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37 - 추사의 별호(別號)

從心所欲 2018. 8. 10. 12:47

 

우리는 늘 ‘추사 김정희’로 기억하고 ‘추사 김정희’로 부른다. 그러나 김정희의 호가 ‘추사’만 있었던 것은아니다.

30세 이후에는 오히려 추사보다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더 즐겨 썼다. 뿐만 아니라 김정희는 항상

그때의 상황, 그때의 심정, 그때의 서정에 따라 새로 아호를 짓고 그것을 관지1로 나타내곤 했다. 강상시절에

쓴 호만 하더라도 노호(鷺湖), 묘호(泖湖), 삼묘(三泖), 삼호(三湖) 등이 있다. 김정희가 그런 식으로 사용한

아호, 관지, 도인(圖印)에 씌어있는 글귀는 무려 200개가 넘는다. 혹자는 이를 두고 추사의 멋이라고 하고 또

혹자는 일종의 변덕이라고 비웃지만, 역시 추사만이 가질 수 있었던 ‘怪’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자신의 거처나 글과 연관지어 예당(禮堂), 시암(詩庵), 실사구시재(實事求是齋), 소봉래학인(小蓬萊學人),

불교와의 인연을 나타낸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정선(靜禪), 불노(佛奴), 비불선비(非佛仙非), 청나라 학자

들과의 만남으로 얻은 보담재(寶覃齋), 완당(阮堂), 차와의 인연을 나타내는 승련(勝蓮), 승설도인(勝雪道人),

고다노인(苦茶老人) 등은 대략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는 편이다.

 

김정희의 아호와 도장 중에 나가산인(那伽山人)이 있다. 유명한 <雲外夢中>첩에도 나가산인으로 관지를

넣었다. 이는 예산의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 자락에 가야산이 있고, 또 추사가 33세 때 경상감사를 지내던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해인사에 갔다가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이후 그는 가야산

(伽倻山)을 뒤집어 나가산인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신미(神味)넘치는 호를 만들어낸 것이다.

추사는 불교이론에도 밝아 당대의 화엄종장인 백파와 일대 논쟁을 벌였었다. 그래서 그를 해동(海東) 유마거사

(維摩居士)라 일컬었다. 아마도 추사는 가끔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듣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에서 연유한

듯 추사가 사용한 아호 중에는 병거사(病居士), 백반거사(白飯居士)라는 호도 있다. 아마도 유마거사로 불리는

데 대한 반발이었는지도 모른다.

추사는 때로 동해서생(東海書生), 동해유생(東海儒生), 동이지인(東夷之人) 등으로 자신을 낮추다가도 과감히

동해둔사(東海遁士), 동해제일통유(東海第一通儒)라 쓰기도 했고, 경주 김씨를 돌려서 고계림인(古鷄林人)

이라고도 했으며 나중엔 그저 ‘과천 사는 늙은이’란 뜻으로 평범하고 담백하게 노과(老果)라고도 했다.

믉고 수염이 많이 나면서 ‘늙을 노(老)’자와 ‘구레나룻 염(髥)’자, ‘늙은이 옹(翁)’, ‘늙은이 수(叟)’를 종횡으로

혼합하여 노완(老阮), 나수(那叟), 나옹(那翁), 노파(老坡), 염완(髥阮), 노사(老史) 등을 사용하는가 하면 70세

때는 과천에 산다고 과칠십(果七十)이라고 하더니 이듬해에는 71세된 과천 사람이라는 뜻으로(七十一果)라고

했다. 평범함에서 특수성을 끌어내는 경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허허로움일 것이다.

 

 

[추사가 사용했던 인장(印章)들]2

 

그런가 하면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과 삼십육구초당(三十六鷗草堂)이라는 특이한 이름도 있다. 풀이를

해봤자 ‘72마리 백구가 날아드는 초당’과 ‘36마리 백구가 날아드는 초당’ 이상의 뜻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왜

72마리이고 36마리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홍현주가 「지수염필(智水拈筆)」3에서 그 사정을 소상히 밝혔다.

 

“추사가 근년에 잠시 용산 강상에 살 때 그 편액을 정자에 달기를 ‘칠십이구정(七十二鷗亭)이라고 하였다.

이를 본 사람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어찌하여 72마리의 백구입니까?‘라고 하였더니 추사가 웃으면서 대답하기

옛사람이 사물이 많음을 가리킬 때 대개 72라고 했다는 것이다. 관중이 제나라 환공과 마주하여 선문답을 할

운운정정72처(云云亭亭七十二處)로 대답했고, 위나라 무제는 의심하여 말하기를 72라 했고, 한나라 고조

왼팔이었던 흑자 또한 72를 말하였으니, 이는 다 많다는 말이지 바로 그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제 내가 강상에 있자 하니 많은 백구가 날아드는 것을 보게 되어 나 또한 72구로 정자의 이름을 삼으려고 한다.

어찌 괴하다고 하겠는가! 추사의 말에는 참으로 판연(判然)한 데가 있다.”

