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39 - 게장, 감, 인삼차

從心所欲 2020. 4. 3. 16:30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영조가 왕으로써 탕평책을 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보여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누구라도 왕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정국의 혼란보다는 안정을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책은 단순히 영조의 의지에서 그치지 않고 실행되었다는데 그 가치가 있다. 어떤 신념을 가졌다는 것과 그 신념을 진실로 실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특히나 그 신념을 실천하는데 그 신념을 무너뜨리는 장애가 일어나면 초심을 잃게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영조는 그것을 이겨냈다. 영조가 진실로 현군(賢君)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조 4년인 1728년 3월 14일 영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대신들이 모두 몰려와 영조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광좌는 전 영의정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전날 밤에 급히 들고 온 역변(逆變)에 대한 소식을 영조에게 알렸다. 이전 사례에서 흔하게 보았듯 이 당시의 역모 고변은 대개가 무고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규서가 고변한 이유는 ‘이웃에 놀랍고 괴이한 일이 있어서’라고 했다. 같은 날 《영조실록》의 다른 기사에는 그 날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봉조하(奉朝賀) : 동서반 당상관 등의 관리가 70세가 되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 뒤에 임명되는 관직으로 전직 고급관료를 대우하던 일종의 훈호(勳號)일 뿐 실제 직무는 없었다.

 

[이때 도하(都下)에 근거 없는 풍문이 날로 흉흉하여 사람들이 모두 짐을 꾸려 들고 서 있어 조석 사이도 보장할 수 없는 듯하였고, 남산(南山) 아래 일대에는 가족을 이끌고 피해 도망하는 사부(士夫)들이 많아서 나루터에 길이 막혔으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함은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최규서(崔奎瑞)가 창황하게 상변(上變)하기에 미쳐서야 비로소 그 변고에 자취가 있음을 대략 알아 비로소 포졸(捕卒)을 풀어 잡도록 명했다. 마침내 적정(賊情)이 드디어 드러나니 뜻을 잃은 불량한 무리들이 박필몽, 심유현과 체결하여 역변을 지은 것이었는데, 남산 아래에 사는 나라를 원망하는 많은 부류들은 그 역모를 서로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양의 많은 사람들이 역모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피난을 가는 상황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뒤늦게 최규서의 고변을 통해 이런 상황을 알게 된 것이다. 조정은 놀라 급히 움직였고 실제로 그 이튿날인 3월 15일 반역이 일어났다. 이인좌의 난이다.

 

즉위 초부터 영조는 경종 독살설에 휘말려 있었다.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것이고 그 배후에는 세제인 연잉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담은 괘서(掛書)가 여러 곳에 나돌았고 독살설은 시중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영조도 이를 알고 있었다.

 

《경종실록》에 의하면 1724년 8월 2일부터 경종은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그래서 계속 병상에 누워 있던 중, 8월 20일에 게장과 생감을 저녁식사로 먹었는데, 이 게장과 생감은 한의학에서 상극으로 여기는 음식이었다. 경종은 결국 식사 직후부터 복통과 설사로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 의관들은 여러 약을 연이어 처방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고, 24일 오전에 경종은 아예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에 의관과 도제조 이광좌가 어떤 처방을 할지를 놓고 고심하던 차에 세제였던 영조가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의관 이공윤은 반대했지만 세제의 강력한 주장에 결국 경종에게 삼다(蔘茶)를 2번 올렸다. 그러자 경종의 눈이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온기를 찾았다. 이에 세제는 “성상(聖上)이 나에게 정(情)으로는 형제이나 의(義)로는 부자(父子)의 관계를 겸하였는데, 병환 중에 모시기를 잘하지 못하여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기도는 비록 때가 지났으나 빨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하고, 기도를 올리러 이광좌와 종묘로 갔는데 미처 기도를 위한 향(香)을 올리기도 전에 경종이 사망하였다.

 

