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28 - 세한도 2

從心所欲 2018. 6. 28. 23:58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 조선왕조 500년의 걸작, 대한민국 국보(國寶) 제180호.

모두 <세한도>를 수식하는 표현들이다. 그런 까닭에 유홍준 박사는 누구도 <세한도>에 대하여 작품의 잘되고

못됨은 물론이고 그림의 됨됨이를 따지는 것조차 불경스럽고 건방진 일로 생각될 정도로 <세한도>가 신격화,

신비화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명작처럼 <세한도>의 명성과 과도한 찬사에 눌려 정작 작품에 대한

올바르고 정직한 감상이 방해받게 된 상황에 이르러 <세한도>를 감상한다는 것은 명작임을 확인하는 것만

가능할 뿐, 스스로의 감상 소견을 갖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토로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 엇비슷한 해설은

많은데 눈에 띄는 감상평이나 소감은 찾기 힘들다. 오주석 선생이 자신이 연재하던 글에 올렸던 <세한도>에

대한 소감의 일부다.

 

‘세한도’ 쓸쓸한 화면에는 여백이 많아 겨울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데, 보이는 것은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

뿐이다. 까슬까슬한 마른 붓으로 쓸 듯이 그려낸 마당의 흙 모양새는 채 녹지 않은 흰 눈인 양 서글퍼 보인다.

그러나 ‘세한도’엔 역경을 이겨내는 선비의 올곧고 꿋꿋한 의지가 있다. 집을 그린, 반듯하게 이끌어간 묵선

(墨線)은 조금도 허둥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차분하고 단정하다. 초라함이 어디 있는가? 자기 연민이

어디에 있는가? 보이지 않는 집주인 김정희, 그 사람을 상징하는 작은 집은 외양은 조촐할지언정 속내는 이처럼

도도하다. 추사는 이 집에서 남이 미워하건 배척하건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지켜 나아갈 길을 묵묵히 걸었다.

고금천지에 유례가 없는 강철 같은 추사체의 산실이 바로 여기다. 그러나 이것은 집이 아니라 추사 자신이었다.

그래서 창이 보이는 전면은 반듯하고, 역원근(逆遠近)으로 넓어지는 벽은 듬직하며, 가파른 지붕 선은 기개를

잃지 않았다. 우뚝 선 아름드리 늙은 소나무를 보라! 뿌리는 대지에 굳게 박혔고, 한 줄기는 하늘로 솟았는데

또 한 줄기가 길게 가로 뻗어 차양처럼 집을 감싸 안았다. 그 옆에 곧고 젊은 나무가 있다. 이것이 없었다면 집은

그대로 무너졌으리라.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 제자 이상적이다. ‘세한도’엔 추운 시절에 더욱 따스하게 느껴지는

옛 정이 있다. 그래서 문인화의 정수라 일컬어진다】.1

 

 

<세한도>를 해설하는 글에는 이따금 특이한 일화가 소개되기도 한다.

소동파가 해주에 귀양갔을 때 그의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유배지로 찾아온 것에 동파가 기뻐서

아들을 위하여 <언송도(偃松圖)>라는 그림 한 폭과 아들을 칭찬하는 글을 써주었다. 그 후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남아있는 것을 옹방강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추사가 연경에서 옹방강의 서재에 들렸을 때 그 글을 봤다가

수십 년후 그에 영감을 받아 <세한도>를 그렸다는 것이다. 아니라고 우길 근거도 없지만 수긍할만한 근거도

찾을 수 없었다. 아들을 칭찬한 글과 염량세태를 한탄한 글과의 연관성도 없고 예전 그림에 흔하디 흔한 '누운

소나무(偃松)라는 단어에 영감을 받았다는 것도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단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 다

유배중이었다는 것 밖에는 없다. 영감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추사 당사자에게 확인해봐야 알 일이다.

유홍준 박사가 『완당평전』을 집필하던 때만 해도 '대정 추사 적소(謫所 : 유배지)에는 <세한도>에 나오는 집과

똑같은 건물이 있다' 거나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와 똑같은 소나무가 있다'는 말들이 꽤나 많이 돌았던

모양인지 유홍준 박사는 그 터무니없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있다. 추사 기념관이다.

