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45

조선의 당쟁 45 - 붕당론

구양수(歐陽修)는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ㆍ시인ㆍ문학자ㆍ역사학자이다. 1007년에 출생하여 66년 동안 정치적, 문학적으로 활발한 삶을 살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송나라 인종(仁宗) 때인 1036년, 곽황후(郭皇后)의 폐립을 주장하던 재상 여이간(呂夷簡)은 이를 반대하는 범중엄(范仲淹)을 무고하여 귀양을 가게 만들었다. 이에 범중엄과 더불어 신진 관료파에 속했던 구양수는 간관(諫官)으로서 범중엄을 변호하는 간언을 하다가 역시 여이간에 의하여 이능(夷陵, 현 후베이 성)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1043년에 인종이 다시 범중엄 등을 중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자 정적들이 붕당(朋黨)으로 몰면서 공격하였는데 이에 구양수가 붕당에 대한 적극적인 논..

조선의 당쟁 2020.05.11

조선의 당쟁 44 - 망국의 진실

정조가 죽고 11세의 어린 나이의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정국은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가 중심이 된 벽파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 벽파는 천주교를 아버지와 임금을 부정하는 패륜의 사학(邪學)이라 규정하여 순조 1년에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다. 명분은 사학 퇴출이지만 시파에서도 특히 남인들에 천주교도가 많았기 때문에 실상은 남인 시파 세력을 꺾기 위한 노론벽파의 정치 공세인 동시에 정조의 탕평을 보좌했던 인물들에 대한 보복이기도 했다. 벽파는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했지만 그들의 권세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기간으로 끝이었다. 정조는 1800년에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일 뜻을 굳힌 상태였..

조선의 당쟁 2020.04.20

조선의 당쟁 43 - 정조의 탕평책

영조 31년인 1755년의 나주괘서사건과 토역정시사건으로 을해옥사(乙亥獄事)가 일어났지만 이후 영조가 탕평책을 포기한다고 공식적으로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간 영조 턍평책의 핵심이었던 분등(分等)과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원칙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분등은 노론, 소론 양쪽에 모두 벼슬길에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열어주는 것이고 쌍거호대는 양파의 인물을 서로 견제할 수 있는 관직에 임명하여 힘의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영조는 죄를 주는 경우에도 어느 한쪽만 처벌하여 자신이 어느 쪽에 기울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을해옥사 이후는 심정적으로도 이런 원칙을 지속해 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을해옥사로 소론 강경파의 잔여세력이 완전히 몰락하면서 그간 노론이 주장해왔던 당..

조선의 당쟁 2020.04.18

조선의 당쟁 42 - 영조의 좌절

영조는 집념으로 즉위 때부터 무려 30년간을 탕평에 힘썼다. 소론과 노론의 의리는 신임옥사를 둘러싸고 각기 선왕 경종에 대한 충심(忠心)과 현왕 영조의 세제 시절인 연잉군에 대한 충심이다. 영조의 입장에서는 소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신임옥사의 발단이 된 고변에 포함된 자신에 대한 혐의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노론 측 주장을 받아들이면 신임옥사에 대한 경종의 처사가 잘못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의 의리는 자신을 사랑한 형 경종의 처사를 훼손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정국의 안정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까지 고려한 고심의 결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재위 중에 늘 자신의 세제건저와 대리청정, 나아가서는 독살설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를 ..

조선의 당쟁 2020.04.14

조선의 당쟁 41 - 의대증

나경언의 고변은 아무리 생각해도 뜬금없고 난데없는 구석이 많다. 기개를 목숨처럼 여기던 사대부 선비였다면 그나마 이해될 구석이라도 있지만 중인 아니면 상민 정도의 신분인 나경언이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에 나섰는지가 의문이다. 조선시대 나경언의 신분은 조정의 일에 관여할 입장도 아닌데다 행위에 따른 실익도 없다. 양반이라면 그나마 나라를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변을 하다 죽었다는 선비로서의 명예라도 남길 수 있다. 그렇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한 양심선언이나 내부고발이 존중받는 지금 시대의 개념이 없던 때에 중인이나 상민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조정의 일에 끼어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것도 상대는 14년째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왕세자이다. 그야말로 기름을 지고 불에 뛰어든 격이다. 관..

