님 같다고들

하였다 한다. 이에 추사는 이 달마상을 영구산 구암사로 보내 문도들로 하여금 백파의 영정일 줄로 알고

조석으로 공양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써서 붙여주었다. (전집 권6, 백파상찬)

 

遠望似達磨 近看卽白坡

以有差別 入不二門 流水今日 明月前身

멀리서 바라보면 달마와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바로 백파로구나

차별이 있음을 가지고서 불이문에 들어갔네

흐르는 물이 오늘이라면 밝은 달은 옛 모습이로세

 

칠십에서 한 살 더 먹어 71세가 되어 추사는 호를 ‘칠십일과’라 했고, 바로 이 해 병진년(1856년)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병진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던 모양이다.

 

“해가 바뀌고 달은 하순(下旬)이 되었습니다.......세후에 추위가 다시 심해지니 참으로 춘신(春神)은 겸손을

지키고 있는데 동신(冬神)은 청렴하지 않다고 말할만합니다. 옛 병진년의 유별란 추위가 지금 60년 만에

또다시 극성을 부립니다. 아직도 기억하건데, 당시 운종가(雲從街, 종로거리)에는 다니는 사람조차

없었답니다.” (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33신)

 

그러면서 그 모진 추위 속에서 병과 씨름하며 사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하소연했다.

 

“온 하늘에 봄눈이 내리니 갑자기 강정(江情)이 생각납니다.....정희는 무슨 까닭인지도 모른 채 세월을 마치

도가(陶家)의 물레처럼 쉽게 쉽게 돌려버리고......실낱같은 생명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나 쓸모없기는

닭갈비보다 심하고 험난하기는 양장(羊腸)보다 더한 지경이니 이를 어쩌겠습니까......늘 남을 시켜 받아쓰게

하다가 오늘은 대단히 힘을 들여 얼어붙은 붓을 입김으로 불어 녹여서 이와 같이 정성껏 써서 올립니다.”

(같은 글)

 

들을수록 노 추사의 모습이 딱하게 느껴진다. 칠십일과 시절 추사는 몸만 아프고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우 명희가 사경을 헤매는 중병을 앓다가 그 해 4월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추사는 삶에 대한 긴장을

늦추거나 글씨에 대한 연구를 그치지 않았다. 병진년 정월에는 ‘청애당첩 뒤에 제하다(題淸愛堂帖後)’라는

거의 논문에 가까운 글을 쓰기도 했다. 학자로서, 예술가로서 추사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지적, 감성적 열정을

다하였다.

추사가 칠십일과라고 낙관한 작품은 현재 알려진 것이 대여섯 점 된다. 그런데 그 유작들이 우연치고는

신기하게도 전·예·해·행·초의 각체로 남아있다. 그 중 <珊瑚架·翡翠甁(산호가·비취병)>은 추사의 행서로

칠십 노경의 스스럼없고 허화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정희 <珊瑚架·翡翠甁> 각폭 128.5 x 32.0cm, 일암관]

 

無雙彩筆珊瑚架 第一名花翡翠甁

더 없이 좋은 붓과 산호 책거리

제일 가는 이름난 꽃과 청자병

 

협서로 쓴 화제는 이렇다.

 

“평지 절간에서 산을 바라보니 심히 기이한 것이 마치 미우인(小米)2의 <청효도(淸曉圖)>같다. 신운이 감도는

것이 마치 빛나는 것만 같다. 팔뚝을 들고 요선을 위해 쓰다.”

 

화제로 미루어 봉은사에서 수도산(修道山)3을 바라보고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청시절 애제자였던 유요선이

찾아오자 반가움에 써 준 것으로 종이도 고급지이고 글씨도 마음먹고 쓴 듯하다.

 

<大烹豆腐(대팽두부)>는 칠십일과 시절 추사가 남긴 마지막 예서 대련이다. 추사가 살아온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라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 글 내용과 글씨 형식 모두에서 그렇다.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최고가는 좋은 반찬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최고가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김정희 <大烹豆腐> 각폭 129.5 x 31.9cm, 간송미술관]

 

이렇게 평범한 것의 가치를 극대화시켜놓고는 자신이 그렇게 말한 심정을 협서로 이렇게 적었다.

 

“이것은 촌늙은이의 제일 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斗]만한 큰 황금도장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드는

여인이 수백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글씨 또한 글의 내용만큼이나 소박하고 욕심 없고 꾸밈없는 순수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글씨의 골격에는

역사적 연륜조차 느끼게 하는 옛 비문의 졸(拙)함이 뼛속까지 배어 있다. 그러니 엄청난 기교이면서도 그

기교가 드러나지 않고 그저 천연스럽고 순박하게만 보이는 것이다.

<大烹豆腐>는 1940년 무렵에 경매에 출품되었다. 작품의 예정가는 100원 정도였는데 이 작품을 구매하려는

일본인 수집가와의 경쟁 끝에 간송 전형필선생이 1,000원에 낙찰 받음으로써 작품이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고

지금 간송미술관에 소장될 수 있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이었다고 한다.

 

이 글은 유홍준著『완당평전』(2002, 도서출판 학고재)을요약한 것입니다.

 

 

  1. 추사는 ‘백파선사비문’을 다시 한 번 더 썼는데 이를 ‘우일본’이라 하며, 대기대용에 대한 논의는 ‘우일본’에 더 명확히 드러나 있다 한다. [본문으로]
  2. 미우인(米友仁, 1090 ~ 1170)은 중국, 북송 말~남송 초기의 서가이자 화가. 미불(米茀)의 장남으로, 부친을 대미(大米)라고 한 것에 반해 소미(小米)라고 불려졌다. 그림은 부친의 법을 계승하여 수묵의 농담과 퍼짐에 호분(胡粉)을 섞어 산수를 그렸다.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
  3. 우면산에서 매봉산으로 이어진 지맥 가운데 북쪽 방향으로 작은 능선이 뻗어서 역삼동 국기원(國技院) 근처의 역삼공원 구릉을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삼성동 봉은사 뒷산인 수도산(75m) 봉우리를 형성한다. 수도산 북쪽 기슭에는 경기고등학교가 있고 남쪽 기슭에는 봉은사가 있다. 현재 수도산은 봉은역사공원이 되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