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30 - 지필묵(紙筆墨)

從心所欲 2018. 7. 7. 22:45

 

추사는 지··묵(紙筆墨)에 대하여 무척 까다로웠다. 귀양살이하는 어려운 중에서도 완벽한 조건이 아니면 붓을 대지

않았다 한다. 추사는 특히 붓의 종류와 성질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쓰고자 하는 글씨의 성격에 따라 붓을 골라 쓰는

섬세함이 있었다. 흔히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만 추사는 그것이 옳은 얘기가 아니라며 이렇게

말하였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구양순이 <구성궁예천명>1이나

<화도사비>2 같은 글씨를 쓸 때 정화(精毫)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완당선생전집」권8, 잡지)

 

[구양순   <구성궁예천명>]

 

 

[구양순  <화도사비>, 둔황 출토의 당탁본(唐拓本)]

 

추사는 붓의 성격에 대하여 대단히 박식하였다. 그래서 그는 종이나 비단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글씨를

쓰는 바탕의 재질에서 오는 문제를 극복해낼 수 있었다. 먹과 벼루에도 섬세하고 까다로웠다. 추사는 이에

대하여 확고한 지론이 있었다. 글 남기기를 싫어했던 추사가「묵법변(墨法辨)」이라는 글을 써 남긴 것이 있다.

그런 묵법의 이해 때문인지 추사의 유작들은 종이와 먹이 일치하는 조화로움과 함께 오늘날까지도 생생한

빛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추사가 사용했던 붓, 예산 추사 고택 유품]

 

"서예가에게는 먹이 제일이다. 무릇 글씨를 쓸 때 붓을 사용하는 것은 곧 붓으로 먹을 골고루 칠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종이와 벼루가 모두 먹을 도와서 서로 제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니, 종이가 아니면 먹을 받을 데가 없고

벼루가 아니면 먹을 갈 수가 없다. 먹을 가는 것은 바로 먹빛이 곱게 피어오르게 하는 것이니, 이 한 단계에

끝나는 것이 아니요 먹의 숨을 잘 죽이면서도 곱게 갈 수 없는 것은 벼루가 좋지 않기 때문이니, 반드시 먼저

벼루부터 고른 후에 글씨를 쓸 수 있다. 벼루와 먹이 아니면 글씨를 쓸 수가 없으니 종이는 먹에 대해서도 역시

벼루와 같은 임무를 가지고 있다." (전집 권1, 묵법변)

 

그럼에도 우리나라 서예가들이 먹의 중요성을 잘못 알고 있음을 개탄하면서 기회가 날 때마다 제자들에게 묵법을

강조하고 가르쳤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만 붓 고르는 데만 힘을 쏟고 묵법(墨法)은 전혀 알지 못해, 시험삼아 종이 위에  글자를

보면 오직 먹빛만 있을 뿐이니, 이는 사람들이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하는 바이다...........

그래서 옛 사람의 법서(法書)와 진적(眞蹟)을 볼 적에 먹이 맺힌 곳이 마치 좁쌀 알갱이같이 도톨도톨하여

손끝에 걸리곤 하니 이것만 보아도 그 묵법을 거슬러 짐작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결(古訣)3에 이르기를

'먹물은 깊이 배고 빛은 짙게 빛나서 모든 붓털이 한꺼번에 힘을 쓴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묵법과 필법을

아울러 말한 것이다." (전집 권1, 묵법변)

 

먹에 대하여 이러한 식견을 갖고 있는 추사가 누구나 좋은 것을 갖기 원하는 벼루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추사가 심희순에게 단계(端溪)4벼루 하나를 보내며 벼루에 대하여 설명한 글을 보면 그 박식함을 알 수 있다.

 

"이 벼루가 바로 단계석(端溪石)이며 벼루 만드는 식도 극히 고아(古雅)하니 반드시 유명한 솜씨의 제작이요,

보통 솜씨로는 방불(彷佛)하게도 못할 것이외다. 지금 하마 400년이 지났으니 근세의 돌과 근세의 제작으로는

있을 수 없으며, 벼루의 면이 살짝 오목하니 육방옹(陸放翁)의 이른바 '엣 벼루는 살짝 오목하여먹이 많이 모인다

(古硯微凹聚墨多)'라는 것이 실제 얘기외다.......무슨 인연으로 굴러굴러 동쪽으로 와서 잡된 손에 들어가 전혀

벼루를 보호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소. 아우는 이 벼루를 얻은 뒤로 노상 좌우에 두었는데 지금 영감을 위해 꺼낸

거요. 영감은 과시 눈 밝고 세심한 사람이니 아마도 인정할 거외다." (「완당선생전집」권4, 심희순에게, 재16신)

 

추사는 이론에만 밝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좋은 먹과 좋은 벼루를 열심히 구했고 이를 얻으면 정성껏 시험해

보고는 때로 실망하고 때론 심히 기뻐했다.

