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

조선의 당쟁 43 - 정조의 탕평책

從心所欲 2020. 4. 18. 21:21

영조 31년인 1755년의 나주괘서사건과 토역정시사건으로 을해옥사(乙亥獄事)가 일어났지만 이후 영조가 탕평책을 포기한다고 공식적으로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간 영조 턍평책의 핵심이었던 분등(分等)과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원칙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분등은 노론, 소론 양쪽에 모두 벼슬길에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열어주는 것이고 쌍거호대는 양파의 인물을 서로 견제할 수 있는 관직에 임명하여 힘의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영조는 죄를 주는 경우에도 어느 한쪽만 처벌하여 자신이 어느 쪽에 기울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을해옥사 이후는 심정적으로도 이런 원칙을 지속해 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을해옥사로 소론 강경파의 잔여세력이 완전히 몰락하면서 그간 노론이 주장해왔던 당론은 승리자의 명분이 되었다. 노론은 이를 신임의리(辛壬義理)라 불렀으며, 향후 두고두고 노론이 앞세우는 대의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정권을 장악한 노론은 다시 또 내부적으로 분열을 맞게 된다.

 

영조는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배필로 소론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사도세자의 배필로는 노론 홍봉한의 딸을 간택했었다. 이 또한 탕평책이었다. 또한 왕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죽자 영조 35년에 노론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정착시키는데 이들 척신(戚臣)들에 의지하였고 척신들 역시 왕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영조의 탕평책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소론 조문명은 영조 초기에 탕평책에 적극 협조했던 인물이었으나 영조 8년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조정에는 노론의 홍봉한과 김한구를 각기 대표로 하는 두 갈래의 척신세력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동조하는 노론, 소론, 남인 무리들이 있어 일명 탕평파로 분류되었다. 물론 이러한 척신들의 태도에 불만을 갖는 노론 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신임의리가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었다. 탕평에 대한 워낙 강력한 영조의 의지 때문에 노론과 소론 사이처럼 겉으로 드러내고 대립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곪고 있었다. 이들 불만 세력 중 홍계희(洪啓禧), 김상로(金尙魯) 같은 무리들이 정순왕후와 결탁하여 사도세자를 모함에 빠뜨렸다는 주장도 있다. 임오화변 이후 영조 말기의 정국에는 후일 정조가 되는 왕세손을 등에 업은 홍봉한 세력이 정권을 주도하는 상황 속에서도 척신에 비판적인 일부 관료들이 이를 견제하고 나섰다. 따라서 왕세손을 보호하려는 세력과 왕세손을 모해하려는 세력 간의 암투도 나타났다. 아이러닉한 것은 그 반대세력의 선봉에 홍봉한의 동생이자 혜경궁의 작은 아버지인 홍인한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에 이르면 노쇠한 영조는 이들을 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형국이 아니었다. 그나마 영조가 50여년을 지켜온 왕권으로 승하하기 몇 달 전 방해세력을 물리치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전격 강행함으로써 뒤에 정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영조는 즉위 53년째 되던 해인 1776년 3월 5일 묘시에 경희궁(慶熙宮)의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昇遐)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5일 뒤인 3월 10일 경희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묘시(卯時) :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

 

정조는 즉위한지 20일만 인 3월 30일에 이미 죽은 전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의 관작을 추탈하는데 정조는 이때 김상로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아! 김상로의 죄악을 이루 주벌할 수 있겠는가? 정축년 12월 25일 공묵합(恭默閤)에 입시하였을 때를 당하여 대행 대왕께서 하교하신 바가 있었는데, 김상로가 감히 망측하고 부도한 말로 어전(御前)의 자리에서 앙대(仰對)하는 짓을 했었다. 진실로 조금이라도 북면(北面)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천하 만고에 어찌 차마 양궁(兩宮)의 사이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선대왕께서 그를 풍도(馮道) 에 비유하셨다.

임오년에 다시 동궁(東宮)을 설치한 후에 나에게 하교하시기를,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 내가 강제로 치사(致仕)시킨 것은 천하 후세에 나의 마음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임오년의 일을 비록 감히 훗날 다시 들먹이지는 않겠지만, 임오년 5년 전의 때는 5년 뒤인 임오년의 조짐을 양성한 것이 곧 하나의 김상로일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정조 즉위년 3월 30일 첫 번째 기사)

▶정축년 : 1757 영조 33년

▶앙대(仰對) : 대답을 올리다

▶북면(北面) : 신하(臣下)로서 임금을 섬김

▶풍도(馮道) : 중국 오대(五代) 때 후주(後周)의 사람으로, 사성(四姓) 십군(十君)의 임금을 섬기면서 20여 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었는데, 충심(忠心)없이 벼슬만을 좇은 그의 행세가 비루하다하여 비난받는 인물.

