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40 - 북청 유배

從心所欲 2018. 9. 16. 18:26

 

추사는 철종 2년인 1851년 7월, 다시 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명받는다. 예송(禮訟)1에 휘말려 안동김씨의

공격을 받던 권돈인의 배후로 지목된 까닭이었다. 이는 무고(誣告)였지만 추사는 북청으로 떠나야 했고, 권돈인

은 강원도 화천으로 중도부처(中途付處)2 되었다.

어렵사리 강상에 터를 잡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독서와 서화로 마음을 달래던 추사로서는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두 아우 명희, 상희도 향리로 추방되었다. 그 때의 심정을 추사는 몇 달 뒤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밝혔다.

 

“ 나는 동쪽에서 꾸고 서쪽에서 얻어 북청으로 떠날 여비를 겨우 마련했지만 아우 명희와 상희는 그 가난한

살림에 어디에서 돈이라도 마련하기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 26신)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제주 때에는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였지만 북청 유배는 고을 권역

안에서는 자유로운 군현안치였다. 추사의 귀향길은 포천, 철원, 회양, 칠령을 거쳐 함흥으로 들어가 거기서

북청으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북청 유배지에 도착하기 며칠 전, 추사가 아우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 과정이

상세히 담겨있다.

 

“우리는 (8월) 12일에 (회양)을 출발하여 물이 가로막은 곳과 지극히 위험한 지역을 어렵게 건넜다네.

작은 시내가 어깨를 넘고 이마까지 감기는 깊은 물도 평지처럼 지나왔는데, 큰 내는 무릇 28곳이나 건넜고,

보통 소소한 냇물은 일일이 셀 수도 없네. 20일에 비로소 함흥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물렀는데, 또 비가 내려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네. 갈 길이 사흘 일정밖에 되지 아니하여 22일엔 비를 무릅쓰고 나아갔는데, 곳곳에

물이 불어 길을 막았네. 26일에 비로소 이곳에 이르렀는데, (북청)읍과의 거리는 5리 남짓 남았다네. 큰 내는

배로 건너고 작은 내는 어렵게 건너 일행이 동문(東門) 안 배씨(裵氏) 집에 다다라 지금 병영(兵營)의 조치를

기다리고 있네.”

 

 

천신만고 끝에 북청에 들어가 추사가 머물게 된 곳은 ‘북청 성동(城東)의 화피옥(樺皮屋)이라고 했다.

화피옥은 자작나무 껍질로 이어 붙여 지은 굴피집이다. 추사는 북청에 도착한 자신의 모습을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저는 28일의 홍수에 막히고 30일의 비바람을 겪고 나서 이곳 성동의 굴피집에 도달하여 겨우 남은 목숨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지(冬至) 이후부터 황달기가 얼굴에 나타나서 완연히 일개의 황면노담(黃面老曇)이 되었으나, 의약을 쓸 길이 없어 꼭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또 무슨 인연인지, 병기(病氣)가 가시어 수일 이내에 점차로 누런 빛은 바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기가 이미

손상되었으니, 또 무엇을 바라며 또 무엇에 연연하겠습니까? 그러니 동백산중(桐柏山中)에 들어가 나란히 밭 갈자던 옛 약속은 아마도 산과 계곡의 조롱거리만 될 듯 합니다.“ (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 26신)

 

추사는 북청에서 또다시 벗, 제자들과 끊임없이 서신을 교류했다. 하소연의 대상으로는 권돈인과 초의가 제격이었겠지만 권돈인도 유배에 처한 입장이고 초의는 해남까지 가는 길이 먼 탓이었던지 북청시절 추사가 두 사람에게 보낸 서간은

아주 드물다.

북청 유배시절 추사에게 편지로 큰 위안이 된 이는 강상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던 동암(桐庵) 심희순(1819 ~ ?)이었다.

추사의 강상시절과 북청시절에 심희순은 삼사(三司)의 여러 요직을 지내고 있었으며 추사가 타계하는 1856년에는

이조참의, 이듬해엔 대사성을 지낸 인물이다.

본래 추사의 집안과 심희순의 할아버지인 심상규와는 가까이 지내면서도 정치적 입장이 달랐다.

그러다 1827년 심상규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탄핵을 받아 면직되었는데 이때 부교리였던 추사가 심상규를 논죄한 것이 실록에 실려 있다. 그런 껄끄러운 사이임에도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 되어 추사가 심희순의 서예를 지도하였고 『완당선생전집』에는 심희순에게 보낸 편지가 30통이나 실려 있을 정도로 왕래가 많았다. 

또한 추사가 심희순에게 써준 글씨도 상당히 많았다. 그 중에서도 촉나라 예서법으로 써주었다는 <명월매화(明月梅花)>는 추사의 대표작 중 하나로, 촉한(蜀漢)의 예서에 기본을 두면서 가는 획을 구사하여 변화를 꾀한 추사체의 별격이라는평을 듣고 있다.

 

且呼明月成三友

또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好共梅花住一山

즐겁게 매화와 함께 한 산에 머물다.

 

[김정희. <明月梅花> 각폭 135.7 x 30.5cm, 간송미술관]

 

북청에서 유배의 나날을 보내던 추사에게 뜻밖의 좋은 소식이 날아왔는데 침계(梣溪) 윤정현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것이다. 윤정현은 추사의 후배이자 제자로 벼슬도 높이 올랐다. 윤정현은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고 금석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추사에게 호(號)인 ‘침계(梣溪)’를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가 30년만에 받았다는 당사자다. 윤정현이 함경도 관찰사에 부임 명을 받은 것은 1851년 9월 16일로,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 온지 불과 달포 만이다.