 

 

추사의 아호에는 이처럼 깊은 의미와 내력이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웃음이 절로 나는 유머 감각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뛰어난 은유와 상징으로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주기도 한다. ‘삼식육구초당’이 바로

그런 경우다. 36은 72의 반을 의미하는데 이는 강상에 날아드는 백구가 그때는 잠시 반 정도 적게 날아들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칠십이구초당’ 이라고 사인하려다 반으로 줄여 ‘삼십육구’

라 한 것일 수도 있다. 추사에게는 그런 기발함과 유머가 많았다.

 

[김정희 <三十六鷗草堂>, 31.0 x 131.0cm, 순천제일대학 임옥미술관]

 

 

추사는 글자에서 소리만 남기고 뜻을 뒤집어 전혀 다른 아호를 만든 것도 있다. 노호(老湖)가 바로 그런 경우

인데 이는 바로 노호(鷺湖)를 고쳐 부른 것이다. 추사가 노호(鷺湖)시절인 1849년에 황간 관아로 보낸 편지

중에는 봉투에 ‘물가에 사는 늙은이는 아직도 병(病)중’이라는 의미의 ‘노호유병(老湖留病)’이라고 쓴 것이

있는데 누가 이 아호만 보고 추사 편지인 줄 알 수 있었을까?

추사의 아호 중에는 아직도 그 정확한 내력이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상당수 있다. 석감(石敢), 단파(檀波),

고우산인(古嵎山人)......그 가운데 상하삼천년 종횡십만리(上下三千年 縱橫十萬里)라는 것도 있다. 이에 대해

역시 홍현주가 「지수염필」에 그 내력을 적어놓았다.

 

“추사는 평소에 스스로 호를 많이 지었다. 어릴 때 일찍이 그 거실에 ‘上下三千年 縱橫十萬里之室’이라고

편액을 달았는데 나는 항상 그 말을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훗날 어느 글을 보는데 조맹부가 이미 

말을 사용하였고 또한 청나라 염약거가 황종희의 제문을 쓰면서 말하기를 ‘상하오백년종횡일만리로 박학하고

정밀한 학자를 세 사람 들 수 있으니 한 분은 고정림 처사이고 한 분은 우산 전종백이며 또 한 분은 황종희 선생

이다’라고 했다. 대체로 추사의 편액에서 취한 것은 이런 뜻이다.”

 

추사는 소싯적부터 자부심이 참으로 대단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가 아호와 편액에 이렇게 깊은 내력을 담는 것도

퍽 오래된 일임을 알게 하는 일화다. 추사의 아호는 그 자체의 의미와 멋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작품의 제작 연대를 판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노호, 삼호, 묘호, 칠심이구초당주인,

삼십육구초당주인 등의 관지가 들어있는 작품은 대개는 강상시절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강상시절 이후의 것임을

추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추사의 호는 모두 343개라는 설도 있고 503개라는 설도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추사(秋史)와 완당

(阮堂)이다. 중국으로 가기 전, 그러니까 23세 때인 1808년까지의 호(號)는 현란(玄蘭)이었다고 한다. 검고

깊으며 심오하다는 뜻을 지닌 '현(玄)'과 난초를 의미하는 '난(蘭)'이다. 그러다 1809년 중국 연경(燕京)으로

갈 때 '추사(秋史)'라는 호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관지(款識) : 원래는 고대 중국의 예기(禮器)인 청동기에 새긴 글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로부터 유래하여 글씨나 그림을 완성한 뒤 작품에 이름, 제작 장소, 연월일 등의 내용을 적은 기록을 관(款) 또는 관지(款識)라고 하며 관기(款記), 관서(款署)라고도 한다. 이러한 관지를 화면에 기입하고 도장을 찍는 행위를 ‘낙성관지(落成款識)’라 하며 흔히 줄여서 ‘낙관(落款)’이라 부른다. [본문으로]
  2. 추사의 도장(圖章)은 수십 점이 남아 있으며, 추사의 도인(圖印)을 모아 인보(印譜)로 엮은 첩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양을 담고 있는 「완당인보」는 추사의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제자이자 필장(筆匠)인 박혜백이 소장했던 것으로 무려 180개가 수록되어 있다. 「완당인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오세창은 「근역인수(槿域印藪)」에 추사의 도장 70개를 수록했었다. [본문으로]
  3. 홍현주(洪顯周, 1793∼1865)는 정조의 둘째딸인 숙선옹주와 혼인하였고 시인으로서 이름을 얻었다. ‘운외몽중‘첩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고금의 문물제도와 문인, 학자 등에 대한 광범위한 자신의 견문을 수필 형식으로 기록한 문집이 지수염필(智水拈筆)이다. 8권 4책으로 되어 있으며 제8권에 추사를 비롯하여 정약용(丁若鏞), 이서구(李書九) 등과 중국 청대(淸代)의 문인, 학자 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한국민족대백과에는 지수점필로 소개되고 있는데 ‘拈‘자는 ’집을 념(염)‘과 ’(무게를)달 점‘의 두 가지로 읽는데서 온 혼선으로 보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