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25 - 제주 시절의 글씨

從心所欲 2018. 6. 18. 00:50


추사는 한나라 때 예서를 집대성한 「한예자원漢隸字原」1에 수록된 309개의  비문 글씨를 끝없이 임모하여

팔뚝아래 다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 꾸준한 노력과 참을성을 추사는 이렇게 말했다.


 팔뚝 아래 309비를 갖추다. (腕下三百九碑)


추사는 그런 자세로 고전을 익히고 또 익혔다. 그래서 훗날 추사는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 벼루 10개를 밑창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완당선생전집』권3, 권돈인에게, 제33신)


추사가 제주시절에 그렇게 열심히 서한(西漢)시대 예서를 임모했다는 사실은 제주시절 편지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정작 확실한 연대를 알려주느 작품은 아주 드물다. 그런 가운데 유배 온 그 이듬해인 신축년(1841)

정월에 쓴 칠언절구 <청성초자靑城樵者>는 바로 서한시대 예서의 멋을 살려 쓴 것이이서 추사체 형성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청성초자靑城樵者>


추사의 글씨는 이렇게 잠치 확고한 자기 틀과 형식을 갖추어갔다. 그리고 추사의 해서와 행서에도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추사 글씨에는 점차 금석기(金石氣)와 예미(隸味)가 들어가면서 변화의 울림과 강약의

리듬이 강하게 드러났다. 추사가 초의선사의 일지암에 써준 <일로향실 一爐香室> 현판은 예서체 중에서도

전한(前漢)시대의 고졸하면서도 힘 있는 글씨체를 기본으로 하면서 글자의 구성을 가히 현대적이라 할만큼

혁신적인 감각으로 디자인해 추사체의 참 멋을 느끼게 한다.



<일로향실 一爐香室> 탁본


이 <一爐香室>은 뜻도 좋고 글씨도 아름다워 추사 현판 중 명품으로 손꼽힌다. 추사가 회갑을 맞던 1846년,

예산의 경주 김씨 원당사찰인 화암사의 중건이 벌어져, 추사가 <무량수각無量壽閣>현판 글씨와 누마루에

걸 <시경루詩境樓> 라는 현판 글씨를 써 보냈는데, 이 세 현판 글씨를 보면 추사의 글씨가 귀양살이 중 얼마나

변했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귀양 올 때 대둔사에 써줬던 <무량수각> 글씨가 얼마나 기름지고 살졌던가를

떠올리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무량수각> <시경루> 탁본


이러한 제주시절 추사의 작품을보면 한결같이 '유전입예(由篆入隸)2'하는 서한시대 예서의 맛과 정신을

바탕으로 우리가 말하는 추사체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나무현판이

아닌 본격적인 서예작품으로 제주도 시절에 썼다는 확실한 간기가 밝혀져 있는 작품은 알려진 것이 없다.


추사의 유배시절 글씨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예산의 화암사 병풍바위에는 시경(詩境)이라는 암각 글씨가 있다.


[화암사 <詩境> 석각]


[<詩境> 탁본]


유홍준 박사는 『완당평전』에서 이 글씨에 대하여 “완당은 옹방강에게 선물 받은 육방옹3의 <시경>이라는 예서

탁본을 화암사 병풍바위에 새겨놓았다. 육방옹의 이 글씨는 명작으로 이름 높아 남송 때 방신유라는 사람은

지방관으로 부임한 곳마다 이를 새겨두기도 했다. 옹방강은 광동에 있는 것을 탁본했다” 라고 소개하였다.

그런데 예산뉴스 무한정보에  ‘추사 김정희, 그 낯섦과 들춤사이’라는 글을 연재중인 예산고교 노재준교사는

유홍준 박사의 이러한 해석은 추사 연구가인 일본학자 후지쓰카 치카시4의 논문 『청조문화 동전의 연구』5

오류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논문 중 ‘陸放翁書詩境刻石拓本(육방옹서시경각석탁본)’이라는 글에서 추사는 옹방강의 시경헌에서

‘시경’이라는 두 글자의 탁본을 감상하며 옹방강의 시를 읊으며 특별한 감동을 했다고 하면서 화암사의 암벽에

추사가 자각(自刻)한 것은 <시경루(詩境樓)> 석 자라고 하고 있다. 우선 여기에는 실수가 있다. <시경루>는

화암사에 걸렸던 추사의 현판 글씨다. 이 현판은 현재 수덕사 성보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시경> 암각 글씨와는

다른 글씨다. 후지쓰카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6


아울러 노재준교사는 이 암각된 글씨가 추사의 글씨라고 주장한다.


"1981년 12월 15일 자 경향신문의 ‘편편상(片片想)’ 난에서 서울대 미대 교수이자 화가인 서세옥(1929~ )

 선생이 ‘경(境)’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있다. 그 관련 도막이다. “추사가 그의 원찰이었던 화암사 산기슭에

‘詩境’이란 두 글자를 석각(石刻)한 것이 있다. 지금은 황량한 산기슭에서 유별난 시경을 느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고촉예(古蜀隷)와 이묵경(伊墨卿)의 필의를 연상케하는 추사의 이 ‘시경’ 두 글자는 붓이 아닌

금강저(金剛杵)가 석면에 그어댄 경지다.” <시경>을 추사의 글씨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7


노재준 교사는 또한 육유의 <시경>글씨 탁본을 소개하며 "화암사의 암각 글씨 <詩境>은 균질하면서 탄탄하고

묵직한 획, 어디 하나 허점을 허락하지 않는 결구는 참 당당하다. 추사의 명작이다. 육유는 이런 글씨를 몰랐고,

쓸 줄 몰랐다"고 주장하였다.



[육유 <詩境> 탁본]


‘시경(詩境)’은 ‘시의 경지’,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경지’라는 의미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남송(南宋)시대 대신(大臣)으로 중국의 문자 및 훈고에 관한 학문인 소학(小學)의 전문가이자 역사학자인 누기(婁機, 1133∼1211)가 편찬하였다. [본문으로]
  2. 전서볍에 연유해서 예서로 들어간다 [본문으로]
  3. 육유(陸游:1125 ~ 1210 ) : 호 방옹(放翁), 중국 남송(南宋)의 대표적 시인. 약 50년 동안에 1만 수(首)에 달하는 시를 남겨 중국 시사(詩史)에서 최다작의 시인으로 꼽힌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4.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는 일제 강점기 경성제대 교수로 추사를 연구하면서 추사의 ‘세한도’를 조선 말기 평안감사를 지냈던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에게서 매입하여 1944년 일본으로 돌아가며 가져갔었다. 손재형 선생이 일본의 집으로 찾아가 두 달간 매일 문안하며 조른 끝에 ‘세한도’를 다시 찾아왔다. 그 후 석 달쯤 지난 1945년 3월, 후지츠카의 서재가 폭격을 맞으면서 그가 소유하고 있던 추사와 북학파의 책과 서화 자료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본문으로]
  5. 후지츠카 지카시는 자신의 연구를 집성하여 ‘조선에서의 청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이란 제목으로 동경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 논문을 지카시의 아들인 아키나오가 정리, 편집하여 1975년 일본에서 ‘청조문화 동전의 연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6. 예산고등학교교사 노재준, 에산뉴스 무한정보 [본문으로]
  7. 예산고등학교교사 노재준, 에산뉴스 무한정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