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40 - 임오화변

從心所欲 2020. 4. 8. 17:22

[융릉(隆陵).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능. 사도세자는 처음 경기도 양주군의 배봉산에 안장됐지만 1789년(정조 13)에 지금의 위치로 이장했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풍수지리설을 따른 것이다. 융릉 바로 가까이에 정조와 왕비 효의왕후의 건릉(健陵)이 있다]

 

조선시대 몇 안 되는 현군(賢君)의 하나로 꼽히는 영조이지만 막상 영조를 말할 때면 그의 치세나 업적보다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더 자주 거론된다. 소위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광증(狂症)때문이라는 설과 친(親) 소론적 성향 때문에 노론에 의한 모함으로 죽었다는 당쟁희생설에다 사도세자가 영조를 죽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역심(逆心)설까지 여러 주장이 있다.

 

‘광증’설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을 근거로 한 것으로 그간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주장이었다. 이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이 주로 실록을 근거로 <한중록>의 내용을 반박하면서 당쟁희생설을 제기했는데 처음 나온 주장은 아니고 전에도 있기는 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주장이다. 반면 서울대 국문과 정병설 교수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지만 그것이 직접적 사인은 아니고 사도세자가 영조를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영화 <사도>에 사도세자가 칼을 들고 경희궁으로 향하는 장면은 정교수의 주장을 바탕으로 영화적 해석을 더한 것이다.

 

당쟁희생설이나 역심설은 모두 단순히 광증이 있다는 이유로 영조가 아들을 죽였다는 과거의 해석이 설득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온 주장들이다. 광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아들을, 그것도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이던 나라의 왕세자를 죽일 수 있느냐 하는 의문부터 죽이더라도 왜 꼭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야 했는가 하는 의문들이 남기 때문이다. 두 설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이소장의 당쟁희생설은 <한중록>을 혜경궁 홍씨의 자기 집안을 위한 변명의 기록으로 보고 사료로서의 가치를 낮게 보는 반면 역심설을 주장하는 정교수는 <한중록>을 사료로 인정하면서 개인적으로 편찬된 역사서에서 그 근거를 보완하고 있다. <한중록>에 대한 이런 엇갈린 견해로 인하여 사도세자에 대한 평가도 다르다. 이소장은 세자로서의 의연하고 영민했던 행적에 비중을 두는 반면 정교수는 세자가 어려서부터 공부에 별 뜻을 보이지 않으면서 어긋났다고 봤다.

 

