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41 - 석노시(石砮詩)

從心所欲 2018. 9. 26. 15:53

추사는 북청 유배시절에도 제주도 유배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책을 집에서 가져다 독서를 했고 또한 서정시를 여러 편 남기기도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그곳 문사들과 만나 학문과 예술과 서정을 교류하면서 북청의 숨은 인재를

열심히 서울로 추천해 올렸다.

 

그러면서도 역사와 지리, 금석학에 해박했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북청 곳곳에서 발견된 석노(石砮)라고 부르는

돌화살촉을 고증하여 숙신(肅愼)의 유물로 판정하였다. 현대의 고고학과 미술사적으로 말하자면 청동기시대 유물로 대개 기원전 5세기 무렵, 즉 고조선 말기이니 그때의 북청지역이라면 당연히 숙신1의 유물이라고 고증한 것이다.

 

추사는 청나라 학자들과의 잦고 깊은 교유 때문에 당시로서는 국제적 감각의 지식인이었지만, 동시에 사대주의적

경향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하지만 추사는 민족적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였고 민족의 대륙적 기상과 북방적 기질을

사뭇 동경해온 인물이었다.

그것은 그가 읊은 영사시(詠史詩)2들 모두에 조선의 북진(北進)과 강국(强國)에의 희망이 들어 있음에서 엿볼 수 있다.

북청으로 유배 오던 길, 함흥의 만세교에서 읊은 시의 첫 구절을 “진흥왕 북수하던 때를 생각하니(緬憶眞興北狩年)” 라고 했던 것도 그런 기상의 표현이었다.

추사는 북청에서도 그런 북진의 기상을 계속 노래했다. <연무당(鍊武堂)>이라는 시에서는 고려시대 윤관3(尹瓘) 장군이 공험진(公嶮鎭)4에 성을 쌓고 여진족의 침벌을 막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물고기 새 바람 구름이 그려져 있는 누각 동쪽

여섯 성의 한 길이 보루로 통하누나

없어진 나라의 선춘령(先春嶺) 자취

그때의 윤관 장군이 슬프고 원망스럽네

魚鳥風雲畫閣東

六城一路垜頭通

殘山剩水先春迹

惆悵當年尹侍中

 

유홍준 박사는 예전에 어느 개인 소장가 집에서 추사가 장중한 예서체로 쓴 ‘발해(渤海)’ 두 글자를 쓴 대자

현판을 본 적이 있다고도 했다. 북청은 옛 숙신 땅이고 발해(渤海)가 옛날에 차지했던 땅이었다. 추사는 자신의

귀양살이 굴피집이 있는 성동(城東)이 곧 대조영(大祚榮)의 발해 5경(京) 15부(府) 중 남경(南京)쯤 되는 곳

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여름날 지은 시 <성동피서(城東避暑)>는 첫 행부터 대조영으로 시작했다.

 

발해[大氏]의 남경(南京)땅 붉게 물든 저녁노을

산천은 오히려 웅대한 포부 기상 여전하네.....

大氏南京夕照紅

山川猶記覇圖雄....

 

추사는 또한 북청시절의 역작(力作)으로 평가되는 <석노시(石砮詩)>를 지어 돌화살촉을 노래했다.

시 앞머리에는 “돌도끼[石斧]와 돌화살촉[石砮]이 매양 청해(북청) 토성에서 나오는데 이곳 사람[土人]들이 토성을 숙신의 옛 물건[古蹟]이라고 하기에 이 시를 짓는다”고 밝혔다. 추사의 이 <석노시(石砮詩)>는 북청 유배시절의 대표적인

시이자 대표적인 글씨이다. 추사는 이 시를 남에게 많이 써주었던 듯, 그 본이 여럿 전하고 목각으로 된 것도 있다.

그 중 최고 명작으로 치는 것은 호암미술관 소장본으로 오세창이 표제를 쓰고 권인돈, 인보 같은 이들의 발문과 시가 들어 있다.