이를 근거로 세제 연잉군이 써서는 안 될 인삼을 먹게 해서 경종을 죽였다는 것이다. 경종 독살설은 영조의 즉위를 원치 않았던 소론에서 만들어 퍼뜨렸다는 혐의가 짙다. 영조에게 안 좋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영조의 반대세력의 짓이고 그것은 소론일 수밖에 없다. 영조는 소론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조는 탕평책을 통하여 소론을 같이 품고 가려고 했다. 거기다 1727년에는 탕평에 동참하지 않는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대거 등용하는 정미환국이라는 모험까지도 감행했다. 이런 영조의 탕평책에 동참한 소론 세력도 있었지만 끝까지 노론에 적대적이고 강경했던 세력도 있었고 그 세력은 물론 영조에 대해 불만을 품은 세력이기도 했다. 이인좌는 그런 세력 중의 하나였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받게 된 소론 강경파들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다. 경종 독살설은 이들이 민심을 규합하고 당인들을 결속시키는데 이용되었고 거기에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 숙종의 장인이었던 김만기(金萬基)의 손자 김춘택(金春澤)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더하여 모반을 정당화하였다. 그들은 무력으로 영조를 폐하고 소현세자의 증손(曾孫)인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중심에는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동생인 심유현(沈維賢)도 있었다. 이런 계획은 영조1년인 1725년부터 실행에 옮겨져 각 지방의 인물들을 선별하여 포섭해 나갔다. 이인좌(李麟佐)도 그런 인물들 중의 하나였다. 이인좌는 선조 때 붕당을 예견했던 이준경(李浚慶)의 후손으로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이기도 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충주에 살았지만 유성룡이 생전에 이이를 비판하고 이준경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이준경은 영남지방에서 크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이인좌는 거사 전에 문경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가계(家系)를 배경으로 영남 유림을 포섭하였고, 그 아우 이능좌도 안동, 예천 등 경북지방을 돌며 인물들을 포섭하였다. 그런 와중에 최규서의 고변으로 자신들의 모의가 드러나자 이인좌가 부랴부랴 먼저 충주에서 거병을 한 것이었다.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 칭하고 1728년 3월 15일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진입,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각처에 격문을 돌려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주는 한편,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이인좌는 진중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기(旗)를 세우고, 경종의 위패(位牌)를 모시고는 조석으로 절을 올리며 자신들의 대의명분으로 삼았다. 이인좌에 이어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에서까지 난이 일어났고 그 가담자가 무려 30만 명에 이르렀다 한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변난으로는 가장 큰 난(亂)이었다. 하지만 사전에 서로 조율하지 못하고 불시에 산발적으로 거병한 반란 세력은 관군에 패하고 이인좌는 3월 24일 생포되어 한양으로 호송되었다. 이인좌의 난 때 동조자가 가장 많았던 곳이 영남이었다. 남인들이 많았던 영남에서는 안동 유림을 제외한 대다수가 거사에 동조하였고 그 때문에 한동안 영남은 반역향(反逆鄕)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이인좌의 난은 자칫 영조가 목숨과 왕좌를 동시에 잃을 수도 있는 가슴 서늘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영조는 소론을 탄압하거나 배격하지 않고 탕평의 소신을 굳세게 이어나갔다. 노론이 이인좌의 난을 이용하여 소론을 공격하려 하자 영조는 “국가가 있고서야 붕당이 있는 것이다. 나라가 없으면 경들이 어느 곳에서 당론을 펴겠는가?”고 질책하며 한탄하였다. 개인적 지지 세력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결단하고 그 결단을 꿋꿋이 실행하려고 노력한 것만으로도 영조는 훌륭한 왕이라는 칭송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병산서원(屛山書院), 서애 유성룡을 기리기 위하여 1613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건립된 서원, 클라우드픽 @가는세월 사진]

 

2019년, 우리나라의 서원(書院)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의해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으로 등재되었다. 백운동서원으로 시작해서 이후 명종으로부터 편액을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비롯하여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이 서원들에 대하여 영조는 1741년 철폐령을 내렸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의 자치운영기구였다. 조선후기 실학파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각 고을의 관학(官學)인 향교가 잘못되어 과거에만 집착하고 명예와 이익만을 다투게 되자, “뜻있는 선비들이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정사(精舍)를 세워 배움을 익히고 후진 등을 교육시킨 데에서 서원이 생겨났다”고 했다. 그런 서원을 철폐했다는 것은 언뜻 반문화적 조치로 보인다. 하지만 영조는 서원을 당론의 온상으로 보았다. 서원에서 제향(祭享)하는 인물이 누구냐에 따라 당파가 갈리고 또 그 당파에 대한 의리로 말미암아 당론이 그치지 않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과 사원이 전국에 40개소가 넘었고 10군데 이상의 서원에 제향된 인물이 10여 명에 이르렀다. 또한 제향인물도 뛰어난 유학자이어야 한다는 본래의 원칙을 벗어나, 당쟁 중에서 희생된 인물이나 높은 관직을 지낸 관리를 제향하는 경우까지 있어 선현제향이 아첨의 기풍으로 흐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영조는 숙종40년인 1714년 이후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건립한 곳들을 철거하도록 명을 내려 19개의 서원을 포함하여 도합 173개소의 사우, 영당 등의 사원(祠院)을 철폐시켰다.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재, 영주시청 사진]

 

 

참고 : 조선왕조실록,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이덕일, 1997, 석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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