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42 - 영조의 좌절

從心所欲 2020. 4. 14. 17:53

영조는 집념으로 즉위 때부터 무려 30년간을 탕평에 힘썼다. 소론과 노론의 의리는 신임옥사를 둘러싸고 각기 선왕 경종에 대한 충심(忠心)과 현왕 영조의 세제 시절인 연잉군에 대한 충심이다. 영조의 입장에서는 소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신임옥사의 발단이 된 고변에 포함된 자신에 대한 혐의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노론 측 주장을 받아들이면 신임옥사에 대한 경종의 처사가 잘못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의 의리는 자신을 사랑한 형 경종의 처사를 훼손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정국의 안정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까지 고려한 고심의 결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재위 중에 늘 자신의 세제건저와 대리청정, 나아가서는 독살설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를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영조가 당론 대립을 싫어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중심에 늘 자신의 세제 시절 문제가 거론되는 까닭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을 위한 30년 공부는 끝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영조 31년의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을 계기로 영조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영조실록》 영조 31년(1755년) 2월 4일자 기사다.

 

[전라 감사 조운규(趙雲逵)가 나주의 객사(客舍)에 흉서(凶書)가 걸린 변고를 치달(馳達)하니, 임금이 좌포장(左捕將)·우포장(右捕將) 및 본도 감사에게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기찰하고 체포하도록 하였다.]

▶치달(馳達) : 급히 달리어 가서 여쭈어 알림

▶좌포장, 우포장 : 좌변 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 우변 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 죄인의 심문과 도적의 포획 및 도적·화재 예방을 위한 순찰 등의 일을 맡았던 포도청(捕盜廳)은 서울과 경기를 좌우로 나누어 좌(左) 포도청과 우(右) 포도청이 담당했으며 각기 좌변 포도대장과 우변 포도대장 2인의 포도장이 있었다. 포도대장은 종이품(從二品) 서반 무관직(武官職)으로 지금 서울의 부시장격인 한성의 좌윤(左尹), 우윤(右尹)을 지낸 자 가운데 추천하여 뽑았다.

▶기찰(譏察) : 범인을 잡으려고 수소문하고 염탐하며 행인을 검문하는 것

 

이 사건은 2월 11일에 [금부도사를 나주로 내려 보내어 윤지(尹志) 등 제적(諸賊)을 체포하게 하였다. 윤지는 역적 윤취상(尹就商)의 아들이다. 나주에 귀양을 가서 있으면서 몰래 역모를 품고 조정을 원망하며 같은 무리들과 체결하여 흉서(凶書)를 펼쳐서 걸었으므로, 전라 감사 조운규가 그 정황을 알아내어 조정에다 치주(馳奏)하니, 임금이 즉시 발포(發捕)하도록 명하였다.]는 기사로 이어진다.

▶치주(馳奏) : 급히 알리다

▶발포(發捕) : 죄인을 잡으려고 포교(捕校)를 보내는 일

 

기사에 나오는 역적 윤취상은 경종 때 한성 판윤, 훈련대장을 지내면서 노론 제거에 앞장섰던 소론 강경파였다. 영조 1년에 경종 때 흉계를 도모하였다는 노론의 계속된 상소로 70이 넘은 나이에 국문을 받다 죽었다. 또한 이때 그 아들 윤지(尹志)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윤지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영조 3년에 석방되었으나 영조 5년에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영조19년에는 고향에 종신토록 금고(禁錮)하라는 명을 받았다. 30년간 유배생활을 하던 그가 68세 되던 해에 나주 객사(客舍)에 민심동요를 목적으로 ‘간신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글을 붙였다. 이 사건의 국문 과정에서 같이 잡혀왔던 나주 목사 이하징(李夏徵)이 “신은 김일경(金一鏡)의 상소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신하로서의 절개가 있다고 말할 만하다고 여깁니다."라고 했다.

▶객사(客舍) : 조선 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로 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인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김일경이 누구인가! 경종 1년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소론 영수인 조태구와 함께 연잉군의 세제 대리청정을 반대하는데 나섰고 또한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을 사흉(四凶)으로 지목하는 연명 상소의 주동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조 즉위년에 영조가 친국한 끝에 목호룡과 함께 부대시참시를 당한 인물이다. 그런 김일경을 절개가 있는 신하라고 했으니 영조를 대놓고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영조의 콤플렉스인 세제 때의 일까지 들추어내 영조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영조는 이하징과 윤지를 죽이고 10여일이 넘게 직접 국문을 계속하여 관련자들을 찾아내 참형(斬刑)에 처했다. 그리고 3월 5일 영조는 이 옥사를 끝낸데 대한 신하들의 하례를 받은 뒤 사도세자에게 이렇게 하교하였다.