 

"봉연(鳳硯)울 일부러 사람을 시켜 보내주시니 감사하외다. 즉시 손수 먹을 갈아 시험하여보니, 비록 가마솥에

달여 밀을 바른 서동(西洞)의 청화석(靑華石)보다는 못하나 역시 가품(佳品)이며, 돌의 질은 남포석(藍浦石)

보다 나은 면이 있고, 살짝 먹을 거역하는 듯하면서도 자못 발묵(潑墨)의 모가 있으니, 두어 날만 더 시험해보고

보내 드리겠소. 벼루 제작은 누가 했지요? 절대 속물(俗物)은 아니외다." (「완당선생전집」권4, 심희순에게, 재10신)

 

추사는 종이의 선택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자신의 작품에 걸맞은 아름다운 종이를 고르기도 했고, 붓에 잘 맞는

종이, 먹을 잘 받는 종이를 그때 그때 면밀히 검토했다. 추사는 사람들이 종이의 질감에 대하여 무감각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자신이 왜 종이를 따지는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편액(扁額)의 종이는 너무 딱딱하여 약한 붓(弱毫)으로는 갑자기 먹이 내려가지 않으므로 곧 받들어 써올리지 

못합니다. 대개 붓과 종이가 서로 맞아야만 비로소 붓을 잡을 수 있으며 역시 억지로는 못하는 것이외다," 

(「완당선생전집」권5, 어떤 이에게輿人)

 

추사는 막내아우인 김상희에게 좋은 종이를 보내주지 않으면서 글씨를 써달라고 한다며 호되게 나무란 일도

있다. 추사는 자신이 쓸 글씨에 어울리는 종이를 욕심 사나울 정도로 구했다. 추사는 청나라 고급 수입지를

대단히 애용했다. 추사는 수시로 좋은 종이를 구해 두었고 또 주위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요구했다. 유홍준 박사는

그런 면에서 추사는 사람을 질리게 하는 면이 있다고 했다. 지, 필, 묵, 벼루를 이렇게 따지고 고르다가 어떻게 추사가

붓 한 번 대볼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사 자신은 글씨를 쓰는데 있어 이 모든 것이 생활화, 체질화 되어 있었다. 추사가 이렇게 지필묵에 

까다로웠던 데는 확고한 예술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추사는 생동하는 글씨를 위한 아홉 가지 조건을 하나의 계율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첫째는 생필(生筆)이니, 토호(兎毫)가 둥글고 건장해야 하며 반드시 쓰고나면 거두어 넣어두고 쓸 때를 기다려야 한다.

둘째는 생지(生紙)이니, 새로 협사(篋笥)5에서 꺼내야 펴지고 윤기가 나서 먹을 잘 받는다.

셋째는 생연(生硯)이니, 벼루의 먹을 다 쓰고 나면 씻어 말려 젖거나 붙지 않게 해야 한다.

넷째는 생수(生水)니, 새로 맑은 샘물을 길어와야 한다.

다섯째는 생묵(生墨)이니, 쓸 때마다 갈아 써야 한다.

여섯째는 생수(生手)이니, 공부를 중간에 쉬어서는 안 되고 항상 근맥(筋脈)을 놀려 움직여야 한다.

일곱째는 생신(生神)이니, 마음이 화평하고 거슬림이 없어야 하며 신(神)은 편안하고 일은 한가해야 한다.

여덟째는 생목(生目)이니, 자고 쉬고 갓 일어나서 눈은 밝고 몸은 고요해야 한다.

아홉째는 생경(生景)이니, 때는 화창하고 기운은 윤택하며 궤(几)6는 조촐하고 창은 밝아야 한다.

(전집 권7, 잡저, 김석준에게 써서 보여주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유현(隣遊縣)의 고궁터에 있는 당나라 때 세운 비석. 632년 여름, 당 태종이 수나라 때의 인수궁(仁壽宮)을 수리하여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하고 이곳에 피서하러 갔을 때 궁의 정원 한 모퉁이에서 단맛이 나는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한다. 이 비석의 명문은 당시의 시중(侍中) 위징(魏徵)이 찬(撰)하고 구양순(歐陽詢)이 썼다. 이것은 구양순이 76세 때에 쓴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 중 첫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단정하고 명랑한 서풍과 뛰어난 품격미를 과시한 작품으로 예로부터 해서(楷書)의 극치로 칭송되고 있다. 비문은 24행이며, 50자로 되어 있다.  [본문으로]
  2. 화도사탑명(化度寺塔銘) : 중국 당대(唐代)의 비(牌). 삼계교(三階敎)의 고승 옹선사의 사리탑명으로,「화도사비」라고도 한다.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과 함께 구양순의 방엄(方嚴)한 정서(해서)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원석은 일찌기 없어졌고, 둔황 출토의 당탁본(唐拓本), 왕맹양본(王孟揚本), 송번본(宋翻本)의 고씨옥홍관본(顧氏玉泓館本), 옹씨소재본(翁氏蘇齋本) 등이 있다. (미술대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
  3. 옛 서결(書訣, 서법에 관한 책) [본문으로]
  4. 좋은 벼룻돌이 나는 중국의 지명 [본문으로]
  5. 협사(篋笥) : 문서나 의복 등을 넣어 두거나 때로는 귀중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이는 네모난 상자 [본문으로]
  6.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는 대신이나 중신(重臣)에게 임금이 주던 물건으로, 앉아서 팔을 기대어 몸을 편하게 하는 의자 형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