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19 - 중국 서예 흐름

從心所欲 2018. 5. 29. 08:49


중국에서 선진(先秦)시대1까지문자의 미(美)에 대한 추구가 금석의 각문(刻文)2이 주가 된데 반하여,

한대(漢代)부터는 모필(毛筆)에 의한 서체(書體)에 예술성을 추구하는 풍조가 생겼다. 후한 말, 장지3

새로운 초서에 의한 서예술을 창시하였다.


<월나라 왕 구천의 검에 새겨진 문자>


그 이후 중국 書의 내력을 요약하면 삼국시대 위(魏)에서는 종요가 각종 필사체를 잘 썼으며 동진(東晉)4

이르러 강남의 아름다운 귀족문화 속에서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체에 예술성이 확립되고 대표적 서예가인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父子)가 나타나 이른바 이왕(二王)의 書가 이후의 전형으로 숭앙되게 된다.



<당(唐)의 명필 저수량이 왕희지의 난정서를 임서한 황견본난정서(黃絹本蘭亭序)>


남조(南朝)5시대의 글씨가 우아하고 단아한 귀족적 특색을 보인 반면 북조(北朝)6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서가(書家)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묘지, 조상명7, 마애 등 각석(刻石) 등에 경건하고 웅장한 글씨가 많이

있었다. 남조의 書가 법첩(法帖)8으로 전해진 데 대하여 북조의 書는 뒤에 북비(北碑)라 불리면서 남첩과 함께

書의 양대 조류를 이룬다. 수나라의 중국통일에 따라 남북의 서풍이 융화되는 경향도 있었으나 당태종 이세민이

왕희지의 글씨를 권장하고 우세남, 구양순, 저수량 등이 해서로 명성을 얻으면서 2왕의 전통이 당나라 전기

(前期)를 풍미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전성기에는 장욱의 광초(狂草)나 고법(古法)을 추구한 안진경의 호방한

진서, 예서 등을 통해 전통에 반항하는 혁신적 서풍이 일어났다.

이 혁신적 서풍은 오대(五代)9의 양응식에 이어지고 나아가 북송의 사대부 사이에서 서예를 인간성의 발로로

보는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그중에서도 소식, 황정견, 미불 등의 천진난만하고 담담하며 자연스러운 서풍은

서예를 일신시키면서 남송으로 이어져 널피 파급되었다. 원대(元代)에는 몽골족의 지배 아래에서 송나라의

종실 출신인 조맹부10가 관(官)에 나아가 중용되면서 기술적으로 정교한 그의 고전주의적 글씨가 조야

(朝野)에 영향을 미쳤다.



<조맹부 적벽부>


명대(明代)에는 다시 한(漢)민족 국가가 일어나 진, 당, 송, 원나라의 글씨가 집대성되며 문인 취미의 서예술이

탄생되고 유행되었다.전각(篆刻)11이나 제찬(題贊)12 등을 수반하여 시,서,화 삼절(三絶)의 묘를 추구하는

풍류문사가 많이 나타났고 특히 이 경향을 대표하는 동기창의 아름다운 서풍이 일세를 풍미했다.



<동기창 봉경방고도>


한편 明나라 말기의 격동하는 세상에서는 우국지사들의 비통하고 심각한 연면체13가 유행했고, 이는 청나라

초기까지 이어졌다. 청대 전반에는 명나라 말기 이후의 첩학파가 성했으나 건륭기(1736 ~ 1795)의 금농이나

정성 등에게서는 기이하고도 옛스러운 기운이 엿보였다. 또한 금석에 바탕을 둔 미학파가 발전했고 법첩의

인습을 벗어나 고문(古文), 전(篆), 예(隸)에서 신선함을 구하면서 북비의 생명력 넘치는 서풍이 유행하여

淸末을 거쳐 후세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수많은 걸출한 서예가들이 나타났고 또 저마다의 서예에 대한 주장을 담은 서론을 남겼다. 

비백서14를 창안했다는 동한 시대 채옹의 <구세九勢>, 일찍이 왕희지가 글씨를 배웠다는 동진 시대의 여류

서예가 위부인의 <필진도筆陳圖>, 왕희지의 <서론書論>, 당나라 구양순의 <팔결八訣>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씨의 <삼십육법三十六法>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서예에 대한 담론은 다양하고 방대하다.