 

[추사기념관,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그런가 하면 오른쪽의 소나무 말고는 다른 나무들이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다는 해설도 있다. 추사가 소나무,

잣나무를 글에 담았는데 아무려면 그림에 다른 나무를 그렸을까! <세한도>의 예술적 가치는 그 실경(實景)에

있지 않다. 유홍준 박사는 실경산수로 치자면 <세한도>는 0점짜리라 했다. <세한도>는 추사의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세한도>는 문인화다. 문인화는

그림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 사대부나 선비 등의  문인이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 수묵과 담채를 써서 사물의

외형을 꼼꼼이 그리기 보다는 마음 속의 정신세계를 표출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그림이다. 간결하면서도

격조있는 그림을 추구하지만 전문화가에 비하여 아마추어적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 <세한도>는 그런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한도>는 발문없는 그림 부분만 갖고 논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유홍준 박사는 그림과 글씨 모두에

문자향과 서권기2를 강조했던 추사의 예술세계가 이 소박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홍건히 배어 있음이

<세한도>의 본질이라 했다  歲寒圖라는 화제(畵題)와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阮堂)의 관지(款識), 정희

(正喜) 라는 낙관이 그림의 구도에 무게와 안정감을 주면서 그림의 격을 끌어올려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한도>는 구도와 묘사력 따위를 따지는 화법만이 아니라 필법과 묵법의 서법까지 모아야 제 맛과 

멋과 가치를 맛볼 수 있다. 이 그림이 우리를 감격시키는 것은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 더불어 제작과정에 담긴 추사의 처연한 심정을 공유할 수 있을

때 더 큰 감동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세한도>는 그 제작 경위와 내용, 그림에 붙어 있는 글씨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림에 사용된 갈필(渴筆)과 건묵(乾墨) 구사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세련된 감상안을 갖춘 사람만이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세한도> 그림 부분]

 

<세한도>의 그림을 보는 첫 느낌은 황량함 그 자체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 보다 추사의 처지가 생각나면 발문

끝에 있는 말처럼 슬프다(悲夫)는 느낌이 몰려 올 수도 있다. 언제나 질 좋은 종이를 고집했던 추사가 이 그림은

한지를 뜰 때 생긴 자국까지 남아있는 거친 종이에 그렸다. 그것도 종이 세 장을 이어 붙여 화폭을 만들었다.

거친 종이를 통해 자신의 궁핍하고 어려운 처지를 극대화해 보여주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3. 그 위에 쩍쩍

갈라지는 갈필로 나무를 그리고 사람없는 빈집도 하나 그렸다. 갈필을 쓴 이유는 거친 종이를 사용한 이유와

같았을 것이다.

 

그려진 네 나무 중 맨 오른쪽의 나무만 모습이 다르다. 누가 봐도 노송(老松)이다. 말라 터져 버린 껍질이 선명한

노송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윗부분은 부러져 나가고 몸통은 둘로 갈라져있다. 그 한쪽 끝에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면 언제라도 꺾여버릴 것 같은 나무 가지 하나가 달려있다. 오주석선생은 집이 추사를 나타낸다고 했지만

추사는 이 늙은 소나무를 자신을 생각하며 그린 것은 아닐까? 옆으로 늘어진 가지 끝을 보라. 阮堂이란 글씨와

正喜라는 낙관을 향하고 있다. 소나무의 몸통 가운데를 보면 껍질이 없다. 늙은 소나무의 속이 썩어 들어간

모습이다. 그림을 그리던 때의 추사의 심정처럼.

 

오주석선생은 듬직한 벽과 기개있는 지붕 선을 말하였지만 어쩌면 추사는 '여기 사람이 찾아오지 않아 쓸모없는

빈집이 하나 있다' 이런 심정으로 무심히 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덩그러니 크게 보이는

빈껍데기 집. 발문에 언급한 급암, 정당시, 적공이 몰락했을 때 겪었던 '대문 앞에 새 그물을 칠(門前雀羅)'

정도로 한산했던 그 분위기를 자신의 처지에 비유해 그리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지 아닌지야 알 길이

없지만 그렇든 아니든 문제는 아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얼마든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상에

따른 감흥 역시 보는 사람의 몫이다.

