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15 - 원교 이광사

從心所欲 2017. 12. 1. 13:34

 

 

 

이광사(李匡師 : 1705 ~ 1777)는 자를 도보(道甫), 호를 원교(圓嶠)라 했고 본관은 전주이다.

그의 집안은 증고조부 등이 모두 명필로 대대로 글씨의 名家였다. 원교는 인품도 높았고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였으며 또 명필로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1755년 전라도 나주에서 불온한 글이 발견된 사건으로1

큰아버지인 이천유가 처형될 때 연좌되어 회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전라도 신지도로 이배(移配)되어

30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원교는 귀양살이 동안 정말로 많은 글씨를 썼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무척 사랑하여 귀양지에서도

그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할 수 없이 아들, 딸에게 대필까지 시켰다고 한다.

해남 대둔사, 구례 천은사 등 전라도 일대의 사찰 현판에 그의 글씨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원교 이광사는 법첩의 원조격인 왕희지 글씨를 바탕으로 국풍화(國風化)한 서체를 개발하였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서예의 역사와 이론을 『필결(筆訣)』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했고, 그의 글씨는 『화동서법(華東書法)』이라는

목판본 책으로 간행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추사는 이 원교『筆訣』에 후기를 쓰면서 원교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거기에는 추사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북비남첩론에 입각하여 북파를 지향하는 추사로서는 남파에 뿌리를 둔 원교를 비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바야흐로 국제적 시각에서 글씨를 논하고 예술을 펼치고 있던 추사가 보기에

조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원교의 시각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추사가 원교를 비판한 요지를 보면 우리나라의 서가들은 북비에서 직접 배울 생각은 못하고 왕희지 글씨로

만든 『황정경(黃庭經)』2, 『악의론(藥毅論)』3같은 법첩(法帖)에 의지해왔는데, 사실 왕희지의 글씨는 오래

전에 없어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왕희지 법첩이란 판각4에 판각을 거듭하면서 변질되어 사실상 다 가짜인데

그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추사는 그 한심함을 이렇게 질타했다.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서예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이르는 진체(晉體 : 왕희지체)니 촉체(蜀體 :

조맹부체)니 하는 것은 모두 이런 것이 있다고 여겨 표준으로 받들고 있는 것이 마치 쥐를 가지고 봉황새를

으르려고 하는 것 같으니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왕희지는 구양순을 통해서 들어가라고 추사는 단호히 말한다.

 

"글씨를 배우는 자가 진(晉, 즉 황희지)을 쉽게 배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唐, 즉 구양순, 저수량)을

경유하여 진으로 들어가는 길을 삼는다면 거의 잘못됨이 없을 것이다. 구양순, 저수량 등 여러 사람은

무시하고 위로 종요와 왕희지에 접속하려 드는 것은 문 앞 길도 거치지 않고 곧장 방 아랫목에 앉겠다는

격이니 그것이 말이 되는가." (전집 권8, 잡지)

 

이런 논지에서 추사는 구양순을 글씨의 규범으로 삼았고 또 그를 통하여 추사체의 골격을 확립했다.

추사가 원교가 죽고 15년이나 지나 태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히 역사적 비평으로 임해야 할 것을

동시대적 비평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사의 비판이 지나치다는 지적도 있다. '만일 추사가 100년 빨리

태어났다면 어떻게 북비남첩론을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하는 것이다.

 

추사와 원교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얘기가 있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가는 길에 해남 대둔사에 들렸었는데 추사가 대둔사5 대웅전에 걸려있는 원교의

<大雄寶殿>이라는 현판을 보고는 초의선사에게 떼어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글씨로

<大雄寶殿> 네 글자를 다시 써주며 나무에 새겨 걸라고 했다. 또한 붓을 잡은 김에 차를 나누던 선방에

<無量壽閣>이라는 현판 횡액6도 하나 더 써주었다는 것이다. 

 

[ 원교 이광사   <大雄寶殿>]

 

추사   <無量壽閣>

 

 

이광사의 <大雄寶殿> 현판은 이광사가 신지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써준 그의 대표적인 현판 글씨로, 유려한

필획과 힘있는 운필이 동시에 느껴지지만 추사는 글씨에 속기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반면, 추사가

 <無量壽閣> 현판은 예서체에 멋을 한껏 넣은 기름져 보이는 글씨다. 

원교의  <大雄寶殿>과 추사의 <無量壽閣> 두 글씨는 두 사람의 서예세계가 얼마나 달랐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無量壽閣>처럼 윤기가 나고 멋이 들어있고 변화가 많은 글씨를 쓰는 사람은  <大雄寶殿>처럼

꿋꿋하고 획이 메마른 글씨를 좋아할 수가 없는 법이라 한다. 게다가 유배 가기 전 대단한 자긍심과 자부심에

충만해있던 추사로서는 자신과 다른 길을 걸었던 원교를 인정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9년 뒤 추사가 제주도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둔사에 들렸을 때,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떼어두었던 원교의  <大雄寶殿>현판을 가져오게 하여 한동안 들여다보고는 자신이 예전에 원교의 글을

잘못 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썼던 현판을 떼어내고 다시 원교의 현판을 걸게 함으로써 지금도

대둔사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화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도 모르지만, 추사가 이광사의 글씨를 뒤늦게 인정한 것인지 아니면 9년 유배에서

얻게 된 정신적 성숙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일명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이라고 불리며 을해옥사(乙亥獄事)라고도 한다. 영조 31년(1755) 나주에서 귀양살이 하던 윤지가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역모를 계획하면서 민심동요를 위하여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객사에 붙였는데, 이것이 윤지의 소행임이 밝혀져 거사 전에 붙잡혔다. 사건 수사에 소론이 연루되면서 탕평책의 균형이 깨지고 노론세력이 더욱 굳건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본문으로]
  2. 도교의 수양법을 설명한 경전. 「내경경(內景經)」 1권과 「외경경」 3권이 있으며, 동진 왕희지의 서(書)라고 전하는 외경경도 있다. 육조 이래 왕희지 정서(해서)의 대표작으로서 『악의론(樂毅論)』과 함께 중히 여겨졌다.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
  3.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하후현(夏侯玄)이 연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에 대해서 쓴 소론. 진나라 왕희지가 해서(楷書)로 쓴 것이 유명하며, 해서의 법첩(法帖)이 되어 있다. [본문으로]
  4. 판각 (板刻) : 나뭇조각에 그림이나 글씨를 새김 [본문으로]
  5. 전라남도 해남군 두륜산에 있는 절로 대흥사(大興寺)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절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으나 신라 말(末)로 추정하고 있다. 절의 이름은 한듬절-대듬절-대둔사-대흥사-대둔사로 계속 변해왔다. [본문으로]
  6. 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를 보통 편액(扁額)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가로로 길죽하여 횡액(橫額)이라고도 한다. 편(扁)은 서(署)의 뜻으로 문호 위에 제목을 붙인다는 말이며, 액(額)은 이마 또는 형태를 뜻한다. 즉,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붙여서 건물에 관련된 사항을 알려 준다는 의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