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44- 茗禪. 畫法有長江萬里

從心所欲 2018. 10. 24. 17:38


추사가 옛 비의 글씨를 임서하거나 그 필의를 빌려 쓴 작품에는 명작이 많다. 그것은 아마도 추사가 그 열정적인

기(氣)와 성령(性靈)을 스스로는 조절하기 힘들지 몰라도 고전적 명비(名碑)를 임모하다 보면 저절로 운(韻)과

격조가 받쳐주는 까닭일 것이다.

그런 글씨로는 혹자에 따라서는 추사의 대표작으로 뽑고, 혹자는 비록 대표작은 아니라도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갖고 싶은 작품으로 손꼽는 <茗禪(명선)>이 있다. 이 작품은 초의선사가 보내준 차에 대한 답례로 쓴

것인데 그 필의(筆義)가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에 있음을 협서에 밝혀두었다.


“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차나 노아차 못지않았다. 이 글씨를 써서 보답하는데 백석신군비의

필의로 쓴다(書此爲報, 用白石神君碑意).”



[김정희 <茗禪>, 115.2 x 57.8cm, 간송미술관]



[<백석신군비>1 비문 집자]


<백석신군비>는 한나라 때인 183년, 하북성 직례현(直隸縣) 원씨(元氏)마을 백석산(白石山) 산신(山神)의

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 이 비문의 글씨는 위아래로 조금 긴 형태이지만 용필에 기괴함이 전혀 없고

포치가 정연하여 지순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한나라 비문치고는 너무 골기가 적어 위진 시대에 재각(再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추사는 이 비의 글씨에 순후(淳厚)하면서도 예스러운 맛이 넘치면서 졸(拙)한

기운에 교(巧)한 맛이 숨어 있음을 착안하여 <茗禪> 두 글자를 썼다. 특히 중후하고 졸한 멋의 <茗禪> 글씨

양 옆에 작고 가늘며 흐름이 경쾌한 행서가 치장되어, 작품의 구성미도 매우 뛰어나다.


추사의 과천시절 글씨는 <곽유도비임서>나 <茗禪>처럼 한나라 예서체의 필의를 따른 방정한 글씨가 많다.

그러나 추사가 이처럼 고비(古碑)에 입각한 글씨만 쓴 것은 물론 아니다. 추사의 작품 중 <史野(사야)>,

<溪山無盡(계산무진)>, <畫法有長江萬里(화법유장강만리)> 같은 작품들은 비록 간지는 씌어있지 않지만

추사 노년시절의 대담한 변화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史野> 현판은 추사가 병조판서 권대정에게 써준 것으로 그 내용은 「논어(論語)」에서 군자를 설명한

것으로 ‘세련됨과 싱싱함’이라는 뜻2 이다. 글씨가 워낙 대자인지라 웅혼한 힘이 실로 가득한데 글자의

구성이 대담하면서도 크고 작음 굵고 가늠을 혼용하여 울림이 강하다.


[김정희 <史野>, 37.5 x 92.5cm, 간송미술관]


이에 반하여 <溪山無盡>은 의도적으로 험준하고 깊은 계곡의 느낌이라도 나타내려는 듯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를 꾀하였다. 추사의 글씨를 보면서 ‘괴’를 말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글씨를 염두에 둔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괴’라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하등의 잘못도 발견되지 않는다.



[김정희 <溪山無盡>, 62.5 x 105.5cm, 간송미술관]


이 글씨는 김수근(1798 ~ 1854)에게 써준 것이다. 김수근은 본관이 안동으로 호는 계산초로(溪山樵老)이다.

추사는 김수근과는 별로 가까이 지낸 것 같지 않지만 철종 때의 명신으로 알려진 김수근의 아들 김병학이

추사의 글씨를 좋아하여 잘 따랐던 것 같다. 『완당선생전집』에 김병학에게 보낸 편지가 두 통 실려 있는데

모두 글씨에 관한 내용들이다. 또 김수근의 비문은 김병학이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완연한 추사의

글씨로 보여져 사람들은 추사의 글씨에 이름만 김병학이 쓴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라 한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溪山無盡>은 김병학이 추사에게 부탁하여 써준 것으로 추정된다.


