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31 - 30년만에 쓴 글씨

從心所欲 2018. 7. 11. 11:07

 

추사는 제주도 유배시절에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탁을 받아 많은 글씨를 써주었다 한다.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아래로는 제주도 관리까지, 멀리는 중국 연경으로부터 가까이는 집안의 형제와 벗의 요구까지 추사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써야하는 글빚, 글씨빚을 지고 귀양살이를 헸디. 종이와 먹이 넉넉지 않아 마음껏 시필(施筆)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고 몸이 아파 편지조차 못 쓸 때도 있는데, 부탁한 사람들은 그런 사정을 모르고 재촉만 하니

추사로서도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남이 부탁한 글을 쓰는 경우에는 그 문장이

사리에 맞는지, 고전에 어긋남이 없는지를 가려야 했지만 확인해볼 문헌자료가 곁에 없었다.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혹자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추사 정도라면 어떤 글씨라도 바로 일필휘지로 써낼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의미 전달을 위한 목적의 글씨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으로서의글씨를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화가가 화폭에 붓을 대기 전 그림에 대한 구상을 하듯 글씨를 쓰는 사람도 필의(筆意)를

다듬는다. 필의를 다듬는 것은 써야하는 소재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라 오랜 기간 수없이 많은 글씨를

써온 추사 김정희라면 언제 어디서라도 능숙하게 해냈을 법도 한데 워낙 깐깐한 추사는 그런 의례적인 과정도 

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추사가 쓴 침계(梣溪)라는 현판 글씨가 있다. 침계는 김정희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 윤정현1의 호(號)이다.

지금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이 작품은 한나라 때 예서체의 준경하면서도 멋스러운 자태, 삐침과

파임의 울림, 금석문이 지닌 고졸하면서도 정제된 맛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명작으로 추사의 횡액 글씨 중 명품

으로 손꼽히는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추사 김정희, <梣溪>,  추사 만년인 1851∼1852년경 작품으로 추정]

 

큰 글씨로 쓴 梣溪 왼쪽 8행으로 된 발문 내용은 이렇다.

 

"침계(梣溪). 이 두 글자를 부탁받고 예서로 쓰고자 하였으나 한(漢)나라 비문에서 첫째 글자를 찾을 수 없어서

감히 함부로 쓰지 못하고 마음속에 두고 잊지 못한 것이 이미 30년이 되었다. 요사이 자못 북조(北朝) 금석문을

많이 읽는데 모두 해서와 예서의 함체(合體)로 씌어 있다. 수나라, 당나라 이후의 진사왕(陳思王)이나 맹법사

(孟法師)와 같은 비석들은 그것이 더욱 심하다. 그래서 그런 원리로 써내었으니 이제야 평소에 품었던 뜻을

흔쾌히 갚을 수 있게 되었다."

 

부탁받은 지 무려 30년 만에 쓴 글씨라고 하였다. 매일 이 글씨 생각만 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30년 동안

고심한 끝에야 글씨를 쓸 뜻을 얻었다하니 글씨에 대한 추사의 진지함과 노력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만한 일화다. 그런 추사에게 계속되는 글씨 부탁과 재촉은 커다란 짐이었을 것이다.

추사가 해배되던 1848년 3월 제주 목사겸 방어사로 장인식이 부임해 왔다. 그의 행적에 '상현사(象賢祠)를

영혜사(永惠祠)로 개명하여 당시 제주도에 유배된 추사의 제액(題額)을 받아 현판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이 때도 장인식이 추사에게 글씨 독촉을 했던 모양이다. 이에 추사는 이렇게 답했다. 

 

"편액 글자는 이렇게 앓는 몸이 수일 사이에는 도저히 팔힘을 쓸 수 없으니 (두보가 말하기를) '서로 재촉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라고 하였듯이 조금만 늦춰 잡고 용서하면 어떻겠소." (전집 권4, 장인식에게, 제10신)

 

벗이나 제자나 집안에서 요구하는 것은 이렇게 사정을 말하며 미룰 수나 있다지만 왕명으로 글씨를 요구하면

추사는 병든 몸이라도 일으켜 혼신을 다해야만 했다. 헌종이 추사의 글씨를 얼마나 좋아햇는가는 헌종이 평소

거처하던 낙선재(樂善齋)에 완당의 현판을 많이 걸어놓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소치 허련은 낙선재로

헌종을 배알하러 갔을 때 거기서 본 추사의 현판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수문장을 따라 중화전....화초장을 지나 낙선재에 들어가니 바로 상감께서 평상시 거하시는 곳으로 좌우의

현판과 글씨는 추사의 것이 많더군요. 향천(香泉), 연경루(硏經樓), 유재(留齋), 자이당(自怡堂), 고조당

(古藻堂)이 있었고, 낙선재 뒤에는 또 평원정(平遠亭)이 있었습니다."  (『소치실록』)

 