조선의 당쟁 2020.04.11

조선의 당쟁 40 - 임오화변

조선시대 몇 안 되는 현군(賢君)의 하나로 꼽히는 영조이지만 막상 영조를 말할 때면 그의 치세나 업적보다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더 자주 거론된다. 소위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광증(狂症)때문이라는 설과 친(親) 소론적 성향 때문에 노론에 의한 모함으로 죽었다는 당쟁희생설에다 사도세자가 영조를 죽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역심(逆心)설까지 여러 주장이 있다. ‘광증’설은 혜경궁 홍씨의 을 근거로 한 것으로 그간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주장이었다. 이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이 주로 실록을 근거로 의 내용을 반박하면서 당쟁희생설을 제기했는데 처음 나온 주장은 아니고 전에도 있기는 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주장이다. 반면 서..

조선의 당쟁 2020.04.08

조선의 당쟁 39 - 게장, 감, 인삼차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영조가 왕으로써 탕평책을 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보여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누구라도 왕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정국의 혼란보다는 안정을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책은 단순히 영조의 의지에서 그치지 않고 실행되었다는데 그 가치가 있다. 어떤 신념을 가졌다는 것과 그 신념을 진실로 실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특히나 그 신념을 실천하는데 그 신념을 무너뜨리는 장애가 일어나면 초심을 잃게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영조는 그것을 이겨냈다. 영조가 진실로 현군(賢君)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조 4년인 1728년 3월 14일 영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대신들이 모두 몰려와 영조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광좌는 전 영의정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전..

조선의 당쟁 2020.04.03

조선의 당쟁 38 - 탕탕평평

병약했던 경종은 재위 4년 2개월만인 1724년 8월 25일 승하하였다. 《경종실록》에는 그 날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밤에 유성(流星)이 앙성(昻星) 아래에서 나왔으며 또 정성(井星) 위에서도 나왔다. 축각(丑刻)에 임금이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니, 내시(內侍)가 지붕에 올라가 고복(皐復)을 하고 곧 거애(擧哀)를 하였다.] ▶축각(丑刻) : 오전 3시경. ▶환취정(環翠亭) : 성종 15년인 1484년 창경궁 통명전 북쪽에 지은 정자. 직접 환취정(環翠亭)이라 이름 지었다.. ▶고복(皐復) : 상을 당하였을 때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초혼(招魂)하는 것 ▶거애(擧哀) : 발상(發喪). 연잉군은 경종 승하 후 6일째 되는 날인 8월 30일 오시(午時)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조선의 당쟁 2020.03.31

조선의 당쟁 37 - 과유불급

조성복의 세제 청정 요구를 받아들였다가 취소한 경종은 이틀 뒤 다시 시임(時任), 원임(原任) 대신들을 불러 모으고는 "나의 병근(病根)이 날로 점점 더하여 나을 기약이 없으니, 일찍 저사(儲嗣)를 정한 것은 실로 대리(代理)를 행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으며, 이를 자성(慈聖)께 품(稟)한 지 오래 되었으나, 책례(冊禮)를 이제 막 거쳤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나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대간의 상소로 인하여 나온 것처럼 여겨서 쟁론(爭論)이 분분하기 때문에 우선 환수하여 나의 뜻을 보이고, 조성복(趙聖復)의 망령되고 경솔한 죄를 다스린 것이다. 공사(公事)는 적체되고 수응(酬應)이 절박하니, 일체 그저께의 비망기에 의해 거행하여 조섭(調攝)하는 방도를 온전하게 하라."는 비망기를 내..

조선의 당쟁 2020.03.26

조선의 당쟁 36 - 발기불능

경종이 왕에 올랐지만 집권세력은 경종을 지지하지 않는 노론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경종 즉위 한 달 후인 7월에 유학(幼學) 조중우(趙重遇)가 상소를 올렸다. [제왕(帝王)의 덕의(德義)는 효행(孝行)에 지나침이 없고, 추보(追報)의 도리는 예경(禮經)의 밝은 훈계이며, 어미가 아들로써 존귀(尊貴)하게 되는 것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주(主)가 되었는데, 낳아 주신 어버이는 오히려 명호(名號)가 없이 적막한 마을에 사우(祠宇)는 소조(蕭條)하고 한 줌의 무덤에는 풀만 황량(荒涼)합니다. 문무 조신(文武朝臣)의 2품관도 오히려 증직(贈職)의 영전(榮典)이 있는데, 전하께서는 당당한 천승(千乘)의 존귀한 몸으로써 유독 낳아서 길러 준 어버이에게는 작호..

조선의 당쟁 202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