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16 - 창암 이삼만

從心所欲 2017. 12. 8. 14:08

 

추사의 제주 유배 길에는 원교 이광사 말고도 또 다른 서예가와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상대는 창암() 이삼만(李三晩 : 1770 ~ 1847)이다.

창암은 전라북도 정읍 출생으로 만년에는 전주에 살면서 완산()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왕희지의 법첩을 시작으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얻고 있었던 이광사()의 글씨를 배웠으며 글씨에만 몰두하여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지만 가산을 탕진하였다는 설도 있고, 몰락한 양반의 후손이라 붓과 종이가 없어

대나무와 칡뿌리를 갈아 모래 위에 글씨 연습을 했다는 설도 있다. 창암은 병중에도 하루 천자씩 쓰면서

“벼루 세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고 맹세 할만큼 글씨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였으며 누가

글씨 배우기를 청하면 점 하나 획 하나를 한달씩 가르쳤다고 전해진다.1  창암은 당대에 이미 추사,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 1772 ~1840)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명필'이라는 이름을 얻고 있던 인물로 호남에서는

독보적 존재였다. 그의 글씨는 '창암체', 또는 흐르는 물처럼 유려하다 하여 '유수체'로도 불렸다.

 

[창암 이삼만의 초서 < 山光水色>]

 

그런 창암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에 만났는데 창암은 추사보다도 나이가 열 여섯 살이나 많아

그 때 이미 70을 넘긴 상태였다. 추사는 창암의 글씨를 보고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다"는 혹평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자리에 함께 있던 창암의 제자들이 격분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을 창암이 만류하면서 저 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 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추사가 창암의 글씨를 보고 "명불허전"이라고 감탄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두 이야기 모두 신빙성은

미지수다. 그러나 원교 이광사를 비난했던 추사가, 역시나 법첩을 보며 글씨를 익히고 나중에는 이광사의 필법을

따랐다는 창암을 추사가 칭찬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추사가 창암의 글씨를 마음에 들어할 수 없었던 근거는  

다음과 같은 오세창2의 창암에 대한 평가에서도 엿 볼 수 있을 것 같다.

 

 

“창암은 호남()에서 명필로 이름났으나 법이 모자랐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필세는 건유()하다.”

 

완원의 남북서파론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구양순, 저수량을 무시하고 종요와 왕희지에 접속하려 드는 것은

문 앞 길도 거치지 않고 곧장 방 아랫목에 앉겠다는 격' 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는 추사가 창암의 글씨를

인정할 리도 없으려니와 어쩌면 창암의 '손가락 쓰는 법, 붓 쓰는 법, 먹 쓰는 법으로부터 분행(分行), 포백(布白),

점과 획 치는 법' 까지도 다 못마땅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 못마땅함을 참다 참다 극에 이른 나머지 나이 든

창암에게 막말을 내뱉고 자리를 뜬 것은 아닐까?

 

이어지는 일화로 추사는 9년 뒤 제주 유배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창암의 집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창암은 이미 3년 전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 때 추사를 만난 창암의 제자는 창암이 생전에 추사의 말 중,

서가라면 반드시 새겨야 할 필결이라며 "글씨는 한나라, 위나라를 모범으로 삼아야지 진나라를 따르면

예뻐지기만 할까 두렵다."는 말을 했었다고 전해주었다 한다. 일설에는 추사가 뒤늦게 후회하며

명필창암완산이공삼만지교(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라는 묘비 글씨와 함께 창암을 기리는 글을

써주었다는 말도 전해지는데 역시나 그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 창암 이삼만 전남  대흥사 <가허루(駕虛樓)> 현판]

 

[창암 이상만 지리산 천은사 <보제루> 현판]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본문으로]
  2. 오세창(吳世昌 :1864 ~ 1953)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자 계몽 운동가, 일제 강점기 한국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가. 조선 말기에는 개화파 정치인이었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서화와 고미술품 감정 등의 활동도 하였다. 오세창은 방대한 양의 골동 서화를 수집하고 서가별 · 화가별로 분류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하여 1928년 우리나라 고서화의 인명사전이자 자료집인 『근역서화징』을 출판했고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인장자료를 모아 ≪근역인수 槿域印藪≫를 집성하였으며, 수집한 소품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 槿域書彙≫·≪근역화휘 槿域畫彙≫ 등 한국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즐겨 썼다. (출처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