헌종은 추사가 유배중인데도 곧잘 추사의 글씨를 요구하였다. 소치가 처음 왕명을 받고 입궐할 때 추사의 글씨를

갖고 들어오라고 했을 정도였다. 헌종이 추사에게 종이까지 보내주며 글씨를 요청하자 추사는 자신의 졸렬한

글씨를 특별히 생각해준 임금의 은혜에 감읍하였다고 막내동생 김상희에게 보내는 편지에 밝혔지만 그때 추사는

몸이 아파 제대로 글씨를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질이 더욱 심해져 도저히 붓을 들 수 없는 상태였지만 왕명에

이르러 할 수 없이 15 ~ 16일간 공력을 들여 겨우 편액 셋과 권축(券軸) 셋을 썼다고 했다.2

추사가 이때 임금의 명을 받고 쓴 현판 글씨는 <목련리각(木蓮理閣)>과 <홍두(紅豆)> 였다. 이에 대하여

추사는 위의 같은 편지에 그 내력을 이렇게 밝혔다.

 

"네 글자 편액에 대해서는 달리 넣을 만한 글자가 없어 고심하다가, 일찍이 무씨(武氏)의 상서도(祥瑞圖)

가운데 있는 말을 본 것이 기억나서 <木蓮理閣> 네 글자를 써서 올렸네..........<紅豆>의 뜻은 결국 화려함에

관계되지만 붓을 들고 잊지 못하는(巨筆不忘) 뜻에 따라 홍두시첩(紅豆詩帖) 아래에 몇 자를 써서 올린 것은

감히 잠언(箴言)의 듯을 붙인 것이네...............두 편액은 서경(西京)의 옛 법칙대로 써서 제법 웅장하고 기걸한

힘이 있어 병중(病中)에 쓴 것 같지 않았네. 이는 곧 왕령이 이른 곳에 신명의 도움이 있었던 듯하고 나의 졸렬한

필력으로 능히 이룬 바가 아니니......"

 

추사가 서한시대 글씨로 공들여 써 헌종에게 바쳤다는  <木蓮理閣>과 <紅豆> 현판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추사가 제주에서 많은 글씨를 썼음에도 나무현판이 아닌 본격적인 서예작품으로 제주도 시절에 썼다는 확실한

간기3 밝혀져 있는 작품은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런 중 <가주북두(家住北斗)>라는 예서 대련

작품이 제주 시절 작품일 것이라고 유홍준 박사는 추정했다. 일제강점기 때 이 작품이 경매에 나왔는데 작품

설명에 '예전에 제주 어느 집에서 소장했다(濟州 某家 舊藏)'라는 표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렇게 추정한 것이다.

 

 

[김정희 <家住北斗> 예서 대련, 135.5 x 36.5cm]

 

집은 북두칠성의 첫째 별 아래 있고                           

家住北斗魁星下

칼은 남쪽 창 당모양의모서리에 걸려 있네                  

挂南窓月角頭

 

글씨의 골격은 서한 시대 예서에 기본을 두었지만 추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나라 예서를 과감하게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나아가 글자에 조형적 변형을 가하면서 파격적인 예서작품을 시도하였다. 예스러운 맛과

현대적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준다. 

 

추사의 제주시절 행서로 <증인오언고시(贈人五言古詩)>가 있다. 누군가에게 써준 이 오언고시는 비록

관기(款記)4 없지만 내용으로 보아 제주 유배시절 글씨로 추정하는 작품이다. 

 

 

[김정희,  <증인오언고시(贈人五言古詩)>, 22.6cm x 33.3cm]

 

글씨의 뼈대는 귀양 오기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획의 삐침, 뻗음, 내리그음이 구양순체의 힘있는 결구를 넘어

비문 글씨의 굵고 묵직한 필획을 느끼게 한다. 이른바 금석기가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글자의

오른쪽 어깨가 올라가는 일이 없다. 이 또한 비문의 예서법이 구사된 덕분이다. 골격은 힘있고 필획은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의 면모를 갖춘 글씨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윤정현(尹定鉉 1793 ~ 1874) : 경사(經史)에 박식하고 비지(碑誌)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도 알려졌다. 1852년 함경도 관찰사 때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의 간편을 찾아내어 복원하고 비각을 세웠는데, 육당 최남선 선생은 당시 그곳에 유배되어 있던 김정희의 독려를 윤정현이 시행한 것으로 보았다. [본문으로]
  2. 완당전집 권2, 막내아우 상희에게, 제7신 [본문으로]
  3. 간기(刊記) : 동양의 간행본에서, 출판한 때,곳,간행자 따위를 적은 부분 [본문으로]
  4. 글씨나 그림을 완성한 뒤 작품 안에 이름, 그린 장소, 제작 연·월·일 등의 내용을 적은 기록. 고대 청동기에 새긴 글자를 가리키는 관지(款識)에서 유래되었으며, 관기(款記) 또는 관서(款署)라고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작자의 서명과 인장도 포함된다. 이러한 관지를 화면에 기입하고 도장을 찍는 행위를 ‘낙성관지(落成款識)’라 하는데 흔히 줄여서 ‘낙관(落款)’이라 부른다. 서명과 제작일시만 기록하는 경우는 단관(單款)이라 하고, 누구를 위하여 그렸다는 등의 언급을 하는 경우 쌍관(雙款)이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