▶임오년 : 1762 영조 38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해

▶치사(致仕) : 관리가 70세가 되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던 제도

 

김상로가 생전에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하였고, 영조는 김상로가 이미 일찍부터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을 도모하였다며 김상로가 아비의 원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고기>에서 사도세자 사건의 주범으로 김상로와 홍계희를 지목한 것과 상통한다.

 

[<서궐도안(西闕圖案)>. 서궐은 경희궁의 속칭(俗稱)으로 경희궁의 건물과 주변의 자연 경관을 부감법(俯瞰法)으로 12폭의 종이를 이어 붙인 화폭 위에 먹만을 사용해서 그렸다. 제발(題跋)이나 낙관이 없어서 화가와 제작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보물 제1534호.]

 

정조 1년인 1777년 7월 28일 정조가 정사를 마친 뒤 평소의 습관대로 밤늦게까지 존현각(尊賢閣)에서 촛불을 켜고 글을 보고 있었는데 곁에 있던 내시마저 호위 군사들의 숙직 상황을 살펴보고 오라고 내보낸 터라 정조 혼자였다. 그때 갑자기 동북(東北)쪽 회랑(回廊) 위를 따라 은은한 발자국 소리가 울려왔고, 이어 정조가 있던 존현각 한가운데 방 지붕에서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는 등 여러 소리가 들려왔다. 정조는 한동안 조용히 그 소리를 듣다가 환관과 액례(掖隷)를 불러 수색해보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보고를 받고는 단순히 도둑이 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뒤이어 도착한 도승지이자 금위대장(禁衛大將)인 홍국영이 현장을 보고는 변란을 일으키려 도모한 것이라 보고했다. 범인을 수색을 했지만 늦은 밤이라 찾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날 밤에 궁궐 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담을 넘어 궁궐에 침입 하려는 자를 잡았는데 전날 존현각 지붕에 올랐던 일행 중의 하나였다. 국문을 통해 그에게서 정조를 살해하려던 계획들이 드러났다. 경종 1년인 1722년 목호룡이 노론에서 3가지 방법으로 왕을 죽이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고변을 하여 노론이 대거 처벌되는 신임옥사가 있었지만 이는 이후 노론에 의하여 무함으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정조를 죽이려는 모의는 실제로 진행되다 발각된 것이다.

▶존현각(尊賢閣) : 경희궁 흥정당(興政堂) 동남쪽의 친현각(親賢閣)을 2층 건물로 개축하여 위층은 주합루(宙合樓), 1층을 존현각이라 이름붙이고 정조는 세손 때부터 이곳에 거처하면서 서연(書筵)의 중심지로 삼았었다.

 

[ 1890년대의 한양, 멀리 근정전 지붕이 보인다. 마이클 힐리어 컬렉션]

 

국문 결과 정조를 제거하려는 모의는 경종 때처럼 세 가지가 준비되었었다. 첫 번째는 자객을 궁궐에 보내 정조를 살해하는 것으로 자객이 한밤중에 존현각 지붕에 올라간 이유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무술에 의한 저주이고 세 번째는 사도세자와 빙애라는 이름의 경빈 박씨 사이에서 난 은전군(恩全君)을 추대하여 역모를 일으키는 것으로 이것은 장기적인 계획에 속했다. 그런데 이러한 계획은 모두 홍상범(洪相範)이라는 자와 그의 주변 인물들이 계획하고 추진한 것이었다. 홍상범은 홍술해의 아들이고 홍술해는 홍계희의 아들이다. 즉, 홍상범은 홍계희의 손자다.

 

홍계희(洪啓禧)는 한때 탕평파(蕩平派)에 접근해 출세했으나, 후일 탕평파 인물들과 불화가 생겨 멀어지자 영의정 김상로(金尙魯)와 결탁하였다가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내통하는 등 권력을 좇아 처세한 탓에 사림들로부터 소인이나 간신으로 지목된 인물이었다. 본인은 노론 이재의 문인이라고 자처했지만, 정작 대다수 이재 문인들로부터는 배척당하였으며 영조 47년인 1771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홍술해(洪述海)는 이조참의와 대사성을 지내고, 1775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이 때 외지로부터 미곡(米穀)을 사들여오면서 돈을 몰래 빼돌린 사실이 어사에게 적발되어 파직되었다. 하지만 다음 해인 정조 즉위년에 어사에게 적발된 것 말고도 추가로 재물을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위리안치된 상태였다. 이에 그의 아들 홍상범이 불만을 품고 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恩全君)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였던 것이다. 죄인들을 국문한 끝에 홍상범의 아버지 홍술해를 비롯하여 그 형제들인 홍필해, 홍지해 등은 주살되었고 은전군은 명을 받아 자진하였다. 이때 홍계희도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한 탄핵하여 관작이 추탈(追奪)되었다.