나라의 공식 기록이라 할 《승정원일기》와 《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적다. 영조가 죽기 한 달 전 정조가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있는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들을 없애달라고 상소를 올려 많은 기록들이 삭제되었고 또한 《영조실록》을 편찬할 때도 정조가 편수관들에게 특정 시기에 대한 사도세자의 기록을 뺄 것을 명하여 상당 부분이 빠졌기 때문이다. 빠진 내용이 사도세자의 비행인지 광증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역심에 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도세자의 다른 기록으로는 가장 측근이 쓴 <한중록>과 <현륭원(顯隆園) 행장(行狀)>이 있다. 각기 부인인 혜경궁(惠慶宮) 홍씨와 아들인 정조가 썼다. 정조가 쓴 행장이야 당연히 아버지를 최대한 미화했을 터라 객관성을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한중록>의 객관성은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한중록>을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 <한중록> 은 혜경궁이 몇 차례에 걸쳐 쓴 글을 여러 가지 체제로 편집한 것이다. 그래서 이본(異本)이 20여개나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처음 네 차례에 걸쳐 쓴 글을 작성된 순서가 아니라, 사건의 시간적 전개에 따라 편집한 종합본을 일반적으로 <한중록>이라고 한다. 이 종합본의 편집은 혜경궁의 집안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혜경궁의 막내동생인 홍낙윤이라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혜경궁 홍씨의 집안은 정조가 즉위하자 사도세자의 죽음과 세손시절 정조의 대리청정에 반대한 것과 관련하여 치죄되어야 한다는 상소가 잇따랐다. 혜경궁의 작은 아버지인 홍인한은 유배되었다 사사되고 아버지 홍봉한과 동생 홍낙임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배려한 정조의 애타는 노력으로 처벌을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처벌을 안 받았다 뿐이지 그 혐의까지 말끔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근 이십년이 지나 혜경궁이 환갑이 가까운 노인이 된 1795년에 장조카 홍수영의 부탁을 받고 <한중록>의 첫 번째 글을 쓰게 된다. 이 시기 정조는 1804년 갑자년이 되면, 왕위를 아들 순조에게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사도세자의 자손 노릇을 제대로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전하는데 이른바 '갑자년 구상(構想)'이라는 것이다. 갑자년 구상에는 사도세자의 죄를 벗기고 국왕의 지위로 추존하는 일은 물론, 외가에 대한 신원도 포함되었다는 것이 뒤에 혜경궁이 자신의 글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그런 희망 때문이었는지 이 첫 글은 자신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궁에 들어오기까지의 일을 낱낱이,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적었다. 전형적 회고록으로 궁중 풍속과 관련해서도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사료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글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손자인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1년 뒤인 1801년, 신유박해 때 혜경궁의 동생 홍낙임이 천주교신자로 체포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5월 사사(賜死)되었다. 혜경궁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집안의 변고였다. 당시 혜경궁은 왕대비(王大妃)였지만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수렴청정을 하던 때라 아무 힘도 못쓰고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통한 마음에 혜경궁은 67세이던 이 해에 두 번째 글을 쓰고, 이듬해에는 세 번째 글을 쓴다. 그리고 임오화변을 주로 다룬 네 번째 글은 정순왕후가 죽은 직후인 1805년에 썼다. 순조의 생모 가순궁(嘉順宮) 수빈 박씨가 자손들도 알 수 있도록 임오화변의 경과를 써달라고 청하여 쓴 것이라고 하지만, 이 역시 초고는 1802년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근년에 공개된 다섯 번째 글, 이른바 ‘병인추록(丙寅追錄)’은 혜경궁이 72세 때인 1806년에 쓴 것인데, 세 번째 글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병인년에 그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세 번째 글을 쓸 1802년 당시는 정순왕후 대행 때라, 할 말을 다 시원하게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한중록>의 글들은 자신의 친정이 역적가문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때에 쓰인 글로, 친정에 대한 변호와 명예회복이라는 글의 의도를 의심받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가문에 반대되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이 얼마나 객관적인가가 논의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사료로서의 가치도 논란이 되는 것이다. 물론 국문학의 고전으로서 <한중록>의 문학적 가치는 논외다.

 

사적(私的)으로 사도세자의 일을 기록한 글로는 『이재난고(頤齋亂藁)』와 노론 서준보의 <시벽원위(時僻源委)>. 남인 박하원의 <대천록(待闡錄)>, 또 다른 남인계 이광현(李光鉉)의 <임오일기(壬午日記)> 등이 있다. 소론계의 입장에서 쓴 기록으로는 <현고기(玄皐記)>가 있다.

▶『이재난고(頤齋亂藁)』: 조선후기 학자 황윤석이 10세부터 시작하여 63세에 죽기 전까지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한 정치, 경제, 사회, 농·공·상 등 생활에 이용되는 실사(實事)를 망라하여 저술한 유고
▶<대천록(待闡錄)> : 남인 계열의 시파(時派)였던 박하원(朴夏源)이 임오화변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
▶<임오일기(壬午日記)> : 이광현이 승정원 주서로서 임오화변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기록한 일기와 영조, 정조의 처분, 관련 인사들의 상소, 차자 등을 첨부했던 것을 이왕직(李王職)에서 편집하여 필사한 책
▶<현고기(玄皐記)> : 원래 이름은 현구기(玄駒記)였다고 한다. 현(玄)과 구(駒)는 육십갑자로 임(壬)과 오(午)에 해당하여 임오년(1762)을 가리킨다. 고(皐)는 5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고기>는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 5월의 기록이라는 뜻이 된다.

 

당쟁희생설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친 소론 경향이었다. <현고기>의 저자 박종겸(朴宗謙, 1744~1799)은 소론 집안 출신으로 사도세자가 죽던 해에 박종겸은 19세였다. 당시 박종겸의 부친 박함원(朴涵源)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탄하며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해뒀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박종겸이 부친의 뜻을 이어 <현고기> 편찬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현고기>가 완성된 것은 정조 19년인 1795년으로, 혜경궁이 <한중록>의 첫 글을 쓴 때와 같다. 정조가 사도세자에게 존호를 올리고 신원을 마무리한 해이기도 하다. 그런 <현고기>에서는 사도세자의 일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의 장유승 선임연구원이 ‘<현고기> 번역본으로 드러난 임오년 사도세자 비극의 전말’이라는 글을 통하여 당쟁희생설이 타당한지 아닌지, 과연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이 사도세자를 죽게 한 주범인지를 논한 일이 있다. 아래는 해당 글 가운데 <현고기>를 인용한 부분만 요약 발췌한 것이다.