추사는 한 작품 안에 전(篆), 예(隸), 해(楷), 행(行), 초(草)를 섞어 쓰기를 잘했다. 추사 스스로 옛 대가의

글씨를 보면 이처럼 서체를 종횡으로 구사한 예가 많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추사 글씨의 ‘괴’는 그런 각체의

능숙한 혼용에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추사의 파격적이고도 아름다운 글씨를 말할 때면 누구든 먼저 손꼽는

명품이 <畫法有長江萬里(화법유장강만리)>이다. 이 대련은 내용 자체가 빼어난 예술론이라 할 명구이다.


“畫法有長江萬里 書勢如孤松一枝

 그림 그리는 법에는 양자강 일만리가 다 들어 있고

 글씨의 뻗침은 외로운 소나무의 한 가지 같네“



[김정희 <畫法有長江萬里>, 129.3 x 30.8cm, 간송미술관]


글씨의 골격은 예서지만 낱낱 획의 구사에는 해서법과 행서법이 섞여있다. 능숙한 변형이 아니라면 글씨가

기괴하고 말았을 터인데 추사의 능숙함은 그것을 오히려 변화의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렸다. 이 대련의 협서에서

추사는, 진실로 문서향 서권기가 넘치는 서화란 정신에 있는데, 요즘 서화가들은 그 정신은 갖추지 못하고

형태만 흉내내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근자에 마른 붓과 밭은 먹을 가지고서 억지로 원나라 사람의 황한(荒寒)하고 간솔(簡率)한 것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모두 자신을 속이고 나아가서는 남을 속이는 것이다. 왕유, 이사훈, 이소도, 조영양, 조맹부 같은 이들은

다 청록(靑綠)으로써 장점을 보였으니 대개 품격의 높낮음은 적(跡)에 있지 않고 붓에 있는 것이다. 그 뜻을

아는 자는 비록 청록, 이금(泥金)이라도 좋으며 서(書)도 역시 그러하다.”


추사가 ‘입고출신’하여 옛 전서와 예서를 자신만의 개성으로 구현한 또 다른 명품으로《초사(楚辭)》3

한 구절을 옮겨 쓴 <蘭畹蕙畝(난원혜묘)>가 있다. 작품의 글씨가 예스러우면서도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하여

마치 난초의 향기가 일어나는 것만 같다.



[김정희 <蘭畹蕙畝>, 20.5 x 99.5cm 풍서헌]


“旣滋蘭之九畹 又樹蕙之百畝

 이미 아홉 정보에 난을 심었는데

 또 혜란4을 백 평에 심도다“



이 글은 유홍준著『완당평전』(2002, 도서출판 학고재)의 해당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 비는 현재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원씨현(元氏縣) 봉룡산(封龍山) 소재 천불동(千佛洞) 한비당(漢碑堂)에 소장돼 있다. 신군비는 높이 2.4m에 가로 0.81m, 두께 0.17m이며, 원래는 백석산 백석신군사(白石神君祠)라는 사당에 안치되어 있다가 명(明) 만력 연간에 인지현(仁知縣)에서 개화사라는 사찰로 옮겨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현 위치에 보존되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논어 ‘옹야(雍也)’편에 있는 원문은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로 ‘내용이 겉모습보다 뛰어나면 투박하고(촌스럽고), 겉모습이 실질적 내용보다 뛰어나면 형식적이게 된다. 겉모습과 실질을 다 갖추어야 비로소 군자다운 것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굳이 해석한다면 史野는 ‘세련됨과 싱싱함’이 아니라 ‘겉만 화려함과 촌스러움’이라는 부정적인 뜻이다. 아마도 추사는 ‘君子’를 의미하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이 글자가 겹치는 것 때문에 생각을 역으로 바꾸어 ‘史’하거나 ‘野’하지 않다는 의미로 를 쓴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본문으로]
  3. 중국 초(楚)나라의 굴원(屈原)과 그 말류(末流)의 사(辭)를 모은 책. 16권으로,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초나라 회왕(懷王)의 충신 굴원(BC 3세기경)의 ‘이소(離騷)’와 25편의 부(賦) 및 후인들의 작품에 자작 1편을 덧붙여 편집했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4. ‘한 줄기에 예닐곱 송이가 피며 향이 적은 것이 혜(蕙)’라고 하는데, 한 종류를 지칭하지 않고 일경다화(一莖多花)성인 난을 통틀어서 혜(蕙)라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잎이 넓고 크며 무늬가 들어 있는 난을 혜란이라고 부른다. (동양란 배양과 감상, 2013. 시간의 물레)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