 

노송을 제외한 세 나무의 정체. 오주석 선생은 노송 옆의 '젊고 곧은 나무'를 이상적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주석 선생의 상상이다. 옆의 노송이 그 나무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는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추사의

의도가 담겨진 것일까? 떨어져 있는 두 나무는 또 누구인가? 권돈인, 초의선사, 허치 소련......?

추사는 어쩌면 나이듦과 유배생활에 지쳐 몸에 생겨나기 시작하는 검은 번점들을 돌아보며 자신의 피부를

그리듯 소나무 등껍질을 하나하나 그려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홍준 박사는 <세한도> 그림이 건필과 건묵의 능숙한 구사로 문인화의 최고봉을 보여주었던 원나라 황공망4

이나 예찬5류의 문인화를 따르고 있다고 했다. 아울러 구도만을 본다면 집과 나무를 소략히 배치한 것은

전형적인 예찬의 법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갈필(渴筆)은 붓에 먹물을 적게 묻혀 쓴다는 말이고 건묵(乾墨)은

먹물에 물기가 적다는 뜻으로 대개 거칠고 메마른 느낌을 주기 위하여 사용되는 기법이다.

 

추사의 갈필과 건묵에 대하여 KBS의 [역사스페셜 - 국보 180호, 세한도에 숨은 비밀]에서 흥미있는 해석이 소개되었다.

통상 그림을 그릴 때는 진한 먹과 엷은 먹을 사용하여 농담을 표현하는데, 세한도는 한 가지 먹으로만 표현했다는

것이다. 추사는 이런 기법을 초묵법이라 하여 초의 스님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 기법을 설명했다. 

초묵법은 먹물을 팥죽처럼 진하게 갈아 물기를 짜낸 채 붓에 묻혀 오로지 붓의 속도로만 농담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한다 즉, 붓질이 빠르면 옅어지고 느리면 진해지는 것이 초묵법의 원리이다.

이에 대하여 동양화가 송영방은 “먹의 짙고 옅음이 없기 때문에 붓의 속도 조절로 흐린 부분과 진한 부분을 표현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필력이 말할 수 없이 좋아야 한다.” 고 부연 설명을 했다. 순간순간 힘과 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필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초묵법이고, 추사는 그런 필력으로 <세한도>를 그렸다는 것이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오주석의옛그림읽기]김정희 '세한도', dongA.com, 입력 2000-05-23 18:59 수정 2009-09-22 [본문으로]
  2. 문자의 변주에 의한 효과를 “문자향(文字香)”이라 할 수 있고, 문장이 담고 있는 인문적 품격을 “서권기(書卷氣)”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김정희필 세한도 - 천년의 신의를 담다’ (문화유산채널, 한국문화재재단) [본문으로]
  4. 황공망(黃公望, 1269 ~ 1354) : 원나라 사람. 어릴 때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박식하여 백가(百家)의 학문과 예능 부문에 통달했으며 산수화에도 뛰어났다. 처음에는 그림을 조맹부에게 사사했지만, 동원(董源)과 거연(巨然)에게서도 배웠고, 미불(米芾)과 고극공의 화법도 받아들여 필묵을 휘어잡고 웅대한 자연의 골격을 적확하게 표현했다. 수묵(水墨) 본위의 간결한 묘사와 적색을 사용한 세밀한 묘사도 아울러 습득했다.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이회문화사) [본문으로]
  5. 예찬(倪瓚) : 중국 원말에서 명초의 산수화가. 오진(吳鎭)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등과 원말 4대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간결한 필법 속에 높은 풍운(風韻)을 느끼게 하며 구도와 묘법에 독특한 간원(簡遠)함을 가미하였다. 형태에 구애되지 않는 공활(空闊)하고 소조(蕭條)한 정취는 후세의 문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미술대사전,1998.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