 

【“아, 임오년의 일은 천지의 큰 변고이다. 그 일은 당시에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 이야기는 오늘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차마 말할 수 없다고 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그 일은 점차 잘못 알려질 것이며, 감히 말할 수 없다고 끝내 말하지 않는다면 의리는 점차 어두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장차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 신민들이 자세히 말하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현고기> 서문)

세자는 신료들을 대할 적마다 말이 완곡하였고, 글 뜻을 강론할 적에는 남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으며, 위엄과 동작에 흠이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며 문장에도 익숙하여 성상께서 몹시 사랑하였고, 신민들의 기대도 두터웠다. 그러다가 정성왕후가 승하한 뒤로 좋은 소문이 점차 잦아들었다. 민간의 소문에 따르면 을해옥사 이후로 비로소 병이 생겼는데, 아무 귀신이 빌미가 되었기에 대내에서 야제(野祭), 불공(佛供) 따위를 자주 지내며 재앙을 없애려고 빌었다고 한다.
<현고기>에 따르면 사도세자에게 병이 생긴 것은 1757년 정성왕후가 승하한 뒤부터라고 한다. 정성왕후는 세자의 친모는 아니었지만 친모 못지않은 지극정성으로 세자를 돌보았다. 그래서인지 정성왕후 발인 때 세자는 눈에 부종이 생길 정도로 통곡했다고 한다.
▶정성왕후 : 영조(英祖)의 비(妃) 서씨(徐氏, 1692 ~ 1757). 1704년 13세 때에 연잉군과 혼인하였으나 자손이 없었다. 1735년 1월 21일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는 태어난 날에 바로 정성왕후의 아들로 입적되어 실제적으로 사도세자와 친모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세자를 매우 아꼈으며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늘 노심초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세자에게 병이 생긴 것은 을해옥사(1755) 이후라는 소문도 있었다. 을해옥사로 죽은 귀신이 빌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세자가 10대 후반부터 20세 초반 사이에 정신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세자의 병이 심해지자 홍계희와 김상로가 일부러 더운 약재를 써서 병을 악화시켰다는 소문도 돌았다.
▶을해옥사 : 영조 31년인 1755년 1월에 나주 객사(客舍)에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가 나붙은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으로 촉발된 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 사건에 대한 옥사(獄事). 이 옥사로 소론은 이후 재기 불능의 상태로 패멸하였다.

광증과 살인, 그리고 잦은 비행은 영조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영조와 세자의 관계가 멀어진 것은 세자가 십대 후반 무렵부터였다. 영조는 신하들 앞에서 세자의 잘못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신하들이 만류할 정도였다. 문소의(영조의 후궁)와 화완옹주(영조의 9녀)의 참소 역시 두 사람을 갈라놓는데 기여하였다는 것이 <현고기>의 주장이다.
영조의 편집증도 세자의 증세를 악화시켰다. 영조는 걸핏하면 사소한 일로 세자를 꾸짖었다. 세자가 이 때문에 자살 시도까지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영조와 세자 사이에 여자 문제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일화도 실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기 전에 이미 한 차례 죽이려고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현고기>에 따르면, 시강원 관원이 어느 날 밤 세자의 급한 부름을 받고 달려가 보니 세자가 속옷 바람으로 계단 아래 서 있었다. 놀라서 무슨 일인지 묻자 세자가 말했다. “막 취침하려 하는데 성상께서 홀연 창밖에 와서 ‘있느냐’ 하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 장차 일이 생길 줄 알고서 내가 뛰쳐나왔다.”
세자는 영조의 거동에서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 뛰쳐나왔던 것이다. 세자는 궁료에게 “춘휘당(春暉堂) 문턱에 아직도 칼자국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조가 세자를 향해 내리친 칼자국이다. 영조가 세자에게 자결을 명한 날, 세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 해에 신은 칼날에 죽은 혼백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뻔 하였는데, 지금 또 죽으라고 명하시니, 신은 마땅히 죽겠습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처분을 내린 것은 1762년 윤5월 13일의 일이다. <현고기>에 따르면 당시 경희궁에 머무르던 영조는 기우제를 핑계로 세자가 머물고 있는 창덕궁으로 와서는 갑자기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했다. 영조는 처음에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옷을 찢어 목을 매자 세자를 모시는 궁료들이 만류했다. 세자가 다시 허리띠로 목을 매었으나 역시 궁료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자는 이때 한 차례 기절했다. 세자가 깨어나자 영조는 뒤주를 가져오게 했다.