 

["30년 동안 고심했던 일을 이제야 비로소 성과를 맛보게 되었으니,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이 모두 한 덩어리로 돌아가 옛날에 충성했던 자는 편안하게 그대로 있을 것이며 옛날에 역적 같기도 하면서 역적이 아닌 자 또한 이미 마음을 고쳤을 터이니, 내가 장차 저승에서 성고(聖考)와 황형(皇兄)을 찾아뵙고 절할 면목이 있게 되었다. 이 뒤의 일은 네게 달려 있으니, 너는 그것을 굳게 지키며 흔들리지 말고 세도(世道)를 진압시키도록 하라."](영조 31년 3월 5일)

▶성고(聖考) : 숙종

▶황형(皇兄) : 경종

 

나주벽서사건을 통하여 역적(逆賊)을 토벌(討伐)한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 5월 2일 영조는 직접 춘당대에 나아가 토역 정시(討逆庭試)를 베풀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임금이 바야흐로 친림하여 시사(試士)하는데 한 시권(試券)이 처음에는 과부(科賦)를 짓는 것처럼 하다가 그 아래 몇 폭(幅)에다가는 파리 머리만한 작은 글씨를 썼는데 모두 난언 패설(亂言悖說)이었다. 고관(考官)이 앞으로 나와 그 글을 진달하니, 임금이 열어 보기를 명하였는데, 바로 무신년에 정법(正法)한 죄인 심성연(沈成衍)의 동생 심정연(沈鼎衍)이었다. 즉시 수색하여 붙잡아 대령하라 명하였다. 또 위소(衛所)의 하리(下吏)가 시권을 축(軸)으로 만들 때 과제(科題)를 쓰지 않은 한 종이를 보았는데 첫 행에 ‘상변서(上變書)’라 쓰여 있었으나 그의 이름은 없었다. 하리가 부장(部將)에게 주고, 부장은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에게 주었다. 홍상한이 크게 놀라 급히 달려가 고하여 올렸다.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니, 대신들이 그 대략을 듣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종이 가득히 장황하게 쓴 것이 음참(陰慘)하기가 헤아릴 수 없어 비단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땅에 떨어지는 듯하다. 방자하게 휘(諱)를 쓰기까지 했으니,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유시를 받들고서야 아주 패악하고 흉한 말이 있음을 알고 모두 분통하여 죽고자 하였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아서 쉽게 찾아낼 수가 없었다. 임금이 홍상한 및 삼군문(三軍門)의 대장 김성응, 홍봉한, ·구선행에게 즉시 조사해 잡게 하니, 홍상한 등이 심정연이 의심스럽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흉서와 시권 끝에 쓴 글의 뜻이 서로 같으니, 이것이 참으로 의심스럽다."

하고, 즉시 내일 친국할 것을 명하였다.] ( 영조 31년 5월 2일 2번째 기사)

▶춘당대 : 연산군 때 창경궁(昌慶宮) 후원(後苑) 춘당지(春塘池) 옆에 쌓은 석대(石臺).

▶고관(考官) : 과거 시험의 출제·감독·채점을 맡은 관리

▶무신년(戊申年) : 영조 4년인 1728년.

▶정법(正法) : 사형을 집행하다

▶상변서(上變書) : 임금에게 전쟁이나 난리와 같은 변(變)을 보고하는 글

▶휘(諱) :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명(名)이라 하는데 대하여 죽은 사람의 생전 이름을 가리키는 용어이나 여기서는 조선 역대 왕들의 이름. 선왕들의 이름을 썼다는 것은 조선 왕조와 영조를 능멸하려는 의도로 보임.

 

[창경궁 춘당지, 문화재청]

 

이튿날 영조가 심정연을 친국하자 심정연은 "이는 바로 신의 일생 동안의 마음이기 때문에 과장(科場)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써 두었습니다“라고 자복하였고 이후 국문 과정에서 그가 또 윤지, 김일경 일가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음이 나타났다. 심정연은 그 날로 참수되었다. 실록은 그 날 ‘임금의 노여움이 심하여 날이 저물었는데도 저녁상을 올리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다. 30년에 걸친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소론과 자신의 헛수고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었을 것이다. 같은 날 ["역적 심정연은 지난 사첩에도 없는 자로서 비록 역적 이괄(李适)과 같은 율을 시행했지만 그 분통을 풀기에는 부족하다. 법에 없는 법을 비록 갑자기 시행하기는 어렵더라도 응당 연좌시켜야 할 사람은 예사로 처리할 수는 없다. 그의 처는 흑산도의 비(婢)로 삼고, 그밖에는 모두 영남으로 거행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고는 다음날부터 영조는 근 한 달간을 매일같이 심정연의 국문 때 거론된 인물들을 잡아다 친국하여 처벌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소론의 온건파들마저 점차 사라지고 노론인사들로 채워졌다. 그렇게 노론 정국으로 바뀌어 7년이 지난 뒤 사도세자도 사라졌다.

 

[경남대학교박물관 소장 데라우치문고(寺內文庫) 中《제신제진(諸臣製進)》. 《제신제진》은 모든 신하가 시문(詩文)을 지어 올린다는 뜻. 영조의 치적 중 하나로 손꼽히는 1760년(영조 36) 청계천 준설사업의 완공을 기념하여 4월 16일 춘당대에서 시사(試射, 무장들의 활쏘기 시합)를 행한 후 영화당(暎花堂)에서 사선(賜膳,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림)하는 내용을 담은 기록화이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