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29 - 세한도(歲寒圖) 3

從心所欲 2018. 6. 29. 20:10

 

 

 

서양화의 구도(構圖)에 상응하는 말로 동양화에는 '포치(布置)' 라는 것이 있다. 그림을 그릴 때 주위(主位)로

가져올 것과 옆으로 돌릴 것, 점경(點景)1 등의 위치, 전후 또는 원근 관계, 전체적 균형 등을 정하는 것으로

동양화의 구도법인 셈이다.

<세한도>를 처음 접하고 그 가치를 전혀 모르는 상태라도 보는 순간 표구해서 집안 거실에 걸어두고 싶을만큼

<세한도>는 지금의 감각으로 봐도 디자인적으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안정적이고 차분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물론 끝까지 <세한도>의 가치를 모르는 경우라면 그림이 좀 아쉽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말은 역설적으로 <세한도>를 그린 추사의 심정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2008년 학술지 '미술자료' 76호에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세한도>는

'수적(數的)관계에 따라 정연하게 구상된 작품'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그림의 비례와 발문의 배치를 염두에 

둔 구도 속에서 작품을 그림으로써 탄탄한 균형감과 변화,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격조를 드러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림과 발문을 합한 <세한도>의 전체 길이는 108.3㎝인데, 그 정중앙이 맨 왼쪽 나무와

일치하고 그림의 중심축은 양끝에서 35㎝ 떨어진 노송 옆에 곧게 선 나무 밑동의 왼쪽 끝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그림을 좌우로 나눴을 때 오른쪽에는 화제와 낙관, 굵은 둥치의 노송까지 있어 왼쪽보다 무거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노송이 화면의 중심축인 소나무를 향해 기울어 있어 오른쪽의 무게감을 덜어 조형적 균형을 꾀하려한

의도가 보인다는 분석이다. 또한 발문의 글씨 윗부분에서 선을 옆으로 그으면 그 연장선이 완당이라는 글씨 밑

낙관의 아래 선과 일치하며, 발문 끝 낙관의 아래 선을 오른쪽으로 연장하면 그림에서의 지면 높이와 맞춰지게

된다(왼쪽에서 두번째 나무의 밑둥을 지나 집 오른편에 지면을 그린 마지막 부분의 끝선을 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 결과가 모두 추사가 의도한 것인지 까지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외람된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세한도>를 볼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바로 오른쪽 귀퉁이에

찍힌 주문방인(朱文方印)인데 위치가 너무 뜬금없다. 인문(印文)은 그 유명한 '장무상망(長毋相忘)'이다. 

추사가 찍은 것으로 오해하기에 딱 좋은 글귀다. 본래 글씨나 그림에 찍는 낙관도 작품의 일부라 아무 곳에

아무렇게 찍는 법이 아니다. 오른쪽 阮堂 밑의 안영(印影)은 '正喜'라는 성명인으로 백문인(白文印)이고 발문

앞 아래쪽에 찍힌 주문인은 '阮堂'이라는 아호인, 그리고 발문 끝의 주문인은 '秋史' 아호인이다.작가들이

종종 자신이 좋아하는 문구를 담은 사구인(詞句印)이라는 전각을 새겨 작품에 찍기는 하지만 추사가 이렇게 

뜬금없는 곳에 사구인을 찍어 위의 화제, 관지와 시각적으로 부딪히게 만들 리가 없다. 오세창의 <근역인수

(槿域印藪)>에 수록된 앞의 세 도장의 붉은색은 동일한데, '장무상망(長毋相忘)'은 글자나 붉은색이 모두

흐릿하다는 글이 있다. <세한도>를 소장했던 누군가가 후에 찍은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세한도>를 볼

때는 그 인영은 없는 듯이 볼 일이다.

 

<세한도>의 발문은 그림을 그렸던 거친 종이와는 달리 윤택나는 고급지에 써서 그림과 이어 붙였다. 발문은

추사 특유의 예서끼가 있는 해서체이다. 서체는 당시 중국인들이 서법의 정통이라고 여기던 구양순의 해서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구양순을 모방하지 않고 다만 그 필의(筆意)를 따르되 자신의 미감(美感)을 가미했다. 

바로 한(漢)의 예서로부터 얻은 추사 득의의 미감인 졸박함이다. 그래서 글씨에 고졸미가 가득하여 그림의

매력을 더 한층 높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졸(古拙)하다는 것은 기교가 없이 예스럽고 소박하다는 뜻이다.