 

[김정희 <석노시> 첫 면, 1852, 32.2 x 340.5cm, 호암미술관]

 

 

 

[김정희 <석노시> 마지막 면, 1852, 32.2 x 340.5cm, 호암미술관]

 

추사는 1852년 한여름 어느 날, 낮잠을 자던 중에 고향이 더욱 지척으로 보이는 꿈을 꾸었다.

 

"은혜로운 솔바람 분수 밖에 서늘하여                

포도시렁은 지금의 빛깔을 끼고 있네                

특별히 내 고향이 지척을 이뤘으니                   

청산의 한 터럭이 과히 먼 게 아니로세              

松風分外占恩凉

攝轉葡萄現在光

特地家鄕成尺咫

靑山一髮未曾長"

 

그리고 그 해 8월 13일에 해배의 명이 내렸다. 『일성록』에 의하면 철종3년 8월 13일조에 임금이 권돈인과

김정희를 석방하라는 전교를 내리자 승정원에셔 즉시 반대하는 계(啓)를 올렸다. 이에 대하여 임금은 “승정원은

삼사(三司)와 다르다. 즉시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다시 삼사가 들고 일어나 그 후로 약 보름간 전교를

철회할 것을 계속 상소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전교를 바꾸지 않았다.

 

추사가 북청에서 돌아와 자리를 잡은 곳은 유배 가기 전의 용호의 강상이 아니라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

이었다. 과지초당은 추사의 부친 김노경이 살아 생전 잘 나가던 시절에 마련해둔 별서(別墅)였다. 또한 김노경이

72세 되던 1837년에 세상을 떠나자 추사는 선친의 묘소를 과지초당 뒷산에 마련하고 여막(廬幕)에서 3년상을

치루기도 했었다. 5년 전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와 강상에서 살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선친의 묘소를 다녀간 

다시 이렇게 과지초당을 집으로 삼아 찾아온 것이다. 

 

 

 

『완당평전』(유홍준著, 2002, 도서출판 학고재)을 근간으로 하여 다른 자료들을 참조, 임의 가필, 재구성한 글입니다.

 

 

 

  1. 숙신(肅愼) : 기원전 6∼5세기 중원(中原), 북계(北界)를 비롯한 산둥반도(山東半島) 및 만주 동북부 지역에 살았던 종족. 중국의 고전인 국어(國語), 좌씨전(左氏傳), 일주서(逸周書), 사기(史記), 회남자(淮南子), 산해경(山海經)등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식신(息愼), 직신(稷愼)이라고도 하며,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사용하는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朝鮮)이라는 왕조명을 갖기 이전에 고조선인들을 부르던 호칭으로 보기도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문으로]
  2.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읊은 시. 영사(詠史), 사시(史詩) 라고도 한다. 역사상의 저명한 인물이나 중대한 사건을 소재로 작자의 감개(感慨)나 의론(議論)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서사시(敍事詩)의 한 양식으로도 볼 수 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본문으로]
  3. 윤관(? ~ 1111) : 고려시대의 명신(名臣)이자 명장(名將). 여진을 정벌하다 실패해 별무반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여진 정벌군의 원수로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했다. 그 뒤 여진은 9성의 환부와 강화를 요청했고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정세가 바뀌자 여진정벌의 실패로 모함을 받아 벼슬을 빼앗기고 공신호마저 삭탈되었으나, 왕인 예종의 도움으로 다시 신원되었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4. 공험진(公嶮鎭) 9성의 위치에 대한 학설이 분분한 가운데 공험진의 정확한 위치도 이에 따라 서로 다르다.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전기 관찬사료를 따라 두만강 이북에 비정하는 입장은 공험진이 소하강(蘇下江) 강변에 있었다고 본다.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를 해석한 정약용(丁若鏞)의 견해에 따른 길주(吉州) 이남설은 마운령과 마천령 사이를, 고적답사를 통하여 주장한 함흥평야설은 함흥군 대덕리산성에 비정하였다. (두산백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