영조는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고 명하였으나 시강원과 익위사 관원들이 세자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영조는 화를 내며 군사들을 시켜 관원들을 끌어내게 하였다. 혼란한 와중에 군사들이 세자까지 밖으로 끌어내었다.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영조는 세자를 다시 잡아오라고 하였다. 승지 이이장(李彛章)이 영조를 말리며 자기가 직접 가서 데려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나가기도 전에 세자가 제 발로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세자는 뒤주에 갇히고 말았다.

뒤주에 들어간 세자는 한 차례 발로 차서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영조는 두꺼운 판자를 덧대고 못을 박은 뒤 굵은 밧줄로 묶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궁료들은 안팎을 오가며 정승들에게 세자를 구해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홍봉한, 신만, 정휘량 등 삼정승은 미온적이었다. 다급해진 궁료들은 세손을 데려왔다. 그러나 세손이 들어오는 모습을 본 영조는 급히 세손을 도로 데리고 나가게 했다.

뒤주에 들어간 세자는 그저 영조가 자신을 혼내려는 것이라 여겼다. 그는 뒤주 속에서 이제 그만해 달라고 빌기도 했으며, 누군가 영조에게 아뢰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영조는 그를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현고기>가 지목한 사도세자 사건의 주범은 김상로와 홍계희다. 이밖에 정휘량, 신만, 문소의, 화완옹주도 갖은 방법으로 세자를 모함한 공범이라고 했다. <현고기>는 세자가 이들과 갈등을 빚는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다. 세자는 특히 홍계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세자궁의 하인이 홍계희를 칭찬하고 다니자 세자는 곤장을 쳐서 그를 죽였다.

김상로와 홍계희의 당색을 굳이 따지자면 노론이다. 그렇다면 사도세자 사건의 주범은 역시 노론인가. 하지만 이들은 입장을 자주 바꾸어 노론에서도 배척받은 인물들이다. 김상로는 세자와 대립하다가 세자 편에 붙고, 다시 세자와 반목했다. 홍계희로 말하자면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노론의 정신적 지주,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자처했으나 정작 이재의 문인들에게는 배척받았다. 실록에 따르면 소론인 조현명, 송인명 등에게 붙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상로와 홍계희는 노론 중에서도 주변인이었던 셈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갔던 문정전(휘령전) 앞마당. 문정전은 동향의 정전 명정전 옆에 남향으로 붙어있다.]

 

장유승 연구원은 <현고기> 내용을 대강 소개한 뒤 당쟁희생설이 홍봉한을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했지만 <현고기>에서는 홍계희 등이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홍봉한을 제물로 삼았다고 주장한 점을 들어 당쟁희생설이 허구라는 결론을 내린다. 장 연구원은 서울대 국문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는데 이 글이 서울대 국문과 정병설 교수의 주장을 지원하려는 의도에서 쓴 글인지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영조실록》에 따르면 임오화변이 일어난 직접적 계기는 나경언의 고변이었다. 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라는 인물이 형조(刑曹)에 글을 올려, 환시(宦侍)가 장차 불궤(不軌)한 모의를 한다고 고하였다. 참의 이해중(李海重)이 이를 영의정 홍봉한에게 알리자 왕에게 계품하라고 하였다. 이에 영조가 나경언을 직접 국문을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나경언이 소매 속에서 봉서를 꺼내 영조에게 바쳤다. 영조는 그 글을 다 읽지도 못하고 손으로 문미(門楣)를 치면서 말하기를, "이런 변이 있을 줄 염려하였었다."고 했다. 고변서에는 사도세자의 허물 10여 가지가 상세히 적혀 있었는데 홍봉한의 청에 의하여 그 날 바로 불태워졌기 때문에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내 불려나온 사도세자에게 영조가 한 말을 통하여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환시(宦侍) : 환관(宦官)의 별칭
▶불궤(不軌) : 국법을 지키지 아니함. 모반을 꾀함.
▶문미(門楣) : 문 위에 가로로 댄 나무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代理)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영조실록》 영조 38년 5월 22일 2번째 기사)
▶왕손의 어미 : 원래는 빙애(氷愛)라는 이름의 인원왕후전 침방나인이었는데, 1757년(영조 33년), 사도세자의 눈에 띄어 그의 후궁이 된 귀인 박씨.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 37년 사도세자의 옷시중을 들다가 세자의 의대증(衣帶症,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일종의 강박증)이 도져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여승 : 안암동에서 승려로 있던 가선(假仙)이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영조 37년에 세자가 궁에 데려다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실록》에는 나경언을 액정 별감 나상언의 형이라고 했는데 노론 강경파로 대사헌을 지낸 윤급(尹汲)이 집안에서 부리던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어떻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었고 또 고변서를 작성할 수 있었고 또 감히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를 고변할 생각까지 했는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있다. 나경언은 그날 국문 중에 ‘동궁을 무함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야 마땅합니다.’라고 자백하였는데 매 몇 대에 이런 자복을 할 정도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고변한 것인데 나경언이 무엇 때문에 그런 무모한 고변을 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나경언은 바로 죽임을 당했다.