 

이에 대하여 사학자이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인 최완수 선생은 윤정현의 함경감사 부임은 추사의 귀양살이를 돌봐주기 위한 조정의 정치적 배려라고 보았다. 실제로 윤정현은 추사가 방송된 4개월 뒤 함경감사에서 물러났다.

윤정현이 판서에 올랐을 때 추사가 이를 축하하여 <도덕신선(道德神僊)>이라는 횡액글씨를 써서 선물한 일도 있었다. 추사체의 굳셈과 획의 능숙한 변형을 볼 수 있는 이 글씨에는 ‘침계 상서(판서)를 삼가 칭송함(恭頌梣溪尙書)’라는 제(題)까지 붙어있다.

 

[김정희. <道德神僊> 32.2 x 117.5cm, 개인소장]

 

윤정현은 함경감사로 있는 동안 황초령 진흥왕순수비를 찾아 보존하는 일을 했는데, 추사가 부탁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찍이 권돈인이 함경감사로 부임해갔을 때 추사는 황초령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보게 하여 마침내

비석 조각을 발견하고 그 탁본을 얻어 본 뒤 「진흥2비고」를 저술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권돈인은 당시 이 비를 추사가 원하는 대로는 보존하지 못했다. 서른한 살 때 직접 북한산 비봉에 올라,

그 때까지 전설적 스님인 도천국사의 비(碑)로만 알려져 있던 신라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했던 추사로서는, 이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윤정현에게 이 비를 다시 찾아보도록 부탁했을 것이다. 당시 두 사람 간에 오간 간찰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육당 최남선은 모든 정황으로 보아 이는 추사의 극성에 가까운 열정과 그 집요함을

잘 알고 있는 윤정현이 받들어 시행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초령 순수비는 모두 네 동각으로 깨져 있었다. 그 중 제일 큰 몸체는 권돈인이 찾아냈고 윤정현은 권돈인이 찾지

못했던 우측 하단과 잔편을 찾아냈다. 그리고 왼쪽 아래의 일편(一片)은 1931년에 발견되어 보철되었지만 오른쪽

윗부분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眞興王巡狩婢)3]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탁본4]

 

 

윤정현은 비를 원래의 위치인 황초령 고갯마루까지는 올리지 못하고 황초령 아래, 중령진(中嶺鎭)으로 옮겨 세워놓고

거기에 비각을 지어 보호하도록 조치하였다. 황초령비를 비각 안에 안전하게 옮겨 놓은 윤정현은 그 옆에 작은 이건비(移建碑)를 세워 그 과정을 적어놓았다.

 

[윤정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이건비> 탁본]

 

또한 윤정현은 추사에게 비각에 걸 현판 글씨를 써달라고 청했다. 이에 추사는 황초령비와 어울리는 금석기가 넘치는

예서체 글씨를 써주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진흥복수고경(眞興北狩古竟)>이다.

 

[김정희, <진흥북수고경>현판,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2자 3행으로 씌여진 이 현판 글씨는 장쾌한 기상과 대담한 변형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글씨의 구성이 스스럼없고

천연스러워 마치 추사가 숨 한번 고르고 단숨에 써내려간 듯한 힘과 동세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운필은 서법에 맞고 형태는 보이지 않는 질서로 잘 짜여져 흐트러짐이 없는 이것이 바로 추사체의 진면목이다.

추사는 이후에도 황초령비 재발견 작업이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듯 <진흥북수((眞興北狩)>라는 작품을 따로

남기기도 했다.

 

 

 

 

『완당평전』(유홍준著, 2002, 도서출판 학고재)을 근간으로 하여 다른 자료들을 참조,

임의 가필, 재구성한 글입니다.

 

 

  1. 예송 : 헌종이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죽자, 안동김씨 가문은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가 왕위를 세우기 전에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인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다. 헌종의 3년 상이 끝나면서 사도세자의 형인 진종의 위패문제는 영의정 권돈인이 이끄는 반(反)안동김씨 세력과 안동김씨 간의 예송논쟁으로 번졌고 권돈인이 예론정쟁에서 패했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2. 중도부처 : 조선시대의 벼슬아치에 대한 형벌로 관원을 유배시킬 때 어떤 중간 지점을 지정하여 거기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는 3등 이하의 죄에 해당되는 것인데, 유배지는 황무지, 바닷가, 섬 등으로 지방관이 지정하였다. 귀향(歸鄕)을 허락하지 않은 대신 유배지에서 가족과의 동거는 묵인하였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3.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에 세운 순수비로, 서울 북한산(일명 삼각산) 남쪽 승가사(僧伽寺) 서남방에 위치한 비봉(碑峰) 꼭대기에 있이 순수비 부근에 승가사가 있고, 조선 태조 때의 국사였던 무학(無學, 1327~1405)의 탑비가 있어 종래 ‘무학의 비’ 또는 ‘도선(道詵)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1816년 7월에 김정희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이 비석을 조사하고, 다시 이듬해 6월 조인영(趙寅永)과 같이 비문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 비로소 진흥왕 순수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561년(진흥왕 22년) 창녕비가 건립된 뒤부터 568년(진흥왕 29년) 황초령비와 마운령비가 건립되기까지의 기간 중 어느 한 시기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한편 568년 이후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현재 비봉에 있는 비는 모조품이다.(우리역사넷) [본문으로]
  4.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는 추사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비문이었다. 추사는 이 비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여 글을 썼을 뿐 아니라 고졸한 글씨체를 본받기도 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