 

이 사건은 홍술해 집안의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정조는 세손 때부터 반대파의 견제와 방해를 받아왔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동생인 홍인한과 영조의 서녀(庶女)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인 정후겸(鄭厚謙)이었다. 이들은 정조 즉위 후에 바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지만 노론에서는 사도세자가 광패(狂悖)하여 임오화변을 자초한 것으로 여기는 세력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정조가 즉위한 후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자신의 의중을 나타내면서부터 자연히 정조에 반대하는 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노론 벽파(僻派)라고 하였다.

 

정조는 즉위 후에 영조 말부터 비대해진 탕평파 세력을 일소하였는데 여기에는 외할아버지인 홍봉한과 그 동조세력도 포함되었다. 대신에 영조 때에 척신 세력을 비판했던 노론계 인사들과 그간 정국에서 배제되었던 남인들을 등용하는 한편, 규장각과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를 통하여 당색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관료를 양성하였다. 벽파는 자신들이 반대하는 정조의 조정에 참여한 이들을 시류(時流)에 편승한다는 의미로 시파(時派)라 부르며 배척하였다. 시파 중에서도 특히 남인들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폐위되고, 또 뒤주 속에 갇혀 참혹하게 굶어 죽었다고 생각하여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입장이었다.

▶초계문신제 : 참상·참하의 당하관 중 37세 이하의 젊고 재능 있는 문신들을 의정부에서 초선하여 규장각에 위탁 교육을 시키고,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인재 양성 제도. 규장각은 문화 정책의 추진과 함께 정조 자신의 세력 기반을 다지는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조선시대의 당쟁에 관련된 사실을 기록한 작자미상의 정치서인 <분당록(分黨錄)>에 의하면 1623년의 인조정변 이후 서인들은 남인에게 참판 이상의 관직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남인들은 예송논쟁과 기사환국을 통하여 정권을 잡기도 하였지만, 1694년 갑술환국 이후 80여 년 동안 남인은 정계에서 밀려나 벼슬길이 막혀 있었다. 남인의 본거지였던 영남에서도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 이후에는 역적으로 몰릴까 두려워 남인에서 노론으로 당론을 바꾼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조는 이렇게 잊혀졌던 남인들을 기용하였다. 정조가 영조 때의 탕평파를 일소하였다고 해서 탕평을 배척한 것이 아니었다. 정조의 가장 기본적인 정책은 오히려 탕평책이었다. 자신이 지내는 방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 지었을 정도였다. 다만 영조가 소론 노론의 온건파들을 균형과 견제의 개념으로 등용했던 방식과는 달리 당파에 관계없이 좋은 인재들을 등용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동안 벼슬길이 막혀있던 서얼(庶孼)들을 등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정조는 붕당이 정치적으로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립하여 당이 아닌 왕을 보필하는 신하들로 자신이 실행하고자 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세력을 키워나가려 했던 것이다.

 

정조 12년인 1788년, 정조는 친필로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우의정에 특채하였고 아울러 남인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하였다. 이후 체제공은 1790년부터는 영의정, 우의정이 없는 독상(獨相) 체제에서 3년 간에 걸쳐 좌의정으로서 홀로 행정 수반이 되어 정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에 호응한 영남 남인들이 1792년에 영남만인소를 올려 그간 노론의 우위 아래 금기시되었던 임오의리(壬午義理)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노론을 크게 당혹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이어 1793년, 체제공이 잠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영남만인소와 같은 취지로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였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으로 인하여 시파와 벽파간의 갈등이 본격화 되었다. 이후 정국은 시파와 벽파로 재편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분립이 공공연해졌고, 시파의 부각에 위기를 느낀 벽파의 결집이 공고화되었다. 결국 사색을 고르게 등용하여 당론의 융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정조의 탕평책도 별다른 결실을 보지 못하고 시파와 벽파라는 또 다른 두 당파를 남긴 채 순조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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