서법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덕준이란 분이 '더리더(the Leader)'라는 입법국정전문지 2016년 3월호에 기고한

글에는 이에 대한 귀중한 정보들이 담겨있다. <세한도> 발문에 쓰인 문자에는  해서(正書)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문자(정자체)와 같지 않은 특이한 문자가 자주 보인다고 했다. 예를 들면 得, 徒, 後, 歲, 然 같은

글자인데 得, 徒, 後 같은 글자에서 좌측을 氵(물수 변)으로 쓴 것은 초서를 정서화(正書化)한 남북조시대

문자에서 유래한 것이고, 歲의 내부를 세 점으로 처리한 것이나 然의 아래 네 개의 점을 하나의 선으로 처리한

것도 역시 남북조시대 북위(北魏)문자에 그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購, 趨, 榜, 鄭, 切을 쓴 방법도 북위문자에서

유래한 것이며 발문에 4번씩이나 나오는 稱자 같은 경우는 북비문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당시 연경의 문사들은 남북조시기 문자를 일러 문자이해의 보고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완원의 북비남첩론,

북서파론에 힘입어 북비(北碑)의 주가가 한껏 올라가던 시대였다. 추사가 <세한도>에서 의식한 문자는 바로

그들이 문자의 보고라고 하는 북비에서 근거한 문자들이다. 물론 추사는 세한도뿐만 아니라 모든 작품에서

이러한 문자를 즐겨 사용했다. 문자를 이해하는 것 또한 추사서법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사항인 것이다2.

 

<세한도>의 발문은 이처럼 문자의 변주에 의한 효과를 보여주는 “문자향(文字香)”과 문장이 담고 있는 인문적

품격인 “서권기(書卷氣)”가 잘 드러난 추사다운 글씨인 것이다.

 

이상적이 추사의 <세한도>를 권돈인에게 보여줬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권돈인3이 그린 <세한도>가 한 폭 있다.

그러나 추사의 <세한도>를 방작한 것이 아니라 화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로 바꾸어

송죽매(松竹梅)가 어울리고 있는 풍경을 그렸다.

 

【因以歲寒三友圖 一幅爲實詩意

세한삼우도 한폭을 그려 시의 의취를 메꾼다】

 

[권돈인 <세한도>,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추사나 권돈인이나 똑같이 겨울날의 정취에서 그 뜻을 가져왔지만 그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추사는 갈필을

많이 구사했지만 권돈인은 윤필(潤筆)을 강조하여 보다 온후한 느낌을 준다. 훗날 추사는 권돈인의 <세한도>에

이런 화제를 써주었다.

 

【화의(畵意)가 이러해야 형사(形似)의 길을 벗어난 것이 된다, 이러한 의취는 옛날 명화도 터득한 자가 극히

적었다. 공(公)의 시는 높은 경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림 또한 그러하다.】

 

추사의 곁에 있던 소치 허련도 추사의 <세한도>를 방작한 아담한 산수화를 그렸다. 소치는 이 그림에서 아예

'완당의 필의를 본받았다(倣阮堂意)'고 했다.

 

[소치 허련, <倣阮堂意산수도>, 종이에 수묵]

 

소치는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세한도>는 그 연원이 문인화풍의 전통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추사가 하나의 새로운 장르를 제시한 셈이다.

그리하여 <세한도>의 명성은 오늘날까지 이렇게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산수화에서, 사람, 동물, 사물 따위를 화면의 곳곳에 그려 넣어 장면의 활기를 불어넣고 그림의 깊이에 대한 거리적 관계를 가름케 한다. 중국, 북송 산수화 중에 나오는 인물 등의 점경은 상대적으로 자연의 광대함을 강조하는 효과도 있다.(미술대사전,1998.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
  2. 항백 박덕준의 기고문 중에서 인용, 박덕준은 서법가로서 현재 거의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추사 김정희의 필묵법을 복원하여 계승 발전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본문으로]
  3. 권돈인(權敦仁 1783 ~ 1859) : 1819년과 1835년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과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뒤 184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851년 당쟁에 휘말려 파직당하고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1859년 충청도 연산으로 이배(移配)되어 그곳에서 76세로 일생을 마쳤다. 서화에 능하여 일생을 친밀히 지냈던 추사로부터 뜻과 생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으며 중국의 서화를 얻으면 추사와 연구하여 감식안을 높이기도 하였다. 예서체 비문에 관해서는 동국(東國)에 전혀 없었던 신합(神合)의 경지라는 칭찬을 받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