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36 - 강상시절 3

從心所欲 2018. 8. 9. 13:29

추사가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자래로 다양한 조형미를 보여준 작품은 아주 많다. <은지법신銀地法臣>은 전서·

예서·행서가 어울린 작품이다. 추사의 전서체 중 현대적인 멋스러움이 한껏 구사된 작품으로 산들바람에 슬쩍

기운 듯한  글씨의 뉘움새에 법열(法悅)에 들어가는 정신적 해탈감이 느껴진다고 유홍준 박사는 평했다. 은지

(銀地)는 절집을 뜻하고 법신(法臣)은 부처를 뜻한다.



[김정희 <은지법신銀地法臣> 28.8 x 121.1cm, 풍서헌]


이에 비하여 <석금실石琴室>은 예서에 기반을 두면서 글자 획의 흘림에 자유분방함을 주어 변화의 멋을

작품이다. 기이한 것은 '돌 석(石)'자 안의 '입 구(口)'를 너무 작게 써서 글자의 균형이 일그러져 있지만 글씨

전체의 구성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멋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石琴室> 현판은 필획의 구사가 힘 있고,

글자 구성이 파격적이지만 보면 볼수록 아담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취미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많아서 혹자는 글씨가 너무 예뻐서 그것이 약점이라며 좀 더 야취(野趣)가 서려있어야 추사다운

제멋이 난다고 말하기도 한다.


[김정희 <石琴室>, 28.5 x 120,5cm, 개인소장]


추사의 글씨는 이처럼 해·행·초·예·전서를 넘나들며 글씨를 재구성하면서 추사체의 멋과 개성과 괴(怪)를

이루어낸 면이 많다.  추사는 강상시절에 이처럼 많은 명작을 남겼다. 그래도 그 중에서 대표작을 꼽는다면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가 될 것이다. 


[김정희 <殘書頑石樓>, 31.9 x 137.8cm, 개인소장]


유홍준 박사는 "낡은 책, 무뚝뚝한 돌이 있는 집"으로 해석했지만 근래에는 대체로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씨가

완악(둔탁하고 고집스러움)하게 새겨져 있는 돌이 있는 누각’ 혹은 ‘고비(古碑) 파편을 모아둔 서재’로 해석하는

경향이다. 낙관이 '삼십육구주인'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성미가 확연히 두드러지는 서풍(書風)이 역시

강상시절 특징이 역력하다. 마치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들이 축축 늘어진 듯한 분명한 리듬감이 있다. 이 글씨의

중후하면서도 호쾌하고 멋스러움, 그리고 기발한 구성에 대하여 임창순 선생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글씨에는 전서·예서·행서의 필법이 다 갖추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쾌한 운필이 아니라 오히려 중후한

맛을 풍긴다. 글씨 전체의 구도를 보면 위쪽 곧 가로힉을 살려 가지런함을 나타냈고 하부는 여러 가지 형태의

세로획을 들쭉날쭉하게 써서 고르지 않지만 전체의 조화는 잘 이루어져 있다. 이런 구도는 일찍이 다른 

서예가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다."


글자의 변화는 심하지 않지만 붓끝의 힘은 종이를 뚫을 듯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감을 전해주는 이 글씨에서

추사의 금석기(金石氣)를 느낄 수 있다는 평도 있다.  <殘書頑石樓>와 같은 조형 의도에서 쓴 또 다른 명작이

<사서루賜書樓>이다. 임금에게 책을 하사받은 것을 기념하여 붙인 서재 이름일 텐데 이 현판이 누구의 서재를

위하여 쓴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김정희 <賜書樓>, 27.0 X 73.5cm, 개인소장]


<賜書樓> 역시 예서체의 중후한 골격을 기본으로 행서의 자율적인 변형을 기한 작품으로, 글씨의 머릿줄을

가지런히 하고 하단을 자유자래로 풀어주어 힘과 변화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내리긋는 획(劃)은 모두

기둥뿌리처럼 든든하게 하고 가로 삐친 횡획(橫劃)은 서까래 같은 기분까지 내었다. 절정에 이른 추사 글씨의

탁월한 조형미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