 

그 날 사도세자는 밤을 새우고 아침에 이르기까지 금천교(禁川橋) 가에서 대명(待命)하였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날마다 새벽에 시민당(時敏堂) 뜰에 나아가 대명하였다. 영조는 5월 29일이 되어서야 사도세자가 대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목(耳目)의 관원이 참으로 아주 개탄스럽구나. 나는 그가 대명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동안 아무도 사도세자가 잘못을 빌며 영조의 용서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영조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세자에게 아무런 답도 내리지 않았다. 달이 바뀌어 윤5월에도 세자의 대명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윤5월 6일 간원들이 나경언에 대하여 ‘나적(拏籍)의 율’로 시행하기를 청하자 영조는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겠는가? 오늘의 조정의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가 도리어 부당(父黨)·자당(子黨)이 되었으니, 조정의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라고 화를 냈다. 사도세자는 계속 영조로부터 아무런 하교를 듣지 못하고 12일까지 날마다 시민당에서 대명하였다. 그리고 운명의 날인 윤5월 13일을 맞았다.

▶대명(待命) : 벼슬아치가 과실이 있거나 상소(上疏) 등을 올렸을 때 임금의 처분이나 명령을 기다림
▶시민당(時敏堂) : 창덕궁 안에 있던 전각으로 세자가 경서를 강독하고 하례를 받던 정실.
▶나적의 율(拏籍律) : 역죄를 저지른 죄인의 남은 가족을 죽이거나 또는 노비로 만들고 그 재산을 몰수하는 법

 

그 날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를 덕성합(德成閤)으로 오라고 불렀다. 부름을 받고 간 혜경궁은 자신이 본 사도세자 모습을 <한중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 장하신 기운과 부호(扶護)하신 언사도 아니 하시고, 고개를 숙여 깊이 생각하시는 모양으로 벽에 의지하여 앉아 계시는데, 안색이 놀라 핏기가 없이 나를 보시더니.....”

그때에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다행히 별 일 없을 것이네. 그 뜻들이 무서워."

사도세자는 이미 죽음을 예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뜻들이 무섭다’고 했는데 과연 어떤 사람들의 뜻을 가리킨 것일까?

<한중록>은 이어진다.

 

이때 대조께서 휘령전으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하자’는 말도 ‘달아나자’는 말씀도 않고, 썩 융포를 달라 하여 입으시면서 ‘내가 학질을 앓는다 하려 하니 세손의 휘항을 가져오라 하시더라.
내가 그 휘항은 작으니 당신 휘항을 쓰시라고 하여 나인더러 가져오라 하였더니, 뜻밖에 썩 하시는 말씀이, ‘자네가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세손 휘항을 내게 안 씌우려는 그 심술을 알겠네’ 하셨다.
▶휘령전 :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왕대비의 혼전(魂殿)으로 활용된 경우가 많은데, 당시 영조의 비(妃)인 정성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는 동안 일시적으로 ‘휘령전(徽寧殿)’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왕의 위패가 종묘에 먼저 모셔지기 전에는 왕비의 위패를 종묘에 모실 수 없어 휘령전에 정성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다.
▶덕성합(德成閤) : 현 낙선재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낙선당의 부속 전각.
▶휘항 : 머리에서 어깨까지를 덮는 방한모.

 

그리고 사도세자는 영조가 기다리는 휘령전으로 갔고 그 이후의 일은 앞의 <현고기>에 나오는 대로이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어느 자료의 어느 구석을 더 중하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영조가 살아나와 그 본심을 말하지 않는 한 임오화변의 진실에 대한 논란은 계속 될 것이다.

 

[융릉 입구 홍살문 못 미쳐 왼쪽에 위치한 원형 연못 곤신지(坤申池). 풍수지리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이덕일, 2011, 역사의아침),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진재교, 정병설 등), <현고기> 번역본으로 드러난 임오년 사도세자 비극의 顚末(장유승, 중앙시사매가진 201512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