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33 - 영영백운도, 시우란

從心所欲 2018. 7. 16. 07:21

추사와 같이 정쟁에 휘말려 유배를 가는 경우는 유배 생활 자체가 고통스럽다기보다는 권력의 중심에서

추방되어 정치·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따르고 고립되는 데 따른·심리적 고통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배생활의 육체적 고통도 신체의 억압에 따른 것 보다는 낯선 풍토와 식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질환에

의한 고통이 대부분이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갇혀 두문불출하며 혼자 외롭게 책을 읽거나 글씨를 썼을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과 달리 추사는 제주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제주도로서는 뛰어난 유배객을

맞는다는 것은 뛰어난 선생을 얻는 셈이었다. 유배객들 또한 그들을 교육시키면서 학자로서의 보람과 삶을

유지하는 활력을 얻었을 것이다 추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추사의 제자이기도 한 민규호1 자신이 쓴

「완당김공소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귀양 사는 집에 머무니 멀거나 가까운 데에서 책을 짊어지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장날같이 몰려들어서 겨우

두어 달 동안에 인문이 크게 열리어 문채(文彩)나는 아름다움은 서울의 기풍이 있게 되었다. 곧 탐라의 거친

풍속을 깨우친 것은 공(완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전집 권수, 완당김공소전)

 

추사가 처음 제주에 와서 본 제주의 인문(人文)은 너무나 보잘 것이 없어 추사로서는 많은 답답함과 한심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추사는 집에 연락해서 이들에게 필요한 책까지 구입해주면서 성심으로 그들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추천해 서울로 보내기도 했다. 추사는 대정향교 유생들과도 접촉이 있었는데 향교는 향교대로

추사의 학식에 신세를 지며 가르침을 얻었다. 지금도 대정향교에 전해지고 있는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이

그런 교류의 흔적이다. 추사로서는 드물게 아주 단정하게 쓴 현판의 뒷면에는 병오년(1846) 11월 추사가 썼고

향원(鄕員) 오세뵥이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괴롭고 힘든 가운데서도 추사는 귀양살이에 점점 익숙해져가며 제주의 퐁토와 자연을 관조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추사는 그것을 시로 읊기도 하고 제주 자연의 아름다움을 벗 권돈인에게 편지로 전하기도 하였다.

제주의 자연과 서정에 젖어들면서 추사는 자신의 당호를 귤중옥(橘中屋)이라 지으면서 그 뜻을 이렇게 말했다.

 

"매화, 대나무, 연꽃, 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내 고을의 전유물이다. 겉과 속이 다 깨끗하고 빛깔은

푸르고 누런데 우뚝한 지조와 꽃답고 향기로운 덕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므로 나는 그로써 내 집의

액호(額號)를 삼는다." (전집 권6, 귤중서옥)

 

어쩌면 추사가 살던 '귤중서옥'을 그린 것일지도 모르는 제주시절의 그림이 있다. <영영백운도(英英白雲圖)>

이다. 이 그림은 고담한 문기(文氣)가 있는 가품(佳品)으로 멀리 있는 벗을 그리워하는 시를 화제로 붙였는데

글씨 또한 제주도 시절 글씨의 풍을 엿보게 한다.

 

[김정희, <영영백운도(英英白雲圖)>,종이에 수묵 23.5 X 38.0cm]

 

추사는 제주시절에 난초를 자주 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훗날 추사가 <불이선란(不二禪蘭)>을 그리면서

"난초를 그리지 않은 지 하마 20년(不作蘭花二十年)" 이라고 한 구절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20년 동안 난초를 전혀 그리지 않았다는 의미보다는 40대 후반에 <난맹첩>을 그리고 나서 60대에 들어서야

다시 본격적으로 난을 그렸다는 뜻일 것이다. 비록 제주시절에 추사가 난초를 즐겨 그리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그렸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권돈인을 위하여 그린 난초그림도 그 중 하나다. 그림 오른쪽에는

'정희'라는 도인(圖印)과 '번상촌장(樊上村庄)에 공손히 바침(勻供)'이라는 낙관이 들어 있다. 번상촌장은

번리(樊里)에 있던 권돈인의 별서 이름이다.

 

[김정희, <증 번상촌장 난>, 1848년, 32.2 x 41.8cm,  개인소장]

 

 

이 난초그림을 받은 권돈인은 너무도 마음에 들었던지 스스로 제화시를 그림 좌측 상단 넓은 여백에 써넣은 뒤

자신의 감상인, 소장인을 찍고 '무신년(1848) 중추(仲秋)에 번상(樊上)이 제(題)하다'라고 썼다. 무신년은 추사 나이 63세 때로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난 해이다.이 난초그림을 보면 추사의 난초그림도 제주도 유배시절, 그것도 막바지에 이르면서 <난맹첩>과는 다른경지를 보이고 있다. 야취(野趣)2가 강하고 농담의 변화가 크며 부드러움보다는 굳셈이 더 강조되고 있다.제주시절 추사가 그린 또 하나의 난초그림으로 보통 <시우란(示佑蘭)>이라고 불리는, 서자 상우에게 그려서보여준 난초그림이 있다. 이 작품에는 간기가 씌어 있지 않으나 그림과 화제의 글씨 그리고 제작 배경으로 보아 유배시절 제주도로 찾아온 서자 상우를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우는 진작부터 난초그림에 관심이 많았던지 『완당선생전집』에 실려 있는 상우에게 보낸 편지는 난을 치는 법에 대한 가르침만으로 되어 있다. 추사는 이런 상우에게 난을 처 보이고는 이렇게 화제를 썼다.

 

"난초를 그릴 때는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마음속에부끄러움이 없게 된 뒤에 남에게 보여줄 만하다. 열 개의 눈이 보고 열 개의 손이 지적하느 것과 같으니 마음은 두렵도다. 이 작은 기예도 반드시 생각을 신실하게 하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正心) 출발해야 비로소 시작의 기본을 얻게 될 것이다. 아들 상우에게 써 보인다."

 

[김정희, <시우란> 23.0 X 85.0cm 개인소장]

 

추사가 아들에게 시범을 보인 이 그림은 권돈인에게 그려준 것보다 필법이 훨씬 정법(正法)에 가깝다고 한다. 아들에게 모범을 보이려는 의도때문 일 것이다. 이 그림은 2014년 6월 26일 실시된 경매에서 10억 4천만원에 낙찰되었다.


햇수로 9년간 계속된 추사의 제주유배는 헌종 14년인 1848년 겨울, 12월 6일에 마침내 끝이 난다.

만으로 8년 3개월 만의 석방이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민규호(1836 ~1878) : 황산 김유근과 추사 김정희를 존경하여 황사(黃史)라는 호를 썼다. 1868년 ‘완당집’을 펴냈다. 고종 친정 하에서 척신으로 우의정을 지냈으며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여 개국론을 내세웠다. 예서, 행서, 초서에 능했다. [본문으로]
  2.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흥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