추사가 이런 서론들을 일일이 다 섭렵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당대 청나라의 명망있는 석학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법의 새로운 조류에 심취해 있던 추사의 눈에는 고루한 서법에 매달려 있던 원교나 창암의 글씨가 눈에 찰

리가 없었을 것이다. 제주 유배에서 돌아오는 길에 있었다는 일화에서 보여진 추사의 태도 변화는 두 사람의

글씨에 대한 승복이라기 보다는 자만심에서 벗어나고 한층 원숙해진 경지에서 우러나온 상대방을 인정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1.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 기원전 770년 주(周)왕조의 천도 후부터 기원전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의 시기 [본문으로]
  2. 돌이나 금속 위에 새겨 넣은 글 [본문으로]
  3. 장지(張芝) : 중국 후한(後漢)의 서가(書家). 장초(章草:草書의 한 가지)에 뛰어나 초성(草聖)이라고 일컬어졌다. 속세를 피하여 오로지 서도를 벗 삼았으며, 베가 있으면 거기에 글씨를 썼고, 연못가의 작은 돌에도 글씨를 쓰고서는 물로 씻기를 수없이 되풀이하여 마침내 연못의 물이 먹물로 까맣게 변하게 하였다는 고사를 남겨, 후세에 서예를 배우는 것을 ‘임지(臨池)의 기(技)’라고 일컫게 된 연유가 되었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4. 265년에 사마염이 위나라 원제(元帝) 조환을 몰아내고 세운 왕조가 진(晉)으로 낙양(洛陽)에 도읍을 두었다. 진왕조는 북중국의 호족(胡族)이 침입하여 316년에 일단 멸망하였다. 그 후 일족 중의 사마예가 양자강(揚子江) 이남의 땅을 영토로 하여 317년 건업(建業:南京)을 국도로 진왕조를 재건하였는데 이를 동진이라 한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5. 중국 남북조시대 중 5 ∼ 6세기에 양자강 하류지역을 점거하고 건강(建康:南京)을 국도(國都)로 한 송(宋:420~479) ·제(齊 :479~502) ·양(梁:502~557) ·진(陳:557∼589) 등 4왕조에 대한 총칭 (두산백과) [본문으로]
  6. 4세기 말~6세기 말 양쯔강 유역(강남지역)의 남조(南朝)와 대립하여 화북(華北)지역을 영유한 북위(北魏), 북제(北齊), 북주(北周)의 3왕조에 대한 총칭 (두산백과) [본문으로]
  7. 조상명(造像銘) : 조상기(造像記)라고도 한다. 불상을 만들 때 발원자, 제작자, 유래, 연기(年記) 등을 기록한 것을 말함. (미술대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
  8. 옛 서가(書家)의 법서(法書)를 나무나 돌에 새겨 만든 첩(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9. 907년에 당나라가 망한 뒤부터 송나라가 건국되기 이전까지의 과도기에 중원에 흥했다가 망한 다섯 왕조인 후량, 후당, 후진(後晉), 후한, 후주를 이름 [본문으로]
  10. 중국 원대의 서화가.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 송 태조의 11대 손자이다. 관은 한림학사, 승지에 이르렀고 서화와 시문에 있어 원대의 제일인자로 일컬어졌다. 書에 있어서는 전서 ∙ 문예 ∙ 진 ∙ 행 ∙ 초서 등 각체에 능통했고 특히 왕희지로의 복귀에 힘썼으며 그 서풍은 송설체라는 이름으로 이후의 시대 및 한국,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미술대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
  11. 나무, 돌, 금옥 등에 전자(篆字)로 인장을 새기는 일이나 그 새긴 글자를 가리킴 [본문으로]
  12. 그림에 써넣은 시(詩)를 비롯한 각종 글. 화제(畵題)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3. 연면체(連綿體) : 서법의 일종으로서 붓을 떼지 않고 계속 써내려 가는 것을 일컬음. (미술대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
  14. 비백서(飛白書)는 필세(筆勢)가 나는 듯하고 필획이 빗자루로 쓴 것처럼 보이는 한자 서체로 필획에 실낱을 풀어놓은 것 같은 흰 부분이 드러나고, 필세가 나부끼는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민속예술사전, 국립민속박물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