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22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從心所欲 2018. 6. 5. 17:27

 

추사가 대둔사를 떠나 완도로 가서 배를 타고 제주도 유배지에 도착한 것은 10월 2일이었다. 당시 완도에서

제주까지의 뱃길은 보통 7일에서 10일이 걸리는 멀고 험한 항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사는 아침 해뜰 때 배에

올라 당일 석양 무렵에 제주성 화북진에 도착하였다.1 그렇다고 결코 순탄한 뱃길은 아니었다. 바람이 사납고

파도가 거세어 죽을 고비를 넘나드는 행해였지만 추사는 '꼼짝 않고 앉아서 시를 읊어 시 읊는 소리와 파도

소리가 서로 지지 않고 오르내렸다'2 '고, 뒷날 세간에 전설같은 얘기로 치장되기도 하였다.

 

화북진에서 유배지인 대정까지는 80리 길이다. 심한 바람 때문에 추사는 다음날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하루를

지체한 뒤 산중간 마을을 잇는 지름길을 걸어 유배지에 도착했다. 추사가 처음 도착해서 머물렀던 장소는 지금

추사 유배지로 복원된 집이 아니라 근처 다른 집이었다. 현재의 유적지는 추사가 유배시절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장소이고 후에 다시 식수 문제로 집을 한번 더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남의 집 바깥채 하나를 얻어 탱자나무 가시울타리를 치고 울타리 밖에도 나갈 수 없는 유배지에서의 답답함

말고도 낯선 풍토, 입에 맞지 않는 음식, 잦은 질병으로 추사는 먾은 고생을 했다. 벗 권돈인3에게 보낸 편지에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함께 논의할 상대가 없음을 한탄한 것은 추사의 지적 사치가 아니라 외로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권돈인 「이재시축(彛齋詩軸)」4]

 

추사는 그 괴로움과 외로움을 오직 편지로 달랬다. 추사는 제주 유배시절에 무수한 편지를 썼다.

「완당선생전집」의 대종이 편지이다. 추사가 생전에 논문과 같은 형식의 글 쓰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나마도 중도에

불태워버렸기 때문인 측면도 있지만 전10권 중 반인 5권이 모두 편지다. 그리고 그 태반이 제주도에서 씌여진

것이다. 귀양살이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외로움이라면 육체적으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음식과 질병이었다. 추사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음식을 조달했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아내에게 보낸

한글편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13통이라고 한다.

 

[추사가 아내에게 보낸 한글 편지]

 

추사의 편지와 음식, 옷 등은 주로 추사 집안의 하인들이 맡아 부리나케 오가며 전달하였다. 그의 편지에 나오는

하인들의 이름이 무려 10명이 넘어 가히 대갓집다운 면모를 나타냈다. 그러나 아무리 하인이 많아도 제주로의

왕래는 배편이 좌우하고 바람이 막는 일이 많아서 좀처럼 대중할 수 없었다. 이런 처지에 있던 추사에게 뜻밖의

구인이 나타났는데 충청도에서 드나드는 배편의 뱃사람인 양봉신이라는 사람이 추사의 귀양살이를 돕겠다고

선뜻 나선 것이었다. 또한 제주도에 살고 있는 오진사(進士)로 불리는 인물이 있어 추사가 오진사에게 보낸

편지가 「완당선생전집」에는 무려 9통이나 실려 있는데 그가 추사에게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었다는 흔적은 없어

오히려 대화의 상대가 된 연유로 짐작되고 있다.

 

귀양살이 동안 추사는 잦은 질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래서 완당이 아내나 동생, 벗에게 보내는 편지들에

아프다는 소리가 빠진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추사는 특히 풍토의 나쁜기운, 소위 장기(瘴氣)5때문에 고생이

심했다. 또 입에 혓바늘이 돋고 코에 종기가 나는 풍토병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추사는 귀양살이 9년간 편지마다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며 지냈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완당선생전집 권2, 아우 명희에게, 제1신 [본문으로]
  2. 민규호 <완당김공소전 [본문으로]
  3. 권돈인(權敦仁 1783 ~ 1859) : 본관은 안동(安東). 1813년(순조 13)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1819년과 1835년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과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뒤 184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851년 철종의 증조인 진종(眞宗)의 조천례(祧遷禮)에 관한 주장으로 인해 파직당하고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1859년 연산으로 이배(移配)되어 그곳에서 76세로 일생을 마쳤다. 서화에 능하여 일생을 친밀히 지냈던 추사로부터 뜻과 생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으며 중국의 서화를 얻으면 추사와 연구하여 감식안을 높이기도 하였다. 예서체 비문에 관해서는 동국(東國)에 전혀 없었던 신합(神合)의 경지라는 칭찬을 받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문으로]
  4. 이 이재시축(彛齋詩軸)은 1857년 초 여름, 즉 추사가 돌아가신 지 6개월 후쯤에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권돈인이 추사의 제자 희원 이한철이 그린 대례복을 입은 추사의 영정를 예산 향저 재실(齋室)인 추사영실(秋史影室)에 봉안하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며 추사를 생각하는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쓴 여덟 수의 시와 그 외 열한 수, 합하여 열아홉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추사궤연에 곡하고 돌아가며’라는 제목 아래 7수의 시가 있는데 그 중의 한 수이다. 내용은 ‘조용히 그대 생각하며 불러본들 어이 하리 / 경당(經堂), 화실(畵室)은 옛적에 배회하며 노닐던 곳 / 천년 만년토록 끝없이 이어지는 일은 / 모두 한 찰나의 꿈인 것을.....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김영복의 고미술이야기, 법률신문) [본문으로]
  5.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한 기운 (국어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